진짜 급한 때를 위해서 평소에 여유를 확보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자동차 개발에서 예산만큼이나 중요한 자원이 시간이다. 기획자가 관리해야 할 QCDP의 한 축에 돈이 있다면, 다른 한 축에는 마일스톤이라는 시간의 데드라인이 있다. 아무리 좋은 차도 이전 모델을 대체할 시기를 놓쳐 신차 출시 시점이 한 달만 늦어져도 수백억 원의 마케팅 비용이 사라지고 경쟁사에 시장 주도권을 빼앗기게 된다. 여러 가지 활동들이 동시 다발적으로 이루어지면서 정해진 시점에 모두 일정이 마쳐야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자동차 개발 과정에서 기획은 개발 병목 현상을 해결하고 일정을 사수하기 위해 시간을 돈으로 살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가장 먼저 할 수 있는 방법은 병렬 검증을 통해 시행착오 기간을 절약하는 것이다. 일반적인 일정이 하나의 샘플을 시험하고 그 결과를 반영해 다음 샘플을 만드는 직렬 방식을 따르지만, 시간이 촉박할 때는 예상되는 모든 후보군을 동시에 제작한 다음 모두 시도해 보고 최적의 조합을 바로 찾아낸다. 예를 들어 자율주행 센서의 최적 위치를 찾기 위해 여러 개의 범퍼 시제품을 한꺼번에 만들어 동시다발적으로 테스트를 진행하는 식이다. 비록 시작차 제작비와 부품 샘플비는 몇 배로 증가하지만, 수개월이 소요될 피드백 루프를 단 몇 주로 단축할 수 있다.
원가를 절감하기 위해서는 저렴한 부품의 성능을 한계치까지 끌어올리는 최적화도 좋지만 일정이 밀리면 우선순위는 변할 수 있다. 충돌 성능을 확보하기 위해 설계 사양을 변경하는 것보다 더 강하고 가볍지만 값이 비싼 재질을 쓰고, 연비 목표를 달성하기 어려우면 조금 더 저항값이 낮은 고급 타이어를 쓰기도 한다. 목표 달성을 위해 필요한 개발 공수와 시간을 아껴서 양산 일정을 지키는 것을 선택하는 이런 선택을 하기 위해서는 처음부터 다양한 설계 사양에 대한 검토를 해 두는 것이 중요하다. 일단 도전해 보지만 정말 시급하면 하드웨어의 체급을 올려 리스크를 해결하는 전략은 기획자의 결단이 필요하다.
자체 인력이나 재원 만으로는 해결이 되지 않는다면 외부에 도움을 받는 방법도 있다. 여러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어 문제를 풀기가 쉽지 않은 소음, 진동 같은 품질 문제나 복잡한 소프트웨어 보안 같은 문제는 세계적인 엔지니어링 컨설팅 업체의 솔루션을 구매하는 것도 방법이다. 용병은 비싸지만 그만큼 단기간에 원하는 성과를 얻어 낼 수 있는 장점도 있다. 부품 수급 지연으로 라인이 멈추거나 진행해야 할 시험 일정이 지연될 위기라면 일반적인 해상 운송 대신 수십 배 비싼 항공 운송을 과감히 이용한다. 막대한 비용이 들지만 프로젝트 전체의 붕괴를 막기 위한 기회비용인 셈이다.
요즘은 부족한 검증을 채우기 위해서 디지털 트윈이나 가상 검증 인프라를 이용해서 일정을 단축하기도 한다. 실제 시작차가 제작되어 나오기 전까지는 테스트가 불가능하다는 물리적 제약을 깨기 위해 HILs(Hardware-in-the-Loop) 같은 시뮬레이션 환경에 집중 투자하는 회사들이 점점 늘고 있다. 가상 환경에서 제어기 간의 통신을 미리 검증하고 버추얼 모델 품평을 통해 실제 모델을 깎는 시간을 아낀다. 초기 인프라를 구축하는 비용이 만만치 않지만 물리적 샘플 제작을 기다리는 공백의 시간을 줄이고 안착하면 실제 차량을 제작해서 시험하는 비용도 오히려 절감할 수 있다.
자본주의 시대에서 자동차 기획의 성패는 지연으로 발생하는 리스크 비용과 시간을 사기 위해 투입하는 비용 사이의 전략적 균형에 달려 있다. 여유 있는 부분에서 최대한 부품 단가를 낮추고 에산을 절감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 여유분을 확보해 두면, 진짜 급할 때는 그 여유분을 가지고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정도 맞추는 묘수를 찾을 수 있다. 제한된 예산 안에서 우선순위를 정하고 언제 압박하고, 또 어떨 때는 돈으로 해결해 주어야 하는지를 결정하려면 개발 과정에 대한 폭넓은 이해가 필수다. 그러기에 기획 업무를 담당하게 되면 되도록 많은 경험을 쌓고 다른 분야의 담당자들의 고충을 이해하기 위해 소통할 수 있어야 한다. 어쨌든 차를 만들자는 목표는 다 마찬가지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