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배터리 2026 후기
코엑스에서 열린 ‘인터배터리 2026’은 여전히 붐볐다. 이란 전쟁과 널뛰기 주식 시장에도 배터리를 다루는 박람회는 다양한 산업군의 관심이 집중되었지만 초점은 확실히 예년과 달라졌다. 지난 몇 년간 전시장을 가득 채웠던 전기차에 대한 낙관론은 자취를 감추고 AI와 로봇을 대상으로 한 다양한 포트폴리오들이 눈에 띄었다. 아무래도 전기차 수요 정체와 중국 배터리 회사들에게 전기차 시장의 주도권을 내 준 K-배터리로서는 가혹한 현실을 돌파하기 위한 다변화가 필요했을 것이다.
사실 에너지를 담는 그릇인 배터리의 용도는 다양하다. 전기와 함께 살아가는 우리의 삶에서 전기를 저장하는 배터리는 어디서나 쓰일 수 있다. 다만 전기차만큼 비싼 가격에 수백만 대의 규모로 필요한 시장이 없을 뿐이다. 전기차가 기존 예상대로 기하급수적인 성장을 이루었다면 배터리 시장도 그만큼 성장했을 것이다. 그러나 중국의 물량 공세와 보조금 축소로 이익률이 급락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리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전기차의 빈자리를 ESS와 로봇이라는 새로운 탈출구로 공략하고자 하는 모습이 전시회 여기저기서 보였다.
경제성 측면에서 보면 이들의 선택은 이해가 된다. 전기차 배터리는 kWh당 단가가 100달러 선까지 떨어졌고 영업이익률은 1~3%대에 머물러 있다. 반면, 이번 박람회에서 주목받은 휴머노이드 로봇용 배터리는 단가가 전기차의 3~5배에 달하며 이익률은 20%를 상회한다. 용량은 작지만 마진이 높은 로봇으로 실익을 챙기고, 단위당 규모가 큰 ESS에는 LFP 배터리로 공장 가동률을 유지하는 투트랙 전략으로 현재 배터리 업계의 행보는 규모의 사수와 함께 수익의 확보라는 두 가지 목표를 쫓고 있는 모양새다.
문제는 이런 선택이 능동적으로 혁신했다기보다는 기술적 한계로 경쟁에 밀려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변화라는 사실이다. 삼성 SDI가 차세대 배터리로 늘 선두에 내세웠던 전고체 배터리의 주 타깃을 전기차에서 로봇으로 돌린 것이 이런 변화를 대변한다. 기술적 한계와 가격 부담 때문에 당장 전기차에 넣어 복잡한 환경에서 양산하기 힘든 전고체 배터리를 상대적으로 가격 저항이 적고 폼팩터 구현이 쉬운 로봇 시장으로 우회한 것은 이미 반고체 배터리를 양산해서 차량에 적용하고 있는 중국 경쟁사들과 비교해 보면 전략적 후퇴에 가깝다.
규모의 대안으로 여겨져서 모든 배터리 회사들이 전면에 내세우고 있는 LFP를 이용한 ESS 수요도 마찬가지다. AI 열풍을 타면서 친환경 발전의 저장소이자 막대한 전력이 필요한 AI 데이터센터용 모듈은 화려해 보였다. 삼성 SDI는 전면에 “AI thinks, Battery enables”라는 캐치프라이즈를 선보이고 AI 시대에 필수라는 점을 강조했다. 기존의 NCM 배터리의 발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다양한 기술들이 소개되고 파우치 형 LFP를 각형 형태로 변형해 공급하는 방안들도 선보였다. 거기에 AI를 이용한 각종 안전 관리 시스템까지 박람회에 메인 부스에 전시된 포트폴리오들은 진화하는 ESS의 미래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메인 전시장에서 조금만 돌아 나오면, 큰 회사 같은 화려한 시스템은 없지만, 중국의 CATL을 비롯한 배터리 셀을 활용해서 고객의 용도에 맞춤 ESS 공급이 가능하다고 영업을 하는 다양한 군소 업체들을 만나게 된다. 전기차처럼 이동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성능을 내고 안전을 보장해야 하는 환경 조건의 폭이 그렇게 복잡하지 않은, 그러면서도 입출력 전원의 움직임도 예측 가능한 ESS 부문에서는 누가 더 최적의 스펙을 싸게 공급할 수가 있느냐로 승부가 난다면, 과연 배터리 3사가 내세우는 고사양의 ESS의 수요가 그만큼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이런 기술 중심 이동의 경향은 배터리 양산 기술 지원 업체들의 전시에서도 느낄 수 있었다. 정밀 기계, 측정 장비 등 일본, 독일 같은 전통적인 제조 기술 강국들의 비중이 줄어든 자리에는 중국의 양산 업체들이 배터리 양산 기술 전수가 가능하다며 적극적으로 영업을 하고 있었다. 중국산 배터리 셀 자체에 대한 관세 장벽이 높아지자 우회로로 배터리를 만드는 기계와 공정을 수출하고 있는 것이다. 전극부터 조립, 마무리 공정까지 턴키로 제공되는 중국의 장비 기술력은 어느새 가까이에 다가와 있다.
당장은 로봇과 ESS가 배터리 산업의 생존을 위한 대책이 될 수 있다. 고효율이 더 중요한 로봇은 한 대당 필요한 배터리 용량은 작아도 맞춤 설계로 비싸게 팔아 수익을 확보할 수 있는 축이 된다. 아직은 전기차에 적용하기에는 부족하지만 그래도 열심히 따라가고 있는 국내 LFP 배터리는 박리다매와 운영 관리 시스템의 차별화로 시장을 개척하면 충분한 수요량을 확보해서 떨어지는 공장 가동률을 높이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중국과 척을 지고 있는 미국이 AI와 로봇이라는 두 첨단 산업에서 전 세계 산업을 리딩하고 있고 우리나라도 국가 정책적으로 두 분야를 적극적으로 육성하고 있는 것도 배터리 산업의 새로운 전략에는 유리하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경쟁력 있는 배터리를 만들어 기술 격차를 빠르게 따라잡는 것이 중요하다. ESS도 로봇도 배터리 산업에서 이렇게 주목을 하는 것이 처음이지만 앞으로 시장이 커지면 금세 붐빌 레드 오션에 가깝다. 진정한 승리는 AI 데이터센터와 로봇이라는 새로운 영토에 안주하지 않고 매출 규모를 유지하면서 중국이 넘볼 수 없는 고마진 특수 시장의 주도권을 얼마나 빨리 확보하느냐에 달려 있다. ‘인터배터리 2026’은 K-배터리가 자동차 산업의 조연에서 에너지 관리 산업의 주연으로 홀로서기를 시작한 지독하게 현실적인 생존의 현장이었다. 위기 속에 싹튼 이 기묘한 진화가 훗날 제2의 도약으로 기록되기를 기대해 본다.
자동차 산업동향 전문 플랫폼 아우토바인에 기고한 글을 조금 늦게 공유합니다. 전기차 없는 배터리 박람회가 아직은 어색하네요. 어려운 상황에서 에너지 관리로 다각화를 모색하는 기업들의 선전을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