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우리 땅에서 기술이 구현될 필요는 없다.
자동차 산업의 전동화 물결 속에서 수소는 단순한 대체 연료를 넘어 상용차 분야의 필연적 해법으로 자리 잡고 있다. 얼마 전 현대자동차가 엑시언트 수소트럭으로 유럽에서 누적 주행거리 2,000만 km를 돌파한 것은 수십 년간 묵묵히 수소 기술을 갈고닦아 온 우리 기업의 집념이 일궈낸 성과다. 무거운 배터리를 싣고 장거리를 달려야 하는 모순되는 대형 전기 트럭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유일한 답으로 수소를 제시하고, 그 신뢰성을 글로벌 물류 현장에서 입증해 냈다는 점은 박수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이제는 입증을 넘어 수소 모빌리티가 진정한 생태계로 안착하기 위한 냉철한 생존 전략을 고민해야 할 시점이다.
수소 경제가 꽃을 피우기 위해서는 세 가지 필수적인 지정학적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풍부한 신재생에너지를 기반으로 한 그린수소 생산 역량이 담보되어야 하고 국경을 넘나드는 초장거리 육로 운송 수요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수소를 이용한 운송이 가능하도록 뒷받침하는 촘촘한 충전 인프라가 필수다. 전 세계 자동차 시장들 중에서 유럽이 수소 상용차 개발의 본거지로 부상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유럽연합 전체가 탄소중립을 향해 거대한 단일 대오를 형성하고 있으며, 독일과 북유럽을 잇는 광활한 물류망이 존재한다. 여기에 2027년까지 주요 간선도로 200km마다 수소 충전소를 의무화하는 AFIR 규정까지 더해지며, 수소차가 마음껏 달릴 수 있는 판이 깔리고 있다.
유럽의 전통 상용차 강자들인 Daimler, Volvo, Renault 등의 회사들이 수소 트럭 개발에 사활을 거는 것도 이 판의 주도권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다. Daimler 트럭은 이미 액체 수소를 활용해 1,000km 이상 주행하는 GenH2 모델의 실증을 마치고 2026년 양산을 예고했으며, Volvo 역시 Daimler와 손잡고 연료전지 전문 기업 Cellcentric을 통해 인프라 구축과 표준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그들에게 유럽 대륙은 기술의 시험장인 동시에 즉각적인 수익을 기대할 수 있는 거대한 시장이다. 지정학적 확장이 보장된 지역에서 기술과 인프라가 동반 성장하는 이상적인 선순환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우리나라는 수소 상용차를 개발하기엔 훌륭한 인큐베이터이지만, 이를 대규모로 확산하기엔 환경이 다소 제한적이다. 좁은 국토와 낮은 신재생에너지 비중은 그린수소의 경제적 확보를 어렵게 한다. 장거리 물류의 경로도 단조롭고 평균 이동 거리도 짧은 편이다. 국내 수요를 기반으로 새로운 산업으로 육성하기에는 한계가 분명하다.
그렇다면 생산과 개발 및 검증을 이원화하는 건 어떨까? 현대차 전주 공장의 세계적인 수소차 생산 기반은 그대로 유지하되, 주된 개발과 실증의 무게중심은 생태계가 이미 형성되고 있는 유럽이나 미국 현지로 과감히 옮길 필요가 있다. 어디서 만들든 차는 길 위를 달리면서 성능을 입증해야 인정을 받는다. 한국에서 만든 수소 트럭이 유럽의 알프스를 넘고 미국의 대륙 횡단 도로에서 성능을 검증받을 때, 비로소 현지 환경에 최적화된 표준 기술로 공인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지화 전략은 단순히 차를 파는 행위를 넘어, 그 지역의 수소 생태계 자체를 선점하는 것을 의미한다. 현대차가 미국 캘리포니아 항만 물류에 수소 트럭을 대거 투입하거나 유럽 현지 물류 기업들과 공동 실증에 나서는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기술의 뿌리는 한국에 두더라도, 잎과 열매는 가장 비옥한 토양에서 맺도록 하는 전략적 유연함이 필요하다. 현지의 가혹한 환경에서 쌓인 데이터가 다시 전주 공장의 생산기술 고도화로 이어지면 전 세계 어디서든 통용되는 K-수소 기술의 수준은 더욱 높아질 것이다.
정부의 역할 또한 무작정 따라 하기식 생태계 구축에서 벗어나야 한다. 모든 지역에 억지로 충전소를 짓고 보조금을 뿌려 수소 사회를 강제하려 하기보다는 기업들이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력을 가질 수 있도록 최소한의 연구개발 테스트베드를 조성해 주는 데 집중할 필요가 있다. 평택항이나 울산 등 주요 물류 거점을 중심으로 수소 모빌리티 운영 소프트웨어와 충전 기술을 연계한 패키지 모델을 완성하고, 이를 해외 시장에 수소 물류 설루션 형태로 수출하면 국내에서의 다양한 시도들이 더욱 빛날 수 있다.
대만은 인구 2400만의 작은 섬나라에 불과하지만, 반도체 위탁생산 분야에서 세계 시장의 60% 이상을 점유하는 TSMC를 통해 전 세계 IT 산업의 생태계를 지배하고 있다. 비록 자국 내 반도체 소비량은 미미하지만, 그들은 전 세계 모든 빅테크 기업이 대만을 거치지 않고서는 제품을 만들 수 없는 구조를 설계했다. 수소 기술도 전통적인 제조 강국들이 과거의 유산에 취해 주저할 때, 우리는 가장 먼저 문을 열고 가장 멀리 내다보았다. 부진한 매출과 판매 대수에도 불구하고 현대차가 걸어온 수소 외길은 외로웠지만 조금씩 그 성과를 보이고 있다.
우리가 가진 수소 연료전지 기술력과 생산 역량을 지형적 한계에 가두지 말고 이제는 더 큰 바다를 향해야 한다. 유럽과 북미 등 수소 생태계가 이미 꿈틀대는 지역을 주된 실전 무대로 삼아 성능을 인증받는다면 그 과정에서 축적된 신뢰를 바탕으로 전 세계 대형 물류의 표준을 선점할 수 있다. 기술력을 뿌리에 두고 글로벌 시장을 영토로 삼는 수소 영토 확장 전략이 성공적으로 안착한다면, 한국의 수소 산업은 단순히 차를 만드는 국가를 넘어 미래 에너지 대륙의 지배자로 거듭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수소 상용차의 전진기지이자 R&D의 중심이 되어 전 세계 물류의 심장을 뛰게 할 그날을 기대해 본다.
이란 전쟁으로 석유에 대한 의존을 낮추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전동화의 사각지대인 대형 상용차에 대한 대안으로 수소에 대한 관심도 다시 높아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꾸준히 노력해 온 만큼 판을 주도하기 위한 생존 전략을 더욱 고민해 보아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