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 점심시간 사용설명서
그런 날이 있다. 회사가 싫어지는 날.
회사에 내 마음 터놓을 사람은 하나도 없는 것 같아 밖으로 뛰쳐나가고 싶은 날.
마침 점심시간을 앞둔 적절한 타이밍에 학교 선배에게서 카톡이 왔다.
- 시간 될 때 잠깐 통화 부탁해!
회사 밖으로 나왔다.
"야, 진짜 통화하기 힘들다. 바쁘구나?"
"미안. 어제는 내가 진짜 정신이 없었어."
실은 전날에도 선배로부터 두 번의 카톡이 왔었다. 퇴근길에 전화를 주겠다 답하고선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퇴근을 했을 땐 이미 전화는커녕 메시지를 보내기에도 너무 늦은 시각이었다.
10여분의 통화가 끝났을 때 내 두 발은 오락실, 펌프 앞이었다.
마음이 어수선할 땐 펌프만 한 게 없지.
고심 끝에 고른 첫 곡은 '마마무'의 '넌 is 뭔들'.
Hey Mr. 생각이 멋진 남자 바로 너
너어어어 아아아아
나 지금 너 땜에 혼란스러
제발 누가 나 좀 말려줘.
회사 밖에 나와서까지 다시 떠올리고 말았다. Mr 팀장님.
'생각이 멋진 남자 바로 너'라서가 아니다.
'미소가 예쁜 남자 바로 너'라서도 아니다.
제발 누가 나 좀 말려줬으면 싶게 나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사람이라서다.
선배에게 일찍 연락할 수 없었던 이유, 어제 퇴근이 늦었던 이유는 회의 준비 때문이었다. 우리 팀은 지난주부터 제법 큰 규모의 회의를 준비해 왔다. 회의 담당자로서 나는 눈코 뜰 새 없는 일주일을 보냈다. 크고 작은 회의를 수십 번 준비해 봤지만, 사장님 주재 회의는 처음이었다.
지난밤 드디어 완성한 회의 계획안은 20페이지에 달했다. 안건을 비롯해 참석자들의 프로필, 동선과 좌석배치도, 보도자료, 말씀자료까지 공들여 준비했다. 비슷한 회의를 준비할 담당자들에게 "혹시 계획안 공유 부탁드려도 될까요?"를 5번은 들을 정도의 퀄리티라고 자부했다.
남은 건 사장님 보고뿐. 사업부서 실무자인 내가 사장님을 대면하고 보고 드릴 일은 1년에 많아야 한두 번이다. 오늘이 바로 그 한 번이 될 예정이었다.
그리고 오늘 아침.
- 보고라고 하지 않았어?
동기가 내 메신저가 온라인 상태인 걸 보고 의아하다는 듯 말을 걸었다.
- 응. 지금 시작했을 걸.
- 시작했을 걸? 왜 남 얘기처럼 말해? 안 올라갔어?
- 부서장님이랑 팀장님 들어가셨어.
- 헐! 넌 왜 안 가고?
불만? 불안? 의구심? 말로 딱 정의하기 어려웠던 감정들이 동기의 질문에 훅 불거졌다. 두 분이 내가 쓴 계획안을 챙겨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나를 두고 자리를 뜬 순간부터 작게 소용돌이치고 있던 감정들이었다.
- 같이 가겠다고 말하지 그랬어?
그러고 싶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내가 쓴 계획안이었다. 그러니까 제가 보고하는 게 당연하잖아요!
게다가 사장님은 회사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의 최종결정권자다. 이런 회의를 여는 것부터 부서를 만들고 없애고 승진을 시키고 마는 일까지도.
동기 중 절반이 승진을 했다. 나는 나머지 절반 쪽이었다. 인사나 기획 부서에서 근무하는 동기들이 임원들과의 잦은 대면에서 오는 불만을 토로할 때 나는 솔직히 부러웠다. 내가 마주하는 사람들은 주로 회사밖에 있는 고객들이다. 최선을 다하면 고맙다는 말을 들을 수 있고 거기에서 오는 뿌듯함과 자부심도 크다. 하지만 회사 안에서도 누군가 내 수고를 알아줬으면 좋겠고 그 누군가가 이왕이면 나를 평가하고 승진심사 때 한마디 낼 수 있는 분이면 좋겠단 말이다. 근무평가점수로 승진후보자명부에 오른 후의 절차는 전적으로 임원들에게 달려있었다.
얘 내가 아는데 일 좀 하더라고.
이 한 마디가 승진자 명부에 들고말고를 결정지을 만큼 중요하단 뜻이다.
왜 날 안 데려가냐고 당당하게 말할 수 없었던 이유, 바로 그래서였다. 담당자이기 때문에 함께 들어가야 한다는 마음 이면에 인정받고 싶은 마음, 사장님께 얼굴 한번 보여드리고 싶고 이름을 기억해주셨으면 하는 욕심이 있었다.
- 그 말이 안 나오더라.
- 애매하긴 하지. 그런 건 위에서 먼저 챙겨주시면 좋은데.
동기가 내 속을 꿰뚫어 본 듯 말했다.
옆 부서장님은 본인이 직접 쓰신 자료조차 후배들 공인 양 앞세워 보고하신다던데. 나는 되려 공을 빼앗긴 것 같아 억울한 기분도 들었다. 곰곰 생각해 보니 이번이 처음도 아니다. 내가 쓴 신규사업 계획안이 나 없는 자리에서 보고된 적도 있었지. 혹시 지금 나 당하고 있는 건가?
아닌데.
우리 팀장님 좋은 분인데.
위에서나 밖에서 오는 무리한 요구를 막아주려 애쓰시고 일이 많을 때는 손이 많이 가는 실무적인 일도 분담해 주는 배려 깊은 분인데. 불과 몇 주전까지도 이만한 팀장님 만나기 어렵다고 생각했는데.
혹시 내가 아직 대상자가 아니라고 여기시는 건가?
사번이 밀려서? (아니 우리 동기 절반이 승진했는데?)
나이가 어려서? (새치염색 주기를 늘려야 하나.)
설마 여자라서? (에이, 그건 아니겠지.)
괜한 피해의식에 사로잡혔다가 헤어 나오기를 여러 번.
이런 마음은 아무리 친한 동기라도 솔직하게 털어놓기가 어렵다. 뭐 이깟 일에 신경 쓰냐 할 것 같고. 좀 없어 보이기도 하고.
세 곡을 신나는 템포로만 연달아 뛰었더니 머릿속이 조금 비워졌다. 겨우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둔 회사로부터 꽤 멀리 벗어난 기분이다.
열을 식힐 겸 공차 매장으로 향했다. 사무실에도 밀크티 비슷한 게 있다는 걸 떠올리고 입구에서 살짝 망설였지만 결국 주문을 했다. 오늘은 남이 만든 더 맛있는 밀크티를 내게 먹여주고 싶어서.
시원한 밀크티를 들고 건물을 빠져나와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는데 산책을 다녀오시던 팀장님과 만났다.
"저 자들은 김 차장 팬클럽이야?"
팀장님이 가리키는 곳에는 내 남자동기 셋이 서 있었다.
"그런 가봐요. 저는 모르는 분들인데."
내가 농담으로 받아치자 팀장님이 제법 진지하게 되물었다.
"진짜 몰라? 저기 서서 김 차장 계속 보고 있는데."
"웃기려고 하는 말씀이시죠? 그늘 밑에서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은데요?"
마치 정말로 몰랐다는 듯이 팀장님이 큰 소리로 웃었다.
"뭐야, 그런 거야? 정말 그런 거 같네. 하하."
아니, 이 팀장님 뭐지? 저 순수한 웃음은 도대체 뭐야? 정말로 모르시는 건가? 내가 원하는 게 뭔지?
설마 나서서 보고하는 게 팀장의 마땅한 책임과 도리라고 생각하시는 거? 임원을 불편하고 어렵다고 생각하는 실무자들이 많으니까? 보고를 두려워하는 실무자도 꽤 있으니까? 혹시 나 오늘 '배제'가 아니라 '배려'당한 거야?
근데 팀장님, 저는 아니거든요.
저는 사장님 만나는 거 안 불편해요.
이사님들도 마찬가지고요.
저 좀 추켜세워주세요, 네?
나중에 술 한잔 하며 얘기해야겠다.
오늘은 술 대신 밀크티다.
달달한 음료 덕인가. 기분이 좀 나아졌다.
남들이 하는 인정이나 평가가 다 무슨 의미인가 싶다.
뭘 얼마나 잘해보겠다고 속을 끓이나. 성공이 별 건가?
별 게 아닌 건 또 아니지. 한 직급 오르면 밀크티가 몇 잔인데. 펌프는? 천 원에 세 판씩 계산하면 어우, 별 거 맞네.
근데 그 별 거가 용을 쓴다고 얻어지는 것도 아니니 이런 일로 스트레스는 받지 말아야지 싶다. 하루이틀 하고 말 직장생활 아니니까. 지금은 별일 같아도 길게 보면 별일 아니니까.
펌프 세 판, 밀크티 한 잔.
5천 원어치로 위로가 될 정도면 괜찮은 편이라고 스스로 다독이며 쉼표 끝, 업무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