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 점심시간 사용설명서
내 입으로 말하긴 민망하지만 나는 금수저를 물고 자랐다. 부모님은 자신들은 아까워서 한입 먹어보지도 못할지언정 내게는 흠 없고 좋은 과일을 사주셨고, 쓰레기를 치우며 버신 돈으로 깨끗한 옷을 입혀주셨고, 한 달 치 월급의 절반을 툭 털어 내가 다니고 싶어 하는 학원에 보내주셨다.
빈손으로 세상에 나와 이제는 스스로 돈을 벌 수 있는 어른이 되었는데도 아직 마르지도 않고 녹슬지도 않는 수저. 비면 언제든 다시 채워질 준비가 되어있는 수저. 이게 금수저가 아니면 뭘까.
금수저를 물고 자란 아이는 자기도 금수저를 물려줄 궁리를 한다. 부모님이 주신 것만큼 좋은 걸 내 아이들에게도 주고 싶지만 부모님만큼 고생할 자신은 없다. 난 좀 더 게으르고 쉬운 길로 가고 싶다.
'전방위 상호관세 부과 충격파에 美 증시 대폭락'
때가 왔다. 오늘 점심시간에 할 일이 생겼다.
주식시장이 열리는 시간은 오전 9시부터 오후 3시. 근무시간에는 주식 어플을 열지 않으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하는 편이다. 혹시라도 먼 훗날 내가 무지무지 대단한 사람이 돼서 청문회 같은 자리엘 섰을 때, 누가 내 과거를 캐서 따지고 들까 봐.
주식투자로 큰 자산을 일구셨네요!(이 또한 아득한 희망사항이다.) 그런데 오전 10시, 오후 2시? 이거 뭡니까? 근무시간에 딴짓을 한 겁니까? 회사의 시간을 유용한 사람에게 중요한 직무를 맡길 수 있겠습니까!
풉, 지금은 일개 직장인이자 개미일 뿐이지만, 사람 일은 모르는 법. 장차 내 앞에 어떤 길이 펼쳐질지 알 게 뭐야?
그래서 하루 중 안전하게 주식을 사고팔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 점심시간이다. 미래의 경쟁자님, 설마 점심시간마저도 회사의 시간이라고 주장하실 건 아니죠?
파란 하늘, 파란 바다, 푸르른 미래.
파란색은 다 좋은 뜻으로만 쓰이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란 걸 주식을 하며 알았다. 오늘 주식창은 참 파~랗다. 등락률에 따라 색깔의 진하기가 달라진다면 내 계좌는 파랗다 못해 쪽빛이 되고 말았을 거다. 이러다 내일은 아주 까매져 버리는 거 아냐? 그래서 '검은 월요일'이라는 이름이 생겼을까.
마이너스 뒤의 등락률은 오르락내리락하며 조금씩 더 커지고 있다.
그래, 주식은 이럴 때 사는 거랬지.
가족 공금계좌가 개설된 은행 어플을 열었다. 우리 집 공금계좌 이름은 '저수지 통장'. 가계에 가뭄이 들면 꺼내 쓰려고 월급날마다 얼마씩 모아두는 계좌다. 가뭄이 언제 들지 모르니 편하게 꺼내쓸 수 있게 자유입출금통장에 넣어두었다.
부부의 연금저축계좌로 각각 얼마씩 이체한 후 남편에게 매수를 권하는 메시지를 보냈다.
- 오늘 사라고? 앞으로 쭉 떨어질 거 같지 않아?
갑자기 주저되는 마음. 남편은 딱히 재테크에 관심은 없지만 타고난 감각 비슷한 게 있는지 툭툭 던지는 말이 제법 잘 맞는 편이다. 하지만 주식은 그렇게 하는 게 아니라고 배웠는데...... 살 때는 더 떨어질 걸 기다리지 말고 팔 때는 더 올라갈 걸 기다리지 말라고 배웠는데......
갈림길에 선 사람처럼 심각하게 고민하다 마침내 결정을 내렸다. 여기는 갈림길이 아니니까, 반반 무 많이. 덥석 물기에는 겁이 나고 안 물기에는 아쉬울 때는 일단 조금만 담아보는 거다.
시장가격으로 사기엔 손해 보는 기분이 들고 낮춰서 주문을 걸자니 체결이 되지 않을까 염려된다. 뛰어난 투자자라면 손해보지 않으면서도 간신히 거래가 체결되는 절묘한 가격을 제시했겠지만 평범한 개미에 불과한 나는 시장가격에서 한두 호가만 낮춰 주문을 넣는다. 5분이 채 안되어 주문체결알림이 온다. 곧이어 시장가격은 방금 내가 산 주가보다 낮아졌다. 조금 더 기다릴 걸 그랬나.
남편의 예고는 적중했다. 다음날 주가는 전날보다 더, 훨씬 큰 폭으로 떨어졌다. 포털 메인이 '공포'와 '폭락'이라는 단어로 도배되었다. 주가는 사자마자 쪽빛이 되었다.
소금장수와 우산장수를 둔 엄마처럼 이래도 걱정, 저래도 걱정인 투자의 세계. 그럼에도 불구하고!
- 난 오늘도 살 거야.
남편에게 또 메시지를 보냈다.
- 난 100 밖에 없는데 살까?
사자! 가뭄에 대비해 모아둔 저수지니까. 지금이야말로 세계 경제에 심각한 가뭄이 든 시기이니 우리라도 단비가 되어주겠다는 대의로......는 개뿔! 골이 깊을수록 산이 높다고 했다. 쌀 때 사야 더 많이 벌지.
주가가 지하실을 뚫고 내려가는 날 우리 부부는 깊이를 알 수 없는 푸른 바다에 현금을 한 움큼씩 끼얹었다. 우리의 피 같은 현금을 머금고도 바다는 또다시 아래로 아래로 끝을 모르고 깊어지기만 했다.
하마터면 사무실에 늦을 뻔했다. 주식창을 보고 있으면 시간 가는 줄을 모른다. 어플을 가급적 열어보지 않으려는 이유 중 하나다. 본다고 더 오르고 안 본다고 내리는 것도 아닌데.
아이들 돌보듯 수시로 챙겨 볼 자신이 없어서 공금으로 투자하는 계좌는 대부분 지수를 추종하는 ETF로 구성했다. 세계 시장의 흐름을 반영하는 가장 대표적인 종목 위주로 담았다. 덕분에 개별 기업의 흥망성쇠에 휘둘릴 필요가 없다. 시시때때로 계좌를 들여다보며 전전긍긍할 필요도 없다. 경제불황을 운운하는 기사가 보이면 내 자산도 줄어들고 있겠구나, 반대의 분위기에서는 좀 늘었겠구나, 할 뿐이다.
내 금수저에는 먹을 것, 입을 것 말고도 또 하나 감사한 자산이 들어있었다. 자소서에서는 '끈기'라는 단어로 포장되었던, 우리 엄마의 표현을 따르자면 '미련곰탱이' 같은 기질. 100미터 달리기는 꼴찌였지만 오래달리기는 가끔 순위권에 들기도 했다.
환율이 오르고 금리가 내리고 주가의 향방이 어떻고 하는 계산은 도통 어렵고 단기간에 치고 빠지는 눈치게임은 자신 없다. 그래도 기다리는 거 하나는 자신 있다.
그리고 먼 미래에는 계좌가 뚱뚱해져 있을 거라는 믿음이 있다.
세상이 점진적으로 더 성장할 거라는 믿음.
기업들은 돈을 더 많이 벌고 사람들은 더 좋은 직장에서 일하게 될 거라는 믿음.
올해보다 내년에는, 지금보다 10년 후에는 모두가 더 잘 살 거라는 믿음.
그러니까 오늘 점심에 내가 산 주식은 세상이 더 좋아질 거라는데 건 판돈이다.
생각해 보니 저수지 통장과 공금 투자계좌를 처음 만든 것도 5년 전 어느 점심시간이었다. 햇빛이 잘 드는 맥도날드 2층 창가 자리에 앉아 30년 치 우리 집 재무계획을 세웠다.
그 계획에 따르면 30년 후 우리 집은 지금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부자가 된다. 물론 주가가 이렇게 출렁일 걸 계획을 세울 당시에는 몰랐지만, 떨어진 주가도 언젠가는 다시 올라와주겠지? 올라와줄 거야. 올라와, 아니 올라가 줘야만 해!
그래야 우리 애들한테도 금수저를 물려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