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 점심시간 사용설명서
"점심 뭐 드세요?" 후배가 물었다.
"김밥 먹으려구요."
"아... 저희 돈가스 먹으러 갈 건데 같이 드실래요?"
"아냐, 난 김밥 먹을게요. 맛있게 먹어요."
"그럼, 라면이라도 같이 드세요."
아니 대체, 돈가스와 비교해서 김밥이 부족한 게 뭐란 말인가. 김에 흰쌀밥, 시금치와 당근, 우엉, 취향에 따라 참치나 고기까지. 영양만점에다 맛도 빠지지 않는데.
게다가 라면'이라도' 같이 먹으라니, 김밥이 들으면 서운하겠다. 나 하나로는 부족해? 이렇게 빵빵하게 속을 채웠는데 더 필요하니? 하면서. 생각해 보니 흔히 쓰이는 '김밥이나 간단히 먹어야겠다'나 '주문하는 김에 김밥도 추가하자'는 식의 표현도 김밥은 억울하지 싶다.
만오천 원이 넘는 돈가스나 파스타에는 기꺼이 지갑을 여는 사람들도 김밥에는 유독 박하게 군다. 천 원이었던 김밥 한 줄이 2천 원이 되고 3천 원이 되자 이제 김밥'마저' 쉽게 사 먹을 수 없게 되었다며 한탄하는 반응도 자주 보인다.
특별한 날 외식메뉴 후보로 스테이크나 삼겹살, 짜장면은 곧잘 떠올리지만 김밥은 그다지 인기가 없다. 나도 후배들에게 쏠 때 김밥을 메인으로 떠올린 적은 없었다.
도대체 왜? 김밥은 어디가 못나서 제대로 대접받지 못할까? 회전초밥집에 가면 계란 한 조각 툭 얹은 한입거리 초밥도 2천 원에 파는데, 김밥은 한 줄에 겨우 3천 원에 팔리면서도 왜 눈치를 봐야 할까?
들어가는 재료의 가격과 투입되는 노동력을 따져보면 결코 만만한 음식이 아니라는 건 김밥을 만들어본 사람이라면 안다. 그럼에도 천 원에 사 먹을 수 있던 음식이 김밥이라서, 굳이 특별한 날에까지 먹고 싶지는 않고 누구에게 한턱 내기에는 좀 민망한 메뉴가 되어버린 거다. 바쁠 때 대충 한 끼 때우기에 좋은 김밥, 다른 대안이 없을 때 고르기에 만만한 김밥이 되어버린 거다.
마음 따뜻한 후배가 굳이 돈가스를 먹으러 가자고 권한 것도 그래서였을 거다. 이 언니 밥 먹기가 마땅치 않아서 김밥으로 대충 때우려나보다, 싶었겠지.
하지만 나는 김밥을 정말 좋아한다. 혼자 자취하던 시절에도 김밥용 김은 항상 냉동실에 구비해 뒀다. 소금을 솔솔 뿌려 간을 맞춘 밥에 김치와 치즈, 두툼한 계란을 올려 둘둘 말아먹곤 했다. 때에 따라 엄마에게 얻어온 진미채볶음, 멸치볶음, 깻잎이나 파김치 같은 것도 마구 넣어버린다. 뭘 넣든 김밥은 맛있다.
그중에서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김밥은 참치김밥. 마요네즈에 버무린 참치와 상큼한 단무지의 조화. 설명이 필요 없는 맛이다.
김밥은 밥과 반찬을 따로 집어먹지 않아도 되는 데다 흘릴 염려도 없어서 다른 작업과 겸하는 식사용으로도 딱이다.
오늘은 참치김밥을 먹으며 대학 동기가 추천한 세바시 영상*을 보기로 했다. 썸네일에 적힌 문장이 솔깃하다.
- 성공한 직장인은 직장을 이렇게 '이용'합니다.
요지는 직장을 바라보는 시선을 바꾸라는 거다. 직장이 직원을 이용하듯 우리도 직장을 이용하자는 거다. 직장이 곧 직업이라는 착각을 버리고, 회사 밖에서도 나를 찾는 사람들이 많도록 나를 위해 투자하라는 내용이다.
강연자는 '워라밸'에 대해서도 새롭게 정의했다. 일과 삶의 균형이 아닌 '남 좋은 일과 나 좋은 일'의 균형. 직장에서 하는 일이 남을 위한 일이 아니라 나에게 좋은 일이라고 여길 수 있다면 일하는 시간이 곧 나에 대한 투자가 된다는 뜻이다.
* 당신에겐 '직장'은 있어도 '직업'은 없을 수도 있습니다 | 김호 더랩에이치 대표
워라밸. 현실과는 괴리가 있는 단어였다. 요즘 들어 아이들을 재운 뒤 노트북을 켜는 날이 많았다. 지난 주말에도 눈으로는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를 보면서 손으로는 월요일 보고할 계획안의 도표를 만들었다. 남에게든 나에게든 인정받길 좋아하는 성격이라 나름 열심히 일하는 편이지만, 한 번씩 억울함이 솟구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회사가 뭔데! 도대체 뭔데 자꾸 내 시간을 침범하는 건데!
그런데 남 좋은 일이 아니라 나 좋은 일을 많이 하는 게 워라밸이라면 그래도 좀 사수해 볼 만하지 않을까. 회사에서의 업무를 바꾸는 건 쉽지 않겠지만, 업무가 남한테만 좋은 일이 아니라 나 좋은 일도 되게 하면 되니까.
점심시간, 아무도 없는 회의실에서 참치김밥을 우물거리며,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다. 15년 이상 한 회사에서 일했다. 적어도 이 분야에 대해 전혀 모르는 사람들에게 설명할 수 있을 정도의 경험은 갖고 있다. 내 일에 대해 책을 써보면 어떨까? 강의자료를 만들어 도서관이나 문화센터 프로그램에 도전해 보는 건?
일단 회사를 그만두지는 말아야겠다. 작가소개에 현직 타이틀이라도 한 줄 넣으려면 미우나 고우나 다니고 있는 편이 낫겠지. 이왕이면 업무도 더 다양하게 경험해 봐야겠다. 회사에서 지원하는 교육도 열심히 받아야지.
지금껏 회사가 빨대를 꽂는 쪽이었지만 이제부터는 반대다. 내가 회사에 빨대를 꽂고 마지막 한 방울까지 쪽쪽 빨아먹어야겠다.
문 닫는 김밥집이 늘고 있다고 한다. 충분히 이해가 된다. 최근 몇 년 새 오른 물가와 인건비가 얼만데, 일일이 손으로 만든 김밥을 3천 원에 팔아서 남는 게 있을까. 이미 사람들이 '싼 음식'으로 김밥을 인식하고 있으니 무턱대고 가격을 올리기도 어려운 사정이다.
이런 마당에 몇 해전부터 아주 당돌하고 대담한 김밥이 나타났다. 키토김밥. 김밥은 이래야만 한다는 모든 고정관념들이 자기랑은 상관없다는 듯, 밥을 몰아낸 자리를 계란으로 채우고 가격도 기존 김밥의 2배를 훌쩍 넘는다.
김밥 한 줄에 3천 원도 비싸다던 사람들이 8천 원을 내고 키토김밥을 사 먹는다.
밥이 기본으로 들어가야 하고 가격은 저렴해야 한다는 김밥에 부여된 한계처럼, 내가 스스로 정해둔 내 한계는 무엇이었을까. 잘 되면 임원, 못 되면 만년 차장. 딱 이 정도였던 것 같다. 내가 스스로 정한 내 몸값은. 그러다 삐끗해서 밖으로 튕겨져 나오면 정말 아무것도 아니게 되는 직장인.
김밥도 해내는데 나라고 못 할 게 있을까. 회사를 이용하는 직장인으로 거듭나면서, 몸값도 김차장이기만 할 때와는 완전히 다른 차원으로 점프업했으면 좋겠다.
두근두근. 이런 상상을 할 때가 제일 즐겁다.
참, 뒤늦게 고백하자면 결국 후배 말대로 라면도 같이 먹고 말았다. 김밥은 그냥 먹어도 맛있지만 떡볶이 소스나 라면 국물에 적셔먹을 때 또 그 맛이 일품이다.
그래도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건 오늘의 메인은 '김밥'. 라면은 그저 거들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