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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좋은 것만 먹고살 수 있나요

직장인 점심시간 사용설명서

by 귤예지

"뭐 먹을까요?"

점심메뉴를 묻는 내 말에 J가 멀뚱멀뚱 뜸을 들이고 있다.

"골라봐요. 1번 분식, 2번 베이글, 3번 샌드위..."

"1번으로 가시죠."

분식으로 뭉뚱그려 말했지만 내가 진짜로 먹고 싶은 건 떡볶이다. 탄수화물에 나트륨 범벅인 칼로리 폭탄의 대표주자. 딱히 몸에 좋을 게 없는 음식이라고 하지만 어떻게 몸에 좋은 것만 먹고살 수 있나. 떡볶이는 평소에도 내 소울푸드이지만, 오늘은 유난히 더 당기는 날이다. 쫄깃한 떡을 잘근잘근 씹으며 화끈한 매운맛의 힘을 빌어 열 좀 내야겠다.


"기억나죠? 매번 이런 식으로 밀어붙였던 거."

"그럼죠. 알죠. 여전히 그래요?"

"더 심해졌어요. 지난주 금요일에는 오후 5시에 전화가 와서 퇴근 전까지 명단을 달라는 거예요."

"금요일 5시는 좀 심했다. 근데 무슨 명단을요?"

"회의 참석자 명단이요. A회의체."

"헐. 그 회의체 아직 담당하세요? 그래서, 명단은 주셨어요?"

"줄려고 했죠. 근데 참석기관이 스무 군데가 넘어요. 담당자들이 다 자리에 있겠어요? 출장 간 사람도 있고 휴가 간 사람도 있고 연락이 바로 안 되죠. 연락이 되더라도 회사마다 내부보고체계가 있는데 참석여부를 점심약속 잡듯 뚝딱 알려줄 수 있겠냐고요. 결국 월요일 오전에야 넘겨줬죠."

"여전하네요."

"여전해요."


오늘의 점심메이트 J. 작년 상반기까지 내 옆자리에서 일하던 후배다. 업무는 달랐지만 둘 중 하나가 바쁘거나 자리를 비운 날에는 나머지 하나가 그 빈자리를 메워야 했고, 누구랑 무슨 얘기를 하는지 바로 옆에서 종일 듣고 있었으니 서로의 업무에 대해 빠삭했다. 단지 업무의 내용만이 아니라 업무스타일, 나아가 업무 스트레스의 발원지까지도.

내 업무 스트레스의 발원지는 주 고객사의 실무자인 '갑'님이다. 주로 업무와 관련된 자료를 뽑아달라거나, 구상하는 프로젝트의 세부 내용을 만들어달라거나, 어떤 조건에 부합하는 회사를 찾아달라는 요구를 해오는 편이다. 문제는 이런 일이 예고 없이, 급박하게, 매우 짧은 기한을 두고 던져진다는 거다.

주간, 일간, 시간대별 계획을 세우며 일하는 대문자 J(판단형, judging) 성향의 나로서는 '오늘 퇴근 전까지'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신경이 곤두선다. '갑'님의 요구사항은 대체로 혼자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닌 탓에 나 또한 타 부서, 타 기관에 '오늘 퇴근 전까지'를 시전해야 하는 경우에는 스트레스가 극에 치닫는다. 무례한 사람이 되기는 싫으면서도 "'갑'님이 시켜서요..."라기엔 또 자존심이 상한다.


이번 경우도 그랬다. 내가 '갑'님에게 하고 싶은 욕지거리를 나의 이해관계자들로부터 스펀지처럼 흡수했더니, 억울하고 분했다.

그렇다고 '갑'님에게 대놓고 따질 수는 없는 노릇. '갑'님은 말 그대로 '갑'이고, 그 또한 그의 '갑'에게 적잖이 시달리고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그도 내 앞에서나 '갑'이지 자기가 속한 조직에서는 나 못지않게 의사결정권이 없는 일개 실무자일 뿐. 그에게 따지고 들어봤자 얻을 게 없다는 걸 알고 있다.

그렇다고 집에 가서 남편에게 털어놓자니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설명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아무리 남편이라도 본인과 상관없는 남의 업무 사정이 관심 있게 들릴 리도 없다.

J와 모처럼의 점심식사가 달가웠던 건 바로 그래서였다. 그는 내가 이런 종류의 스트레스에 취약하다는 걸 바로 옆에서 지켜봤기에 잘 알고, 무엇보다 같은 스트레스를 경험한 사람이니까.


"저 거기 있을 때, 회의 좀 도와달래서 참석자들 소집하고 결재까지 다 받아뒀는데 당일 아침에 취소된 적도 있었잖아요. 기차 타러 가는 길에 연락받고 진짜 황당했어요 그때."

J가 아직도 당시의 분함이 남아있는 듯 흥분한 어조로 말했다. 역시 J라면 공감할 줄 알았지.

"그런다니까요? 자기들 시간만 귀한 줄 알지 우리 시간은 아주 개똥으로 알아."

"맞아요. 그리고 왜 매번 우리더러 오라고 ? 자기들 용건이면 자기들이 와야지."

"내 말이요. 자기들은 뭐 발이 없나 손이 없나."

발도 손도 있지만 시간이 없는 걸 테지. 지난밤에도 나의 '갑'님이 늦게까지 일했다는 걸 밤 11시에 보낸 메일을 보고 알았지만, 그런 얘기는 입밖에 내지 않았다. 회의가 갑자기 취소된 것도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지만 굳이 할 필요가 없는 얘기다. 오늘은 분풀이에만 집중!


열심히 씹다 보니 마침내 떡볶이 접시가 바닥을 드러냈다. 남은 떡볶이 소스까지 순대와 튀김을 쓱쓱 묻혀 먹었더니 속이 다 풀린 듯하다. 남의 '갑'들에 비하면 우리 '갑'은 그래도 양반인데 너무 씹어댔나 싶어 미안하고 안쓰러운 마음이 슬그머니 든다.

오랜만에 만난 후배 앞에서 부정적인 얘기에 너무 열을 냈나 싶다. 사람이 입 밖으로 꺼내는 말이 곧 그 사람의 인격이라는데, 오늘 나는 뒤에서 불평하고 없는 사람 험담이나 하는 멋없는 선배가 된 것 같다.

근데 좋은 말을 하면 진짜 좋은 사람이 되긴 하나? 분노가 속에 쌓여서 곪아터지는 건 아니고?

가끔은 이렇게 꺼내줘야지. 몸에 좋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떡볶이를 끊을 수는 없는 것처럼, 가끔은 험담도 하고 불평도 해야지.

직장생활에 이런 맛이라도 있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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