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시간을 10분쯤 앞두고 동기가 사내 메신저로 말을 걸어왔다.
- 점약 있어?
있다고 해야 할까, 없다고 해야 할까. 나 자신과의 약속도 약속으로 친다면 있고, 그게 아니면 없는데.
주저하는 사이 두 번째 메시지가 왔다.
- 없으면 같이 먹을래?
이 언니는 오늘 왜 이렇게 공손하고 난리야. 나는 덩달아 공손하게 대답했다.
- 같이 먹어요. 단, 조건이 있음!
밥 같이 먹는데 조건은 무슨 조건? 언니가 송곳니를 드러내며 타박할지도 모르지만 어쩔 수 없다. 나의 야심 찬 점뭐하* 프로젝트를 포기할 순 없으니까.
* ‘점심에 뭐 하지?’의 줄임말이다. 점뭐먹의 패러디.
나의, 이제 우리의 점뭐하 프로젝트를 위해 점심은 간단히 먹었다. 오늘의 목적지는 회사 옆 롯데몰. 엘리베이터를 타고 5층에 도착하자마자 언니가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뭔가를 꺼낸다. 천 원짜리 두장이다.
“뭐야, 이 언니. 돈까지 준비해 왔어.”
언니가 민망한 듯 웃는다. 이 정도면 언니도 억지로 내게 끌려 여기까지 온 건 아니라는 거지. 혹시나 언니에게 부담을 준 걸까 염려하던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천 원짜리 두 장을 잘 펴서 투입구에 집어넣었다. 각자 정해진 위치에 자리를 잡고 두 발로 섰다. 경쾌한 기계음과 함께 화면이 밝아졌다.
같이 점심을 먹는 대신 내건 조건, 오늘자 우리의 점뭐하 프로젝트는 바로 ‘펌프’다. 사무실 책상에 앉아있는 동안 뻣뻣해진 몸과 마음을 풀어줄 펌프.
고백하자면 나는 오락실을 꽤 좋아한다. 엄마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우리 엄마는 내가 중학생이던 무렵부터 자기도 모르는 사이 동네의 영세한 오락실 사장님들께 매달 적잖은 규모의 경제적 지원을 해드리고 있었다.
어릴 때는 농구, 테트리스, 비행기게임 등 여러 분야를 섭렵했지만 요즘은 펌프가 제일 재밌다. (실은 펌프 못지않게 동전노래방도 좋아하는데, 회사 앞 오락실은 마이크가 좀 별로다.)
친구들 사이에서 몸치로 통하는 나이지만, 펌프는 곡마다 후렴구처럼 자주 등장하는 리듬이 있어 여러 번 반복하다 보면 어느새 몸에 익는다. 한번 몸에 익히고 나면 흥이 나고, 덩달아 스코어가 쑥쑥 오르기 시작하고, 내가 몸치를 탈출한 것만 같은 착각까지 든다.
화살표와 내 발이 가리키는 방향이 일치할 때마다 화면에 떠오르는 건 ‘perfect’.
조금 빠르거나 늦어도 ‘great’.
이번엔 놓쳤구나 싶을 때조차 ‘good’.
펌프는 관대하다. 물론 ‘bad’나 ‘miss’가 나올 때도 있지만 직장이나 사회에서 받는 평가표에 익숙한 내게 그쯤이야. 그래도 너무 가혹하다 싶은 날에는 난이도를 낮추면 그만이다.
첫 곡은 워너원의 ‘나야 나’로 정했다.
언니가 내 뛰어난 펌프실력에 의기소침해질까 봐 평소보다 난이도를 낮췄다. 불필요한 배려였다. 언니는 다음 곡에서 난이도를 한 단계 올리더니, 마지막 판에는 두 단계를 높였다.
내가 잊고 있었던 한 가지, 이 언니는 힙합댄스동호회 활동이력을 보유한 이른바 이 계통의 전문가였던 거다. 무대를 날아다니며 힙합을 추던 언니에게 1평 남짓한 발판쯤이야. 심지어 언니는 자세도 훌륭하다. 화살표를 놓칠세라 허겁지겁 발망치를 꾹꾹 찍기 바쁜 나와 달리 언니는 여유롭다. 단단하게 중심을 잡은 상체는 거의 움직임이 없고 두 발만 리듬에 맞춰 발판 위를 날아다녔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오락실은 내게 기쁨을 주는 장소이지만, 달라진 게 있다면 같이 갈 친구들이 많지 않다는 점이다. 혼자서 펌프를 하고 있으면 뒤에서 쳐다보는 시선이 은근히 신경 쓰인다. 교복 입은 학생들이 뒤에서 서성대면 순서를 기다리나 싶어 아직 남은 기회가 있는데도 급히 가봐야 할 데가 있는 척 내려올 때도 있다.
근데 오늘은 혼자가 아니다. 같이 노는 게 이렇게 즐거운 거였나.
“우리 다음에 이거 또 하자.”
두 아이를 키우는 언니가, 아이들보다 더 신난 얼굴로 말한다.
“재밌죠? 언니는 좋아할 줄 알았어.”
이어지는 언니의 수줍은 고백.
“실은 지난 명절에 가족들이랑 극장에 갔는데, 거기도 펌프가 있었거든. 너무 해보고 싶었는데 못했어.”
“이참에 우리 동호회 하나 만들까요? 펌프동호회?”
못 들었는지 못 들은 척하는 건지 언니는 대답이 없다. 내 제안이 좀 과했나?
영하의 날씨. 음지에는 며칠 전 내린 눈이 아직 꽁꽁 얼어있는데, 우리 둘은 외투를 팔에 걸치고 있다.
“그나저나 언니, 우리 좀 뛰어야 할 듯?”
“또?”
언니에게 시간을 쓱 보여줬다. 점심시간 종료 5분 전.
가뿐해진 아줌마 둘이서 달린다. 우리를 기다리는 회사, 오후, Next Stage를 향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