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근무를 마친 동료들이 하나 둘 자리를 뜬다. 몇몇은 구내식당으로, 또 몇몇은 무리를 지어 회사 밖으로 나가는 시간. 나도 그들과 함께 엘리베이터를 탔다. 내 목적지는 건물 1층에 위치한 회의실이다.
회사 주변에 널린 게 카페지만 야무지게 쓰기로 작정한 점심시간을 오가는 길에 낭비하고 싶진 않았다. 사무실을 점심시간 전용 아지트로 써볼까 생각한 적도 있지만,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도 전화벨은 수시로 울렸고 그걸 모른 체 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찾은 곳이 바로 여기, 회의실이다.
점심으로는 컵라면과 요거트, 두유를 준비했다. 이 회의실은 독특하게 바로 문밖에 정수기와 개수대가 있다. 뜨거운 물을 받아 라면을 익히는 동안 유튜브에서 가볍게 볼 영상을 골랐다. 보통 10분에서 20분 길이의 영상을 고르는데, 이 시간이 컵라면 하나 먹고 후식까지 곁들이기에 적당하기 때문이다.
영상을 다 본 후 빈 컵라면 용기를 치우고 나면 점심시간이 35분가량 남는다. 알고리즘이 추천하는 다음 영상을 보고 싶기도 하고, 무심결에 누른 카톡에서 새로 업데이트된 친구들의 프로필을 눌러 근황을 엿보고 싶기도 하다.
이 모든 본능을 누르고 책을 펼친 데는, 요즘 읽는 이 책도 적잖은 역할을 했지 싶다.
도둑맞은 집중력.
현대인이 경험하는 집중력 부족 현상이 개인의 게으름이나 자제력 부족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속한 시스템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책이다.
저자는 집중력을 앗아가는 12가지 문제를 제시하는데, 그중 하나가 테크기업들의 영업방식, 그들이 우리의 시간을 지배하는 방식이다. 구글, 페이스북, 유튜브와 같은 거대 테크기업의 목표는 우리의 주의를 빼앗는 것, 곧 우리가 휴대폰을 더 많이 보게 만드는 것. 우리가 뭘 궁금해하고 어떤 소재에 쉽게 반응하는지를 이미 아는 테크기업들은 알림의 빈도를 늘리고 시선이 끝나는 지점마다 미끼처럼 우리가 관심 있을 법한 콘텐츠를 연이어 던져두는 방식으로 우리의 시간을 잡아둔다고 한다.
이 대목에서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 들었는데, 바로 그 이유로 나는 이 책을 무려 1년여간 붙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 이 책을 펼친 날에는 아마도 저자의 이력에 대해 검색하려다 무심결에 포털에 뜬 기사 제목을 눌렀을 테고, 기사를 읽다가 본문에 떠오른 관심 있던 광고까지 연쇄적으로 클릭하는 바람에 책 읽기가 중단되었을 테고, 이후에도 몇 차례 펼쳤지만 비슷한 이유로 읽지 못하고 방치되었던 걸 이번에는 끝까지 읽어보자 마음먹고 챙겨 온 게 바로 오늘이었다.
책에 등장한 사례들이 내 상황과 정확히 맞아떨어지면서 '일'과 '육아'로 바빠 책 한 권 읽을 시간이 없다는 건 핑계가 아니었는지 스스로를 의심했다. 바쁘다면서도 요즘 인기 있는 드라마 줄거리는 다 꿰고 있고(심지어 시청한 적이 없는 드라마마저도!) 사내 익명게시판에 올라온 핫이슈들은 놓치지 않는 걸 보면, 나는 내가 주도적으로 쓸 수 없는 시간을 방패 삼아 주도적으로 쓸 수 있는 시간에 대한 주도권조차 놓고 있던 게 아니었을까. 누군가 던져주는 미끼를 주저 없이 물면서 내 시간을 침범하도록 내버려 둔 건 아니었는지.
이런 사실을 깨닫자 점심시간이라도 사수해야겠다는 다짐이 더욱 견고해져서, 책을 읽다 말고 휴대폰을 열었다. 어플마다 설정된 알림을 끄고, 카톡과 문자메시지에서 자동으로 설정된 팝업도 닫고, 그러다 또 무심결에 새로 온 메시지를 확인하고.... 윽, 또 당할 뻔했다. 거대 테크기업은 말 그대로 거대하니 그들로부터 집중력을 사수하려면 더 의식적으로 노력해야겠다.
점심시간은 내가 주도권을 가지기로 마음먹은 시간. 얼떨결에 사람들에게 휩쓸려 밖으로 나가지 않고, 스마트폰에 주의를 빼앗기지도 않고, 마지막까지 책을 읽었다는 사실에 뿌듯해진다. 성공적인 아침을 보내면 하루가 즐겁듯 만족스러운 점심시간을 보냈으니 오후 근무도 거뜬하리.
사무실로 돌아가는 길, 부서 후배와 마주쳤다.
"점심 드셨어요? 들고 계신 건 무슨 책이에요?"
"아, 이거?"
표지를 슬쩍 보여주면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후배도 웃었다.
"프하하."
"프하하하."
웃음이 터져 나온 이유는 아마도 작년 이맘때 후배가 내 자리에 놓인 이 책을 보고 했던 말 때문이리라.
"이 책은 끝까지 읽는 사람이 없을 것 같아요. 집중력이 부족한 사람들이 고르는 책일 테니 집중력 부족으로 다 못 읽지 않을까요?"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1년이 지난 지금까지 같은 책을 들고 있으니, 웃음이 나올 수밖에.
후배야, 지금까지는 네 말이 옳았을지 몰라. 하지만 앞으로는 틀릴 것 같구나.
내가 도둑맞은 집중력을 되찾을 예정이거든.
p.s. 연재브런치북에 담기 위해 글을 재발행합니다. 먼저 읽어주셨던 분들의 너른 양해 부탁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