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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나 공평한 점심시간

by 귤예지 Mar 09. 2025

나는 하고 싶은 게 많다. 버킷리스트를 쓰라면 머릿속에 바로 떠오르는 것만으로도 A4 한 장은 거뜬히 채울 수 있을 정도. 미혼일 때의 나는 퇴근 후 소설을 쓰거나 동호회를 찾아 갖은 취미를 수집했고, 주말이면 종일 서점이나 카페 한 구석에 죽치고 앉아 책을 읽다가 저녁 무렵 분식점에 들러 떡볶이 1인분을 포장해오곤 했다. 떡볶이를 앞에 두고 좋아하는 드라마를 보며 맥주 한 캔! 

캬~ 그립다. 엄마도 아내도 아닌 오롯한 나로 살던 시절.


하고 싶은 게 많다는 점에서는 그때나 지금이나 같다. 달라진 게 있다면 시간을 보내는 방식. 유년기 아이 둘을 키우는 워킹맘인 내게 시간은 이제 공공재에 가까운 개념이 되었다.


먼저 아침.

거실에 나오는 순간부터 시선이 닿는 곳마다 해야 할 일이 있다. 노트북이 아니라 냉장고를 열어야 할 것 같고 책이 아니라 청소기를 들어야 할 것 같다. 그릇이 쌓인 개수대, 과자부스러기가 밟히는 바닥, 어질러진 장난감을 애써 외면하고 노트북을 열어도 끝이 아니다. 엄마의 빈자리를 눈치챈 아이가 잠 깨어 에엥~ 울기라도 하면 취미고 뭐고 다 끝이다. (바로 오늘 아침에도 그랬다.)

그러니까 아침은, 하루 중 가장 탐이 나지만 결코 온전한 내 것이 될 수는 없는 시간이다.


저녁역시나 만만치 않다.

우리 부부는 지역 택시기사님들 사이에서 '등대'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늦게까지 불이 꺼지지 않는 회사에 다닌다. 남편과 나는 요일을 나누어 번갈아 야근하고 일찍 퇴근하는 사람이 그날의 육아를 맡는다.

어린이집에서 나름의 사회생활로 잔뜩 예민해진 두 아이를 데려와 간식을 먹인 후, 목욕, 양치, 투약, 책 읽어주기까지... 엉덩이 붙일 틈이 없다는 건 비유적인 표현이 아님을 비로소 깨닫는 시간이다. 잠자리에 누워서도 쉬이 잠들지 못하는 둘째를 재우고 나서야 비로소 하루 일과가 끝이다.

밤 10시를 훌쩍 넘긴 시간. 생산적인 활동을 시작하기에는 늦은 시간이고, 더 솔직히 말하자면 피곤하다. 누운 채로 쉬고 싶다. 하루종일 고생했으니까.


결국 '미라클모닝'도 '저녁이 있는 삶'도 다 남의 얘기. 

내가 선택한 삶이고 다들 비슷하게 사는 걸 알지만 억울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두 아이의 엄마, 회사의 일원이 아니라 나로 사는 시간이 필요하다. 해야 하는 일이 아니라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시간.

적어도 하루 1시간은 나를 위해 쓰고 싶다. 24시간 중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1시간이라도!


그렇다면 점심시간은 어떨까.

아이들이 어린이집에 있는 시간.

밀린 빨래를 할 수도, 청소기를 돌릴 수도 없는 시간.

내게 일을 줄 사람도 내 일을 도울 사람도 모두 밥을 먹고 있을 시간.

누구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고 해내야 할 과업도 없는, 

모든 역할들로부터 해방되는 시간. 

미혼에게도 기혼에게도 대리에게도 사장에게도,

누구에게나 공평한 점심시간. 


하루 1시간.

(휴일을 제외하면) 한 달 20시간.

16부작 드라마를 볼 수 있는 시간이고,

영화를 10편 볼 수 있는 시간이며,

책 4~5권을 읽을 수 있는 시간이다.

쇼핑을 하거나 오락실에 갈 수도,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쓸 수도,

살을 빼거나, 반대로 찌울 수도 있는 시간이다.

이 어마어마한 시간에 배만 채우는 게 아니라 욕심까지 채우기로 했다.

의미없이 흘려보내던 점심시간에 의미를 부여하고, 이 시간들을 기록하기로 마음먹었다.


내일 점심에는 뭘 할까? 

점심시간, 어디까지 할 수 있을까?





p.s. 연재브런치북에 담기 위해 글을 재발행합니다. 먼저 읽어주셨던 분들의 너른 양해 부탁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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