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 점심시간 사용설명서
내내 모니터만 보다가 점심이 되면 누구와든 마주 앉아 수다를 떨고 싶어질 때도 있다. 그 충동을 눌러야 한다. 딱 5분만 참으면 저절로 해결된다. 동료들은 저마다의 런치메이트를 만나러 바삐 자리를 뜰 거고 식사가 이미 시작된 후에는 내가 끼어들래도 끼어들 자리가 없을 테니까.
외로울 걱정일랑 말자.
혼자 있어도 혼자가 아니게 되는 방법이 있다.
그게 뭐냐면, 바로 책.
오늘은 새 책을 펼쳤다. 언젠가 대학 동기가 어렵게 구했다며 대용량 스캔본으로 보내준 책이다. 다음에 읽어야지 메일함에 방치해 뒀다가 결국 다운로드 기간이 만료되어 버린 바로 그 책.
재작년 어느 날에는 서점 베스트셀러 상단에 있길래 좀 유명한 책인가 보다, 하고 집었다가 700쪽이 넘는 두께에 지레 겁을 먹고 내려놓았다. 책 한 권을 잡으면 두 달은 족히 걸리던 시기였다.
당시 내 여가시간이 최저시급 알바비 정도였다면 지금은 적어도 사회초년생 월급 정도는 된다. 어영부영 낭비하던 점심시간을 야무지게 쓰기로 마음먹자 달라진 변화다. 내일도 모레도 1시간씩, 마음만 먹으면 일주일에 5시간은 책을 읽을 수 있다고 전제하면 두꺼운 책도 주저 않고 고를 수 있다.
이 책의 작가는 우리 엄마와 같은 55년생이시다. 순자산은 무려 천억 원대.
2023년에 나온 책이지만 원고는 훨씬 전인 2000년 초부터 쓰였다고 한다. 작가가 인터넷에 쓴 기고문과 칼럼을 독자들이 모아 공유하기 시작했고, 출판사들이 책으로 펴내기를 원했고, 어느 출력소에서 제본판으로 유통하다가, 마침내 2023년 한 작은 출판사가 정식으로 출판했다.
정가는 7,200원. 인쇄비나 물류비를 운운하지 않더라도 이미 말도 안 되는 가격이다. 작가든 출판사든 이 책으로 돈을 벌 의도가 조금도 없는 게 분명하다. 실제로 작가는 책의 판매에 따른 어떤 대가도 받고 있지 않다고 한다. 그야말로 chill guy. 억 소리 나는 인세 따위 신경 쓰지 않아도 될 만큼 여유롭고 배짱 있는 분임이 틀림없다.
나는 책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조금은 안다. 한 권의 책이 나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과 정성이 투입되는지도. 자기 이름으로 된 책을 세상에 내놓기 위해 많은 작가들이 자기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고 가치 있는 것들을 모아 거르고 또 거른다.
바닥에서 시작한 작가는 어떻게 천억 원대의 자산가가 되었을까? 어떤 경험이 그를 지금의 chill guy로 만들었을까? 그 비밀이 한 권의 책에 들어있다면 안 읽을 이유가 없지.
오늘은 이렇듯 특별한 분과 점심을 함께 보내기로 했다.
어떤 사람은 마주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오래 안 사람처럼 마음이 편안해진다. 반면 아무리 똑똑해도 대안 없는 불만으로 가득한 사람과는 긴 대화를 나누고 싶지 않다. 책도 그렇다. 책에는 작가의 말투와 생각, 가치관이 그대로 드러난다. 한두 장만 넘기면 나랑 맞는 사람인지 아닌지, 나랑 맞는 책인지 아닌지 안다.
이 책의 작가는 그다지 다정한 분은 아니다. 거침없이 꾸짖고 아픈 데를 꼬집는다. 이 책의 리뷰를 찾아보니 바로 그 점 때문에 읽기 힘들었다는 독자도 있는데, 나는 사실 반가웠다. 옳은 얘기를 해주는 사람이 주변에는 드물기 때문이다. 설령 내 잘못이 크더라도 일단 앞에서는 편들어주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고맙고 위로가 되지만 그게 전부다. 그런 이유로 나는 힐링 에세이를 썩 좋아하지 않는다. 누구에게나 통하는 보편적인 위로가 무책임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
그런 점에서 이제는 우리 엄마도 해주지 않는 호된 야단과 질타가 기분 나쁘지 않았다.
문제가 있으면 문제를 해결하려고 덤벼드는 것이 올바른 태도이다. 문제는 그대로 남겨 둔 채 그 문제로 인하여 생긴 스트레스만을 풀어 버리려고 한다면 원인은 여전히 남아 있는 셈 아닌가. 휴식을 충분히 갖고 쉬라고? 웃으라고? 한 달을 바닷가 해변에서 뒹굴어 보아라. 백날을 하하 호호 웃어 보아라. 문제가 해결되는가? 웃기는 소리들 그만해라. (p.40)
그래도 당신은 여전히 육체의 건강을 우선으로 친다고? 아무도 안 말린다. 그러나 그 튼튼한 몸이 도대체 왜 필요한지, 그 육신의 존재 이유를 한 번쯤 생각하여 보면 어떨까? 그저 오래 살기 위해서? (p.67)
사업을 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겪어 본 경험에 의하면 가장 골치 아픈 직원은 자기 기준으로 일하는 사람이다. 이들은 자기 나름대로는 최선을 다하였다고 생각한다. (p.142)
제목은 <세이노의 가르침>, 작가는 '세이노'라는 분이다. 뼈 때리는 조언이 필요하신 분들은 읽어보시길!
나누고 나눠도 내 몫은 줄어들지 않는 것이 책이 가진 또 하나의 매력 아닐까. 피부관리숍처럼 찾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가격이 올라가거나 내 몫이 줄어드는 게 아니니 마음 놓고 일독을 권한다.
나는 책에서 영향을 많이 받는 편이다. 책 덕분에 없던 습관이 생기거나 생각이 달라지기도 한다. 어떤 식으로든 긍정적인 변화가 생겼을 때, 나는 그 책을 쓴 작가가 인생의 멘토처럼 여겨진다.
<돈의 속성>을 쓴 김승호 작가님, <어린이라는 세계>를 쓴 김소영 작가님, <나의 하루는 4시 30분에 시작된다>를 쓴 김유진 작가님. 어린이와 시간과 돈을 대하는 태도에 변화를 가져다준 멘토들이다.
오늘 멘토가 한 분 늘었다. 칼로리 충전하며 수다 떨고 싶은 마음에게 'Say No!' 하길 잘했다!
고백하자면 나는 1:1 만남에 약한 편이다. 나와 1:1로 밥을 먹는 사람들조차도 잘 모르는 약점이다. 그들이 눈치챌 수 없을 만큼 내가 말을 많이 하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이야기까지 서슴없이 꺼내는 나를 사람들은 'E(외향적)'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I(내향적)'에 더 가깝다. 1:1 만남에서 수다스러운 건 단지 정적을 견디기가 힘들어서다. 쓸데없는 얘기를 마구 떠들고서 뒤늦게 후회할 때도 더러 있다.
'I'에게 사람을 만나는 건 상대방에 대한 호감과 관계없이 '에너지를 쓰는 일'이다. 반면 책 읽기에는 딱히 에너지가 소모될 일이 없다. 일일이 대꾸를 하지 않아도 된다. 싫은 표정을 숨기지 않아도 된다. 영 내키지 않으면 책장을 덮어버리면 그만이다.
무엇보다 책을 통해서는 내가 쉽게 만날 수 없는 사람을 만날 수 있다.
나의 특별한 런치메이트. 다음 페이지에서는 또 얼마나 호되게 야단을 맞을까? 풉, 작가님이 의도한 바는 아닐지 몰라도 나는 내일 점심에 받을 질타가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