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 점심시간 사용설명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사무실 붙박이 K-직장인.
오늘은 사무실을 공식적으로 벗어날 수 있는 날이다. 반복적인 루틴에서 멀어지는 날이기도 하다.
바로, 출장 가는 날.
출장을 갈 때는 대중교통을 애용한다. 근무지로부터 거리가 멀수록 더 집요하게 대중교통을 고집한다.
도로 위에 흘려보내는 이동시간이, KTX 요금보다 값진 '보너스 타임'이 되니까!
이 보너스 타임을 잘 쓰고 싶어서 이동 중 할 일을 스마트폰 달력에다 미리 리스트업 해뒀다.
독서, 세이노의 가르침 2
영화, 하얼빈 2
블로그, 근황 게시물 1편, 0.5
건강검진, 미용실 예약 0.5
회의준비 1
왕복 6시간 출장길의 to do 리스트 준비완료!
이 리스트와 함께 할 커피와 빵도 집에서 미리 챙겼다. 남편이 놀러 가냐며 놀릴까 봐 들뜬 마음을 꽁꽁 숨겨보지만 사무실로 향할 때보다 발걸음이 가벼운 건 어쩔 수 없다.
자, 이제 기차에 올라탔으니 뭐부터 할까.
리스트는 내가 하고 싶은 일 순으로 정리되어 있지만 아무래도 마지막 목록부터 해치워야 하지 싶다. 제일 맛없는 걸 먼저 먹어야 맛있는 게 마지막까지 남는 법이니까.
가방에서 회의자료를 꺼냈다. 오늘 회의 참석자 중에는 처음 만나는 연구원님들도 계시다. 공적이든 사적이든 첫 만남에는 언제나 긴장감이 따른다. 논의할 안건별로 미리 정리해 온 자료를 찬찬히 읽어본다. 마지막은 눈 감고 회의 시뮬레이션. 입술을 달싹이며 중얼중얼 중얼중얼.
아, 옆자리 승객님... 저 그렇게 이상한 사람은 아니에요.
회의준비에 할당된 시간을 초과해 버렸다. 목적지 도착까지 40분이 채 남지 않은 걸 보고 부랴부랴 건강검진 어플을 열었다. 오늘 기필코 해야 하는 중요한 과업을 수행하기 위해서.
매년 양가 부모님 건강검진을 해드리기로 했는데, 작년에는 (우리는) 바쁘고 (부모님은) 귀찮다는 핑계로 패스해 버렸다. 올해도 귀찮다는 부모님을 다그쳐 겨우 검진받기를 결정하고서는 몇 주째 예약을 못했다. 변명하자면 근무시간과 병원 영업시간이 같아서, 점심시간엔 병원도 점심시간이라서, 좀처럼 예약할 시간이 나질 않았다. 변명이 맞다. 어플에 접속해 보니 영업시간은 검진예약과 전혀 관계가 없었다.
그나저나 수십여 개의 검진항목 중에서 뭘 받을지 고르는 게 보통일이 아니다. 엄마는 치매검사를 받고 싶다셨는데 뇌 검사도 MRI, MRA, CT까지 뭐 이리 많은지. 몇 해 전 대장암 수술을 받은 아빠를 생각하면 머리가 더 복잡하다. 마음 같아선 전신을 스캔해보고 싶은데 아쉽게도 '전신 스캔' 항목은 없다. 폐 CT를 눌렀다가 상복부 초음파를 눌렀다가 갈팡질팡하는 사이, 결국 목적지에 도착해 버렸다.
보란 듯이 테이블에 올려둔 책은 아예 펼쳐보지도 못했다. 큭, 꿈도 야무졌지.
모든 참석자들이 너무 열심히 준비해 온 덕에 회의는 계획보다 한 시간 이상 길어졌다. 이럴 줄 알고 돌아가는 열차시간을 여유 있게 잡아두었다.
누구라도 '점심이나 같이 먹을까요?' 했다면 못 이기는 척 함께 식당으로 향하는 분위기가 되었겠지만 다행히 오늘 참석자들은 센스가 있는 분들이었다. 이 멤버가 함께 점심을 먹으러 가는 순간 식사시간은 곧 회의의 연장이고 식당은 곧 두 번째 회의실이 되고 말리라는 걸 다들 아는 거다. 일 때문에 만난 사이에 일 말고 또 무슨 말을 한단 말인가. 어깨가 좀 구부정하신데 아는 한의원 소개해드릴까요? 뭐 이런 얘기를 할 순 없으니까.
드디어 점심시간.
회사 안에서도 즐겁지만 밖에서는 더 즐거운 점.심.시.간!
모처럼 출장이 잡히면 미리 주변 맛집을 검색해 보곤 하는데, 최종적으로 고르는 건 언제나 가까운 식당이다. 오늘은 역사 내에 있는 푸드코트에서 떡볶이를 주문했다. 세상에 재미없는 드라마도 없고, 맛없는 떡볶이도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바로 나. 푸드코트 떡볶이도 충분히 맛있는데 굳이 멀리까지 왜 가요? 시간 아깝게.
푸드코트나 휴게소 떡볶이는 오로지 떡만 든 경우도 많은데 여기는 어묵도 푸짐하고 간간이 파도 들어있다. 떡이나 어묵 중 하나만 골라먹지 않기. 적절한 빈도로 두 가지를 골고루 먹어야 마지막까지 맛있게 먹을 수 있다.
1인용 탁자에 앉아 떡볶이 먹으며 유튜브 한편. 캬~! 이 맛에 출장 다니지.
돌아오는 기차에서는 책을 읽었다. 3시간 내내 펼쳐두긴 했는데 막상 읽은 페이지가 얼마 안 된다. 업무메일에 답장을 썼다가, 후배랑 카톡도 주고받다가, 우리 부서로 발령받은 직원이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누군지 검색까지 하느라 시간이 숭숭 새어버렸다.
아직 영화랑 블로그는 시작도 못했는데, KTX는 왜 이렇게 빠르고 난릴까.
평소보다 일찍 나와 평소보다 늦게 귀가하는 출장일. 회사에서 일이 많아 밤늦게 퇴근할 때는 내 시간을 회사에 빼앗긴 것 같아 억울한데, 출장 가는 날은 그보다 늦은 귀가에도 기분이 썩 나쁘지 않다. 이게 다 오가며 쓰는 보너스 타임 덕분이지.
부모가 되고부터 남들은 이틀에 걸쳐 떠나는 먼 지역도 새벽출발 새벽도착으로 당일치기 출장을 다니는 우리 부부. 이제 애들도 좀 컸는데 1박 2일 출장도 가능하지 않을까? 슬 욕심이 난다.
남편, 어디 출장 갈 일 없어? 한 번씩 번갈아 다녀오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