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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시간을 기록하는 이유

직장인 점심시간 사용설명서

by 귤예지

내겐 기록하는 습관이 있다.

첫째가 그린 그림은 한 장 한 장 사진으로 찍어 별도 폴더에 모아두었고, 둘째가 내뱉는 엉뚱한 말은 카카오톡 '나와의 채팅' 방에 저장해 뒀다가 이따금씩 블로그에 업로드한다.

문득 글로 쓰고 싶은 아이디어가 떠오를 때도 차곡차곡 기록한다. 이때 사용하는 매체는 '네이버킵'. 노트북과 스마트폰에서 쉽게 접속할 수 있고 뻗어가는 생각을 업데이트하기도 편해 애용한다.


'점심시간'에 대해 글을 쓰자 마음먹은 건 2023년 12월이었다. 한 해가 저물어가던 어느 점심시간, 선배와 마주 앉아 커피를 마시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릴 때를 떠올리면 소풍이나 체육대회처럼 기억에 남는 특별한 순간이 많은데, 어른이 되고는 하루하루가 너무 닮은 꼴이 되어버렸다는 생각. 육아도 열심히, 회사도 열심히, 나름 최선을 다하는데도 한 해가 저무는 시점에 돌아보니 손에 잡히는 게 너무 없었다.

그런 한탄을 주고받다가 불쑥 해보고 싶은 일이 떠올랐다.

"점심시간에 대해 글을 써볼까 봐요."

"점심시간?"

"네. 점심시간에 대해 글을 쓰면 적어도 이 시간만큼은 특별하게 보내지 않을까요? 글로 쓰려면 그만큼 글감이 필요하니까. 일부러라도 재밌는 일을 찾게 될 것 같아요."

"응. 근데 어떻게 특별하게 보내려고?"

"책도 보고, 좋아하는 사람도 만나고, 노래방도 가고?"

"풉, 노래방도 가고?"

"제목은 '누구에게나 공평한 점심시간' 어때요? 바쁜 워킹맘들도 점심시간은 공평하게 가지니까."

"오, 괜찮은데? 점심시간이 누구에게나 공평하다는 생각. 재밌다."


그게 시작이었다.

그러니까 점심시간을 기록하기로 마음먹은 건 점심시간이 글로 쓰고 싶을 만큼 너무 재밌어서가 아니라, 더 재밌게 보내고 싶어서였다.

그날 네이버킵에 적어둔 '누구에게나 공평한 점심시간'이라는 짧은 메모는 지난 1년 동안 수많은 가지를 쳤다. 이런 글도 쓰면 좋겠다, 이런 것도 소재가 되겠네. 떠오르는 대로 업데이트했다.


- 나의 점심루틴 : 혼밥과 독서
- 나만의 커피 제조법
- 떡볶이
- 혼자 출장 가는 날
- 집밥 먹는 날
- 노래방
- 내가 지출할 수 있는 밥값 한도

- MZ정산문화
- 연말취미결산
- 펌프
- 우리 모두의 교집합 차차차
- 병원 가는 날
- 나머지 공부 : 한자
- 배 안고플 땐 안 먹기


3월부터는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연재 글쓰기는 사실 큰 도전이었다. 매주 한 편의 글을 완성하는 것도 만만치 않지만 그보다 중요한 과제는 소재 발굴.

글을 쓰기 위해서라도 점심시간을 밀도 있게 보내야 했다.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하지 못했던 것들을 채워 넣기로 했다. 책을 읽고 드라마를 보고 오락실에도 갔다. 분위기에 휩쓸려 불편한 사람과 달갑지 않은 메뉴를 먹는 대신 진짜 내가 하고 싶은 방식을 의식적으로 채택했다. 그리고 그 시간을 글과 사진으로 기록한다.


한 주가 시작되는 월요일이면 지난주에 쓴 연재 글을 업로드하는 동시에 고민이 시작된다.

다음에는 또 무슨 글을 쓸까?

이번 주 점심시간은 어떻게 보낼까?


직장인의 점심시간. 주말을 제외하면 모두 5시간.

아주 특별한 일이 일어나서가 아니라, 글로 남기기 위해 더 특별하게 보내려고 노력한다.

이 시간에 더 집중하고, 이 시간이 가지는 의미에 몰두하게 된다.

이게 내가 점심시간을 기록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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