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 점심시간 사용설명서
몸무게가 급격히 늘어 특단의 조치 중이다. 이른바 20일 저녁 단식 실험.
저녁을 굶는 대신 점심이라도 제대로 챙겨 먹자 다짐하던 차에, 마침 사내 게시판에 재미난 공지가 떴다.
- 구내식당 한 식구 이벤트
: 5월 한 달 동안 10식 이용하고 상품권 받자!
한 달간 구내식당에서 10끼 이상 식사한 직원을 대상으로 추첨을 통해 5만 원 상당의 외식상품권을 준다는 내용이다. 작년부터 이런 류의 이벤트가 이따금 열리곤 했다. 도보 거리에 식당들이 많이 생기면서 구내식당 이용자가 크게 줄어든 탓이다. 뾰족한 유인책이 없으니 이벤트로 사람들의 발길을 잡아보려는 거다.
사실 나도 평소 구내식당을 잘 이용하지 않는다. 작년 한 해 동안 이용한 횟수가 한 손에 꼽힐 정도다.
이유는? 글쎄, 별로 맛이 없다. 우리 회사 구내식당이 특별히 맛이 없다는 뜻이 아니다. 고등학교 때도, 대학교 때도, 구내식당 밥은 늘 그렇고 그랬던 것 같다. 밖에서 파는 자극적인 맛에 길들여져서인지, 어딘지 모르게 미지근하고 밍밍한 맛이다.
맛이 없어도 이번 달은 열심히 이용해야겠다. 영양사님이 영양소를 골고루 갖춰 설계한 식단이니 하루 중 제대로 챙겨 먹는 끼니로 손색이 없을 것 같다. 게다가 열 끼를 먹고 5만 원 상당의 외식상품권을 받으면 한 끼를 1천 원에 먹는 셈인데, 이런 기회를 놓칠 순 없지.
당첨이 안 되면 어떡하냐고? 한 끼에 6천 원도 요즘 물가를 생각하면 나쁘지 않은 가격이다.
오늘 메뉴는 짜장밥.
밥을 두 주걱 가득 담고, 그 위에 짜장소스를 듬뿍 끼얹었다. 저녁을 굶을 예정이니 점심이라도 든든하게 먹어둬야지. 샐러드도 푸짐하게, 만둣국도 넉넉히. 받아놓고 보니 제법 먹음직스럽다.
빈자리가 없어 배식대 바로 앞에 앉았다. 식판을 들고 자리를 찾아 기웃대는 사람들과 자꾸 눈이 마주친다. 같은 건물에서 근무하지만 각자 정해진 자리에만 앉아있다 보니 좀처럼 만날 일이 없는 사람들.
오랜만이야, 별일 없지, 눈으로 입으로 걸어오는 인사마다 어떤 식으로든 대꾸해야 할 것 같아 귀찮기도 하고, 반갑기도 하고.
함께 온 동기언니는 구내식당파. 거의 매일 구내식당을 이용하는 몇 안 되는 직원 중 한 사람이다.
"일은 좀 어때요?"
"너무 많아. 어쩔 땐 정말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모를 정도로. 급하게 뭘 쓰고 있는데 또 다른 요청이 와. 지금 쓰는 것도 발등에 불인데 그건 내 사정이고 일단 빨리 달래."
"와, 언니! 그 마음 알 것 같다. 그럴 때 너무 막막하죠. 막 태풍처럼 몰아칠 때."
"막막하지. 캐파는 정해져 있는데 막 여기저기서 주문이 들어오니까. 어제는 진짜 얼마나 짜증이 났냐면,"
언니가 말을 하다 말고 주위를 쓱 보더니 목소리를 낮췄다.
"안 되겠다. 이따 나가서 얘기하자."
그래, 여기 회사였지. 뒷자리에는 우리 팀장님, 그 옆에는 옆부서 팀장님. 아마 언니네 부서원들도 근처 어딘가에 앉아있겠지.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고, 구내식당에서 한 말은 전 직원이 듣는다.
그나저나 오늘은 구내식당이 모처럼 만석이다.
영양사님은 준비한 음식이 모자랄까 배식대와 대기줄을 연신 살피시고 조리사님들은 아직 다 비지도 않은 채 식어가는 냄비를 따뜻한 냄비로 교체하느라 바쁘시다.
캐파는 정해져 있는데 사람들이 자꾸 들어오니까 이 분들도 적잖이 막막하겠다.
그러고 보니 구내식당도 내게나 맛이 있고 없고를 따지며 편히 오가는 곳이지 누군가에게는 일터다. 오늘처럼 사람이 몰리는 날은 몰리는 대로, 평소처럼 사람이 없는 날은 없는 대로 힘들고 지치고 때로는 보람을 느끼기도 할 일터.
듣기론 작년까지 구내식당을 운영하던 업체는 도저히 이익이 나기 어려운 구조에 두 손을 들고 나갔단다. 명색이 구내식당인데 무턱대고 가격을 올릴 수도 없고, 식재료 가격은 계속 오르고, 손해를 보고 팔 순 없으니 합리적인 수준에서 식단을 구성해야 하고, 그게 성에 안 차는 고객들은 발길을 끊고.
아니, 요즘 물가에 6천 원으로 뭐 얼마나 맛있는 밥을 만들어내란 말야! 게다가 초대형 냄비에다 수십 인분씩 만든 제육볶음이 식당에서 주문받자마자 금방 만들어낸 거랑 비교가 되냐고! 그리고! 응? 소금 잔뜩 조미료 범벅으로 쓰면 우리도 맛있게 만들 수 있거든!!!
우리 영양사님, 속으로는 이렇게 외치고 있지 않을까.
새삼 구내식당 밥맛이 어쩌고 하며 평가한 게 미안해지고, 오늘따라 꽤 맛있게 느껴지기도 한다.
솔직히 6천 원으로 갓 지은 밥, 따뜻한 국, 매일 달라지는 반찬에 야채까지 푸짐하게 챙겨 먹을 수 있는 데가 또 어디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