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의 첫 세상

아이와 놀기 : 엄마가 더 신나는 우리 집 구경

by 귤예지

혼자 누워서도 팔다리를 버둥거리며 잘 놀던 아이가 요즘은 자꾸 소리를 지른다. '나 심심해하는 거 안 보여요?' 하는 것 같다. 생후 20일경부터 보기 시작한 초점책과 모빌은 예전만큼 아이의 관심을 끌지 못한다.

아이를 향해 두 팔을 뻗으면 아직 제 팔을 맘대로 쓰지도 못하는 아이가 마치 내게 두 팔로 화답하듯 버둥거린다. 힘만 따라준다면 윗몸을 일으켜 폴짝 날아오를 태세다. 아이를 들어 올려 내 가슴과 제 가슴이 맞닿게 안으면 아이의 시선이 내 어깨너머로 뻗는다.

자, 우리 오늘은 어디로 놀러 가볼까?


아이를 안고 제일 먼저 향하는 곳은 침실이다. 우리 부부의 침대 옆에 나란히 아이의 침대가 놓여있다.

"여기는 엄마 아빠랑 지안이가 자는 방. 우리 집에서 제일 따뜻하고 포근한 방이야."

아이가 두리번거리다가 시선을 어딘가로 고정한다. 아무것도 없는 벽과 천장의 경계 지점이다. 아이 덕분에 한 번도 관심 가진 적 없던 집안 어딘가를 처음으로 바라보게 된다. 우리 집 벽지가 이런 무늬였구나.

아이의 눈꺼풀이 서서히 감긴다. 슬며시 아이를 침대 위에 내려놓는다. 아이는 갑자기 힘차게 눈꺼풀을 들어 올리더니 아까보다 더 적극적으로 소리를 지른다. 생후 50일 무렵부터 의미를 알 수 없는 이상한 소리를 하나씩 내더니 이제는 한숨도 쉬는 아이다. 오늘도 한숨이다.

휴, 이 엄마 날 너무 만만하게 보고 있잖아!


가장 구경하기 좋은 방은 아무래도 가장 지저분한 방이다. 정리가 되지 않은 방에는 이것저것 볼거리가 많다. 우리 집에는 옷방과 서재, 창고 용도로 두루두루 쓰이는 방이 하나 있다. 침실에서 나와 그 방으로 이동한다.

"여기는 엄마와 아빠의 옷이 참 많지? 이 후드티는 엄마가 아빠랑 처음 데이트할 때 입었던 옷이고 이건 아빠가 1년에 한 번씩만 세탁하는 청바지. 이 검은색 점퍼는 엄마랑 아빠가 신혼여행 가기 전에 샀던 옷이야. 아빠랑 같은 옷으로 사고 싶었는데 아빠 몸이 커서 어쩔 수 없이 모양은 다르고 색깔만 같은 옷으로 샀네."

아이에게 구경시켜준다는 핑계로 옷장을 열어젖혀 옷마다 묻은 추억을 들추어본다. 옷이나 소품을 늘어놓고 하는 추억놀이는 내 오래된 취미. 특히 학창 시절에는 시험기간마다 본의 아니게 빠져들었던 취미다.

옷이 기억하는 남편과의 연애시절. 우리가 함께 갔던 장소와 함께 먹었던 메뉴들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그 옷을 입고 데이트하면서 우리가 나눈 대화들도 떠오른다. 별것 아닌 일로도 감동받고 때로는 서운해하던 시간들.


작은 방에는 내가 중학교 때부터 쓰던 책상이 있다. 15년 넘는 시간 동안 수많은 책들이 거쳐 간 책장과 세트다. 책장에는 남편과 연애시절 함께 쓰던 교환 일기장과 남편이 프러포즈하며 선물로 준 앨범, 결혼 1주년을 기념해 만든 앨범도 있다. 앨범 속에는 지금보다 젊고 예쁜 내가 있다.

"지안아, 엄마 봐. 옷을 예쁘게 입었네! 화장도 했구나. 엄마 참 예쁘지?"

저에게 동의를 구하는 내가 가소롭다는 듯 아이는 대꾸조차 없다. 그런 아이를 안고 작은 방 한편의 거울 앞에 섰다. 내 얼굴을 비추어 보고 몸을 돌려 아이의 얼굴을 비추어 보고 비스듬히 서서 나와 아이의 옆모습을 번갈아 본다. 도무지 닮은 구석이 없어 보였던 아이의 얼굴에서 조금씩 내 얼굴이 보인다.

아이는 거울 속 제 얼굴을 한번 보고 내 얼굴을 본다. 그러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저쪽으로 돌려버린다. 이럴 때는 마치 아이가 이미 다 자랐으면서 나를 속이고 있는 것만 같다. 아이는 어느새 다시 방 한 귀퉁이에 집중한다. 아무리 봐도 어른거리는 그림자뿐인데 도대체 뭘 보고 있는 거니?

좋아, 이제 다음 방으로 이동!


마지막이다. 주방 겸 거실. 남편과 내가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곳이다. 낮 시간에는 햇빛이 가장 많이 들어와 아이와 되도록 오래 머무르려 하는 곳이기도 하다. 2인용 식탁과 텔레비전, 각종 주방용품이 있다. 집기가 많아 아이에게 말할 거리도 풍부하다.

"이건 선풍기야. 더운 날씨에 시원한 바람을 만들어주는 고마운 물건."

"이건 청소기. 우리 집구석구석을 깨끗하게 청소해주지."

"그리고 이건 창문. 창문 덕분에 집안에서도 바깥을 볼 수 있어. 저기 버스정류장도 보이지? 아저씨가 버스를 기다리고 계시네."

"엄마가 독립할 때 엄마의 이모가 사주신 밥솥이야. 7년 동안 스무 번도 채 못 쓴 걸 결혼하고는 하루에 두 번씩 쓰기도 하네. 우리 지안이도 나중에 독립하면 이모한테 사달라고 하자."

아직 말하는 법을 모르는 아이와 단둘이 있다 보면 혼자 묻고 답하는 것에 익숙해진다. 아이가 알아듣지도 못하는 말을 중얼거리며 집안 구석구석을 헤집는 사이 이제 집 구경은 아이가 아니라 나를 위한 놀이가 된다. 혼자라도 중얼거리다 보면 적어도 말하는 법을 잊어버리지는 않겠지?


집을 구경하다 소재가 떨어지면 슬그머니 가족사를 끄집어낸다.

"엄마 이름은 김예지야. 누가 지어주셨냐면~"으로 시작되는 가족사는 엄마가 전해 들은 아빠의 출생과 유년기, 청소년기를 모두 훑고 나서야 끝이 난다. 이제는 역사가 되어버린 우리 부부의 이야기를 되짚다 보니 새삼스럽다. 시골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남편과 내가 서로 다른 30여 년을 살다가 우연히 같은 시간에 같은 지점에 머무르다 사랑을 하고 또 결혼을 하고 그 결실로 우리를 닮은 아이까지 낳았다는 사실이.


신혼살림을 단출하게 시작하자며 고른 열두 평 남짓한 집에서 아이를 키울 수 있을까 걱정했었다. 이 공간에 아이를 누이고 아이의 수많은 짐을 놓아둘 자리는 도무지 없어 보였다. 하지만 지금은 아이 침대도, 아이 옷과 장난감들도 모두 제 자리를 찾아 원래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럽다.

이제 아이가 없는 우리 인생을 상상할 수 없듯 우리 집도 마찬가지다. 아이가 없는 공간은 떠올리고 싶지 않다.


아직 밖에 나가본 일이 별로 없는 아이에게는 이 집이 우주다. 우리의 첫 보금자리, 내 아이의 첫 세상.

나중에 아이가 크면 말해줘야겠다. 너의 첫 세상은 이런 모습이었다고. 일부러 기억하려고 노력할 필요도 없을 것 같다. 매일 반복되는 집 구경 놀이에 집안 구석구석을 그림처럼 내 머릿속에 강제저장 중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