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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서'는 대충 '보고 써'

by 귤예지

내 업무의 절반은 사업에 참여 신청한 기업을 평가하는 일이다. 기업을 방문해 이것저것 물어 조사하고 평가기준에 따라 점수를 매긴 후 서술 형태의 보고서로 마무리한다.

당락을 결정하는 건 평가점수다. 보고서는 거들뿐. 그래서 대부분의 동료들이 보고서 작성에 큰 공을 들이지는 않는 편이다. 육하원칙에 따라 기업이 언제부터 어떤 사업을 해왔으며 성과는 어땠는지, 왜 사업에 참여하고자 하는지만 담겨있다면 문맥이나 표현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복직 후 첫 평가 대상인 S기업의 보고서를 쓰기 위해 한글 프로그램을 열었다. 머릿속에는 기업에 대한 정보들이 뒤죽박죽 섞여 떠다니고, 가슴속에서는 제대로 써보고 싶다는 의욕이 마구 솟았다.

5년 전 지금과 같은 업무를 하며 작성해둔 보고서가 수백 장이었다. 말미에는 요령이 생겨 보고서 하나에 30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마치 인공지능이 작성한 것처럼 구성이 한결같았다.

기존 보고서를 잘 활용하면 이번에도 금방 쓸 수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기존 보고서 대신 새 파일을 열었다. 복직 후 하는 일마다 썩 만족스럽지 못했던 터라 보고서 하나만큼은 완벽하게 쓰고 싶었다. 휴직 기간에도 글을 손에서 놓지 않았으니 예전보다 고품질의 보고서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틀에 박힌 보고서가 아니라 나만의 보고서를 써볼 작정이었다.


'S기업은 선박블록을 조립하는 회사로~'라는 문구를 시작으로 신나게 써 내려가던 양손이 멈춘 건 공정을 설명하는 부분에서였다. 들을 때는 분명 이해가 되었는데 글로 풀어 쓰려니 퍼즐 조각 몇 개가 부족했다. 서류를 보아도 끝내 이해 안 되는 부분이 있었다.

비슷한 일을 하는 기업의 보고서를 참고하면 쉽게 해결될 일이지만 열정 넘치는 복직자는 인터넷 창을 열었다. '선박블록 조립공정'을 검색하고 상위 노출된 글부터 차례로 읽었다. 이제야 조금 이해가 된다고 생각했을 때는 이미 2시간이나 지나있었다.


사업내용 뒤에는 기업이 우리 사업에 참여해야 하는 이유가 등장한다. 보고서의 요점은 여기서부터다. (도입부를 쓰느라 이미 반나절을 날려버렸지만) 본격적으로 쓰기 위해 팔을 걷어붙였다.

하지만 키보드를 치는 손가락은 좀처럼 속도를 내지 못했다. 대표님께 들을 때는 설득이 되었는데 막상 글로 쓰려니 영 부족했다. 어느 기업 보고서에나 통용되는 뻔하고 그럴싸한 문구를 몇 가지 알고 있지만 가져다 쓰고 싶지는 않았다. 이 기업의 보고서에만 쓸 수 있는 순도 100프로의 문장들로 채워 넣고 싶었다.


마침내 완성된 보고서의 파일명에는 '_초안'이라는 꼬리표를 달았다. 끝이 아니라는 뜻이다. 쭉 읽어보니 순서가 뒤죽박죽인 데다 오탈자도 보였다.

너무 긴 문장은 적당히 끊어주고 불필요한 접속사는 지우기로 했다. 반복되는 내용은 과감히 날리고 내용이 바뀔 때는 문단도 바꾸어주고. 뜻이 같은 용어들은 한 가지로 통일하고 금액과 날짜를 나타내는 단위도 맞추고. 한글로 쓴 영문명 뒤에는 괄호를 넣어 알파벳 표기도 해주다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 지금 뭘 하고 있지. 이깟 보고서 한 장에 도대체 몇 시간을 매달려있는 거야.

그 사이 허리 높이 정도였던 할 일의 목록은 어깨까지 높아져있었다. 뒷자리 후배의 눈빛이 별것 아닌 일에 매달려 시간을 축내는 동료를 한심하게 바라보던 과거의 내 눈빛으로 변해있었다.


거의 하루를 할애해 쓴 한 장 짜리 보고서를 팀장님은 쓱 훑어보고 말았다. 역시 보고서는 우리 일에서 별로 중요한 게 아니었던 거다. 게다가 정말 허무했던 건 공들여 쓴 보고서가 5년 전 뚝딱 만들어낸 보고서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는 점. 고심하며 골라낸 단어들은 보고 직전까지도 고민하다 결국 빼버렸다.


문득 떠오르는 신입시절 첫 보고서의 기억. 선배들이 쓴 보고서를 그대로 따라 쓰기가 민망해서 글자 하나하나를 신중하게 골라 쓴 보고서를 보시고 당시 팀장님은 아주 창의적이라는 피드백을 주셨더랬다. 그게 칭찬이 아니라는 건 다음 말을 듣고 알았다.

"보고서가 왜 보고서인 줄 알아? 앞사람들이 한 거 대충 '보고 써'라고 보고서야."

흔한 아재개그인 줄 알고 웃어넘기려는 내게 팀장님은 친절하시게도 샘플 보고서까지 챙겨주셨다. 선배들의 보고서는 알맹이만 다를 뿐 비슷한 순서와 형식이었고, 나도 거기에 맞춰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선배들이 긴 시간 시행착오를 거듭하며 만들어둔 토대 덕분에 나도 마침내 한 장의 보고서를 30분 만에 뚝딱 완성할 수 있었던 거다.


오랜만의 회사생활에서 리셋된 건 이메일 로그인 암호만이 아니었나 보다. 그간의 직장생활에서 만들어진 요령 같은 것도 다 잊고 신입 때처럼 잘하고 싶은 의욕만 넘쳐흐른다.

전보다 더 잘할 수 있다고, 엄마가 되었지만 직장인으로서의 나도 여전하다고 인정받고 싶어 자꾸 애쓰게 된다. 보고서는 어쩌면 그걸 증명해 보이기 위한 도구였는지도.


그래도 신입 때와 달라진 게 있다면 내 컴퓨터 속 어딘가 과거에 써둔 보고서가 수백 장 들어있다는 것. 분명 머릿속 어딘가에도 10년간 축적해둔 업무용 자산들이 남아있을 거다.

그러니까 너무 서두르거나 애쓰지는 말아야지. 무리한 모드 전환은 컴퓨터도 버벅대게 만드니까.

엄마에서 직장인으로의 모드 전환을 위해 나도 지금 버벅대고 있을 뿐이다.


지금 내게 필요한 건 남들이 주는 인정보다 나 자신이 내게 주는 믿음이 아닐까.

곧 내 자리를 찾을 거라는, 잘할 수 있을 거라는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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