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과 일 사이의 행간을 메우는 일이 일보다 어렵다
직장생활이 쉽지 않다고 느끼는 건 일 때문만은 아니다. 내게는 '관계'도 일만큼 어렵다. 처음 만난 사람들과 밥을 먹고 공통의 관심사를 찾아가는 것은 때때로 일보다 어렵게 느껴진다.
복직 3일째, 점심시간을 5분 앞두고 부서장님이 나를 부르셨다. 맞은편에는 낯선 60대 남자분이 앉아계셨다.
"점심 약속 없으면 같이 가지."
얼떨결에 두 분을 따라나섰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동안 부서장님은 우리 둘을 서로에게 소개하셨다. 60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남자분은 우리 회사 사업에 오래 참여해오신 꽤 규모 있는 기업의 사장님이셨다. 앞으로도 쭉 뵙게 될 분이니 잘 지내보라는 부서장님 말씀을 듣고 나자 식당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부자연스러워졌다.
메뉴는 생선구이. 종업원이 생선을 가위로 손질하는 동안 건너편에 앉은 사장님을 살폈다. 가느다란 눈매, 굳게 다문 입술, 다부진 체격. 표정이 잘 드러나지 않는 얼굴인 데다 사장님이라는 직책이 주는 아우라까지 더해져서 괜히 주눅이 들었다.
손질을 끝낸 종업원이 나가자 부서장님이 먼저 입을 여셨다. 조선업이 침체되어 이 지역 경기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는 둥, 코로나19 여파로 소비심리까지 위축되었다는 둥, 그래도 이런 식당이 붐비기 시작한 걸 보면 곧 회복되지 않겠냐는 둥 여러 이야기들이 오갔다.
이야기의 흐름이 종종 끊어지고 정적이 흐르기도 했는데 그때마다 나는 가시방석에 앉은 것처럼 불편해졌다. 가끔 내 쪽을 향하는 부서장님의 시선이 "무슨 말이라도 좀 해봐. 생선만 뜯지 말고."라고 재촉하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 틈을 메우는 것이 나를 여기에 데려오신 이유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낯선 분께 가닿을 대화의 소재를 골라내는 건 손질된 생선에서 남아있는 가시를 발라내는 일보다 훨씬 어렵고 까다롭게 여겨졌다. "주말에는 뭐하실 건가요?"와 같은 질문을 할 수도 없지 않나. 여기가 무슨 소개팅 자리도 아니고. 마침내 "생선구이가 참 맛있네요."라는 말을 생각해냈지만 그 뒤를 이을 대화를 머릿속에서 굴리다가 결국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내 몫의 대화가 빠진 탓인지 식사는 30분도 채 안되어 끝났다. 식당을 빠져나오며 마음이 비로소 가벼워지려는데 옆에서 찬물을 끼얹는 목소리가 들렸다.
"시간도 남았는데 회사 근처에서 커피 한잔 드시죠."
엄마로만 살았던 휴직 기간에는 만나는 사람도 대부분 또래 엄마들이었다. 처음 만나는 사이에도 대화 소재는 넘쳤다. 아이가 뭘 먹었고, 얼마나 쌌고, 얼마나 잤는지만 떠들어도 시간이 훌쩍 지났다.
아이 이야기를 하다 보면 자연스레 남편 이야기도 꼬리를 물고 나왔다. 엄마들 모임에서는 대화가 떨어지는 경우가 거의 없다. 오히려 할 말이 남았는데도 집에 갈 시간이 되어 어쩔 수 없이 싹둑 자르고 헤어질 때가 많다.
엄마 모임에서 만났다면 앞에 앉은 사장님과도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 있었을까, 생각하자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우리 둘에게도 의외의 공통점이나 잘 통하는 부분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그걸 찾기 위한 대화는 어쩐지 지금 이 자리와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그런 생각으로 바라본 사장님과 눈이 딱 마주치고 말았다. 식당에서보다는 조금 부드러워진 표정으로 사장님도 나를 보고 있었다. 이제는 피할 수 없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한다.
"사장님, 혹시 눈썹 문신하셨어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옆에 앉은 부서장님의 시선이 홱 내 쪽을 향했다. 눈빛은 "얘 뭐야" 말하는 듯하다.
당황한 건 나도 마찬가지. 식당에서부터 사장님의 유난히 짙은 눈썹에 눈길이 갔던 건 사실이지만 입 밖으로 꺼낼 생각은 없었다. 아마 목구멍에 장착된 필터가 잠깐 고장 난 모양이다.
불쾌하셨으면 어쩌지, 뒤늦게 마음이 조마조마해졌다. 혹시 인상을 찌푸리기라도 하시면 이 자리는 가시방석이라는 단어로도 부족할 만큼 불편한 자리가 될 것이다.
"허허, 했습니다. 티가 많이 납니까?"
사장님의 대답에 긴장했던 마음이 한순간에 가라앉았다. 소리 내어 웃으신 건 처음이었다. 눈썹 언저리를 만지는 손은 좀 민망한 듯 보였지만 언짢은 기색은 아니었다. 나도 사장님을 따라 내 눈썹에 손을 대고 말했다.
"저도 최근에 했거든요. 남편에게도 권하고 있는데 관심이 없다네요. 요즘은 남자분들도 많이 하시는데 말이에요."
"저도 아내가 시켜서 얼마 전에 했습니다. 허허."
사장님은 사모님 이야기를 하시며 또 한 번 웃으셨다.
눈썹 문신으로 물꼬를 튼 대화는 보이차와 결혼식 문화에 대한 이야기로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그 뒤로도 정적은 여러 번 다녀갔지만 식당에서처럼 어색하지는 않았다. 사장님이 내 또래 자녀분들 이야기를 하실 때는 마치 내 부모님이 내 앞에서 꺼내지 못하는 속마음을 대신 전해 듣는 기분마저 들어 시간이 더디가기를 바라게도 되었다.
일로 만난 사이에는 일로만 만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여전하다. 안부는 생략하고 딱 필요한 일 얘기만 주고받았으면. 관심이 없는 상대에게서 대화 소재를 발굴하는 일이 내게는 쉽지 않다. 예전보다 더 어려워진 걸 보면 휴직 기간 동안 직장생활에 필요한 대인관계 능력도 얼마쯤 떨어졌나 보다.
사장님과의 식사자리는 넘어야 할 하나의 문턱이었다. 일과 일 사이의 행간을 메우는 일, 직장생활을 하는 한 앞으로도 계속 내가 해나가야 할 일이다.
지나치게 신선한 소재를 선택하는 바람에 오늘은 나 자신조차 당황하게 만들고 말았지만 그걸로 상대방이 웃어주었으니 문턱을 넘었다고 보아도 될까. 그래도 다행인 건 오늘 만난 사장님과 다음번에는 훨씬 덜 어색하리라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