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증거는 네가 느끼는 행복

이별을 주저하는 너에게

by 귤예지

'사랑을 시작하는 너에게'라고 제목을 썼다가 고쳤어. 기억을 더듬어보니 사랑을 시작할 때는 남의 이야기 따위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던 것 같아서. 사랑을 시작한 것만으로도 이미 세상을 다 얻은 기분일 텐데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니? 게다가 사랑이라는 건 '준비~ 땅!'하고 구령에 맞춰 시작하는 달리기가 아니잖아. 나도 모르는 사이 스르르 젖어들고서야 그게 사랑인 줄 알지.


'사랑'과 '이별'에 대해 말하기 위해 엄마는 아빠에게도 여태 한 적 없던 과거 이야기를 꺼내려고 해. 아빠 이야기를 하면 더 좋겠지만 아빠와의 이별은 상상하고 싶지가 않구나.

스물한 살 봄, 엄마는 같은 학교 학생과 연애를 시작했어. 매일 아침 기숙사 앞에서 기다렸다 강의실까지 바래다주고, 시험공부로 바쁠 때는 다른 사람 편으로 슬쩍 야식을 가져다주는 자상한 사람이었지. 하지만 함께 있는 시간이 곧 사랑의 크기와 비례한다고 믿었던 그에게는 엄마의 바쁜 생활이 불만이었어. 그 무렵 엄마는 동아리 활동과 전공수업에 아주 열심이었거든. 그 사람은 엄마가 더 많은 시간을 그와 함께 보내고 때로는 엄마의 소중한 것들까지도 내어줄 수 있는 사람이길 바랐지.


서로 맞지 않는 부분들이 많았지만 엄마는 선뜻 이별을 결정하지 못했단다. 그 사람의 행동과 엄마에게 거는 기대가 모두 사랑의 증거라고 생각했거든. 때때로 엄마에게 부담을 주는 표현방식조차 사랑의 크기가 그만큼 크기 때문이라고 여겼어.

하지만 만남이 지속될수록 엄마가 느끼는 부담은 커졌고, 마침내 이별을 했어. 한편으로는 다시 그와 같이 엄마를 사랑해주는 사람을 만나지 못할까 봐 두려웠지.

괜한 걱정이었어. 시간이 흐르고 엄마는 새로운 사람과 연애를 시작했거든.

그렇게 여러 번의 만남과 이별을 반복한 끝에 네 아빠를 만난 거야. 당시에는 한 사람 한 사람과의 만남이 모두 소중한 경험이었을 테지만, 지금에 와서는 그 모든 경험들이 아빠와의 사랑을 위한 연습이었던 것 같아. 수학 문제를 푸는 것처럼 첫 번째 연애에서 했던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두 번째 연애에서 발견한 엄마 안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또 노력하는 과정에서 엄마 스스로도 많이 다듬어졌거든.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헤어지면서 엄마의 가치관과 이상형도 변했어. 그런 점에서는 너무 일찍 네 아빠를 만나지 않은 걸 오히려 다행이라고 여겨. (이것으로 아빠가 알고 싶지 않은 과거를 털어놓은 것에 대한 변명이 된다면 좋겠다.)


앞서 사랑을 시작할 때는 남의 이야기 따위 귀에 들어오지도 않는다고 말했잖니. 그만큼 사랑이라는 감정은 특별해서 사람을 행복의 경지에 금세 올려다 놓는단다. 사랑을 시작하고 맞이하는 아침은 어제와 다를 거야. 하늘은 먹구름이 껴도 예뻐 보이고 바람에서는 향기가 느껴질지 몰라.

사랑은 그렇게 한 사람의 세상을 바꿀 만큼 큰 힘을 가진 감정이라서, 위기를 만나면 반대로 끝도 없는 바닥으로 가라앉혀버리기도 하지. 그게 두려워서 사랑이라는 배에 금이 간 걸 알면서도 내리지 못하고 버티다가는 엉뚱한 결과를 맞이할 수 있어. 지금 하는 사랑이 전부라는 생각에 네 소중한 걸 감수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야.

마음껏 사랑하되, 가장 사랑하는 건 언제나 너 자신이었으면 해.

엄마는 네가 사랑하는 사람을 집으로 데려오는 날을 상상해보곤 해. 네 아빠와 함께 그날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지. 네가 누구를 데려오든 그 사람의 조건으로 판단하지는 말자고 얘기했단다.

하지만 네가 사랑에 빠져서 행복하기보다 불행한 날이 더 많다면, 스스로를 이전의 너보다 더 못나다고 여기게 되었다면, 소중한 무언가를 내려놓아야 할지에 대한 고민반복된다면, 엄마는 네게 이별이라는 카드를 내밀고 싶구나. 너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언제나 네 마음을 먼저 들여다본단다.


어린 너는 한 번씩 열감기를 앓는데, 그때마다 엄마와 아빠는 밤을 새우다시피 하며 너를 간호해. 수건에 미지근한 물을 적셔 네 얼굴과 몸을 닦고 한두 시간 간격으로 체온을 재지. 땀을 많이 흘리면 탈수가 올까 봐 짜증 내는 너를 일으켜 물을 마시게 하고, 방이 건조할까 젖은 수건을 보충하며 밤을 보내. 아침이 되면 둘 다 눈이 퀭해져 있지만 네 체온이 정상범위에 들었다는 사실에 충분히 감사해하며 하루를 힘차게 시작한단다.


너는 이렇게 사랑받고 있어. 네가 우리에게 무언가를 주어서가 아니라, 네가 예쁘거나 똑똑하거나 말을 잘 들어서가 아니라, 그냥 너이기 때문에 사랑한단다. 만약 서로 의견이 달라 언성을 높이는 일이 생기더라도, 혹은 너로 인해 엄마나 아빠가 다치게 되더라도, 우리가 너를 사랑한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을 거야.

너는 존재만으로도 충분히 사랑받아야 마땅한 사람이야. 네게 헌신을 기대하는 사람, 다른 사람과 비교해 네 가치를 평가하는 사람은 너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야. 이건 네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이야기야. 사랑하는 관계에서, 특히 남녀 간의 사랑에서는 어느 것도 일방적이어서는 안 되거든. 상대방이 너를 사랑한다는 이유로 네게 모든 걸 맞춰주기를 기대하지는 마. 함께 행복하려면 상대방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알고 그걸 존중해야 해. 또한 각자가 스스로를 잘 돌볼 수 있을 때 사랑하는 관계도 건강하게 지속될 수 있단다.

네 아빠는 엄마를 만나고 얼마 후에 이런 말을 했어.

"자기를 만나서 나는 더 좋은 사람이 된 것 같아."

엄마도 같은 생각이었어. 진정 너를 사랑하고 네 행복을 바라는 사람과 함께 있다면, 너는 저절로 더 행복해질 테고 긍정적인 감정들이 쌓여 너를 더 좋은 사람으로 만들어줄 거야. 결국 건강한 사랑의 증거는 네 마음속에 충만한 행복인 거지.


건강한 사랑의 경험은 이별 후에도 우리를 성숙하게 만드는 나이테로 남아. 그러니 마음껏 사랑하되 이별을 두려워하지는 말자.

사랑에 빠진 너는 아마 전에 없던 다양한 감정들을 경험했을 거야. 하지만 숱한 감정이 휘젓고 간 후에도 너는 여전히 너인 채로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