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의 기원'을 쓴 찰스 다윈이 어느 날 노트에 문제를 하나 적었대. 종의 기원과는 전혀 관계없지만 다윈 개인에게는 무엇보다 중대했던 그 문제는 바로 '결혼을 해야만 하는가?' 였어.
과학적인 문제로 가득할 것만 같은 다윈의 노트에 '결혼'이라는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가 등장한 것이 의외지? 결혼이 가지는 무게감은 이렇듯 지위나 역할을 막론하고 결코 가벼울 수 없지. 결혼을 결심한 많은 사람들이 과거에 대한 아쉬움과 미래에 대한 불안 때문에 겪는 우울감을 뜻하는 '메리지 블루'라는 단어도 있잖니.
결혼, 할까 말까?
엄마도 결혼을 앞두고 걱정이 많았어. 결혼으로 삶이 백팔십도 달라질 것 같았거든.
네 외할머니만 봐도 그랬어. 흑백사진 속 젊은 네 외할머니는 청바지를 입고 제주도 하늘을 배경으로 말을 타는 자유로운 모습이었어. 듣기로는 그 청바지가 그 시절 외할머니의 두 달치 월급에 버금가는 가격이었다지. 그렇게 멋과 자유를 누리던 네 외할머니가 결혼 후 엄마의 어린 시절 기억 속에서는 천 원 한 장도 쉽게 쓰지 못하고 가족이라는 테두리에 갇혀 사는 것처럼 보였거든. 일상처럼 누리던 쇼핑이나 여행을 사치라 여기면서 말이야.
네 아빠가 결혼 후 백팔십도 달라질까봐도 걱정이었지.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시댁의 존재도 두려웠고.
나 하나 책임지기도 벅찬 내가 누군가의 아내, 엄마, 며느리라는 역할까지 해낼 수 있을까.
그 많은 역할을 소화하다 나 자신을 영영 잃고 마는 건 아닐까.
겪어보지 않고는 답을 알 수 없는 문제 앞에서 갈팡질팡하던 엄마로 하여금 결혼을 결심하게 해 준 건 아빠였어.
"자기는 결혼해도 지금이랑 똑같이 살면 돼."
매일 하던 산책길에서 아빠가 엄마 손을 꼭 잡고 해준 한마디에 엄마의 두려움은 스르르 녹아내렸단다. 많은 것이 달라질 건 분명해 보였지만 아빠 말처럼 엄마 자신이 다른 사람이 되는 건 아니니까. 그걸 깨닫자 용기가 생겼어.
결혼이라는 중대한 결정 앞에서 갈팡질팡하는 이유는 그 결정이 불러올 다양한 변수를 다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결혼이라는 문을 여는 순간 이제껏 모르고 지내온 사람들과 사건들이 내 삶의 테두리 안으로 한꺼번에 들이닥칠테니 두려운 게 당연하지.
하지만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에 지레 겁먹을 필요는 없다고 봐. 네 삶이 원하지 않는 상황으로 흘러가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한 사람이 거기 있을 거거든. 그게 너야. 네 앞에 어떤 세상이 펼쳐지든, 그로 인해 네가 불행해지는 걸 너 스스로 가만히 보고 있지만 않으면 돼. 바뀐 상황으로 힘들어하는 사람들 중에는 그 상황을 해결할 방법조차 시도해보지 않고 운명처럼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의외로 많단다.
생각과 다르게 상황이 흘러갈 때는 솔직한 네 감정을 표현해. 네가 지키고 싶은 것이 있다면 당당하게 요구해. 요즘 말이 늘어가는 너는 조금만 마음에 들지 않아도 "시아!(싫어!)"를 외친단다. 어제는 퇴근이 늦어 20분쯤 늦게 나타났더니 "엄마, 시아!"라고 소리치더라고. 지금처럼 네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며 네 삶의 주도권을 지키면 돼.
결혼 뒤에 숨은 그림자를 과대평가하는 것 못지않게 결혼이 네게 절대적인 안정과 행복을 가져다줄 거라는 기대도 위험해. 결혼은 삶이라는 지도 위에서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경로 중의 하나라고 생각해. 행복하기 위해 여행을 하지만 그 경로에는 분명 넘어야 할 고비도 있겠지.
네 동행자 또한 너와 같은 기대로 여행길에 올랐을 테니 상대방을 네가 의지하거나 네게 행복을 주는 존재로만 생각해서는 안돼. 너를 가장 행복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은 바로 너 자신이란다.
입은 옷이 달라진다고 해서 네가 다른 사람이 되는 건 아니듯 네게 새로운 이름이 더해져도 너는 여전히 너야. 아내가 된 너도, 엄마가 된 너도 너야.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좀 가벼워지지 않니? 엄마도 그런 마음으로 결혼을 했어. 응? 그런데 어쩌다 네 아빠와 결혼을 했냐고?
이 사람과 결혼해도 될까?
엄마와 아빠는 5년 전 어느 겨울에 처음 만났어. 우리는 같은 날 같은 부서로 발령받았는데, 공교롭게도 같은 아파트의 바로 옆 단지에 살게 되었고 서로의 고향도 근거리라 자연스레 가까워졌지.
이제와 하는 말이지만 네 아빠는 연애에 참 서툰 사람이었단다. 엄마가 추위에 떨어도 겉옷 한번 벗어주는 법을 몰랐고, 엄마가 서운해 토라져도 달콤한 말로 기분을 풀어줄 줄 몰랐어. 엄마가 내심 아빠와의 결혼을 바라고 있을 때도 네 아빠는 엄마가 없는 몇 년 후의 여행 계획 같은 걸 늘어놓으며 애를 태웠지.
그해 8월, 엄마를 만나러 오신 네 할머니, 할아버지를 통해 아빠의 진심을 알게 됐어. 사실 아빠도 전부터 엄마와의 결혼을 간절히 바라고 있지만 엄마에게 부담을 줄까 봐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는 걸. 그런 얘기를 주절주절 꺼내놓는 네 할머니에게 "엄마는 왜 쓸데없는 소리를 해? 얘 부담스럽게!" 하며 애써 화제를 돌리는 네 아빠의 빨개진 얼굴에 엄마는 솔직히 기분이 좋았단다.
결혼을 삶에서 선택할 수 있는 여행경로 같은 것이라고 했잖니. 여행에서 여행지만큼이나 중요한 건 함께 여행하는 동행자라고 생각해. 내가 주도권을 가지고 행복한 여행을 하려면 나를 존중해줄 사람과 함께여야겠지.
매 순간 너 하나만 바라보고 네가 다칠세라 전전긍긍 아껴주고 값비싼 선물을 사주는 사람과 함께 있으면 지금 당장은 행복할 수 있어. 하지만 다른 사람이 만들어주는 행복은 영원히 지속될 수 없단다. 행복이든 불행이든 누가 대신 만들어줄 수 있는 건 아니거든. 시간이 흐르고 상황이 변해도 행복하려면 행복을 선택할 수 있는 네 마음가짐이 중요해.
결국 행복하고자 하는 네 마음을 존중해줄 사람인지 아닌지가 지금 그 사람이 내미는 물질적인 선물의 크기보다 열 배는 더 중요하다고 봐. 엄마에게는 네 아빠가 그런 사람이었어. 결혼 후에도 나를 아내와 네 엄마로만 대하지 않고 나로 대해줄 사람, 내 꿈을 존중하며 기꺼이 응원해줄 사람이 아빠라고 생각했어. 적어도 지금까지는 엄마 생각이 옳았던 것 같아.
결혼을 준비하고 있다면 배우자가 될 사람과 어디에 집을 구하고 어떤 브랜드의 가구를 살지, 티브이는 몇 인치로 할지보다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에 대해 더 많은 대화를 나눠보렴. 네가 존중받고 싶은 영역에 대해 말하고 상대방이 배려받기 원하는 영역은 무엇인지 들어봐.
결혼은 같은 공간과 시간을 다른 두 사람이 공유하는 것이라 서로 희생할 일이 분명히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영역을 존중하려고 노력할 때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며 더 행복해지고자 선택한 결혼의 본질에 가까워질 수 있을 거야.
결혼 후 엄마는 부담과 기대를 가지지 않으려 애썼어. 혼자일 때 하지 않던 물걸레 청소를 해야 한다거나 아침밥을 챙겨 먹어야(챙겨주어야) 한다는 부담을 일찍부터 내려놓았고 네 아빠에게도 다른 아내들이 그들의 남편에게 하는 기대를 하지 않으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했지. 가장 가까이서 일상을 공유하고 도움이 필요할 때는 가장 먼저 기댈 수 있는 서로가 되어주지만, 상대가 원하면 언제든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배려하는 연습도 했어.
네가 세상에 오고는 우리 둘 모두에게 물리적인 시간이 줄었고 물걸레 청소나 아침밥을 챙기는 것도 일상이 되었지만, 여전히 우리는 서로의 영역을 최대한 지켜주기 위해 노력하고 있단다. 우리는 주말마다 서로에게 몇 시간씩의 개인 시간을 선물해. 덕분에 엄마는 이렇게 글을 쓸 수 있고.
결혼으로 달라진 이 삶도 엄마는 퍽 마음에 든단다.
네가 어떤 삶을 선택할지 모르면서 은연중에 너도 결혼을 할 거라는 전제를 깔아 둔 것처럼 들렸다면 사과할게. 엄마가 먼저 경험해본 삶이라 이 선택에 대해서는 조금 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던 것으로 이해해주면 좋겠구나. 네가 아직 가보지 못한 여행지에 먼저 다녀와서 후기를 공유하듯 말이야.
하지만 엄마가 선택한 여행경로를 뒤따를 필요는 없어. 어떤 경로를 선택하든 네 삶의 주도권을 지킬 수만 있으면 돼. 네가 하는 선택이 네 삶에 행복을 더하는 선택이 되기를 축복할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