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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ickypinkpiggy Jan 23. 2022

아무것도 없을 때 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선택

정지돈 - 『당신을 위한 것이나 당신의 것은 아닌』

산책할 때 우린 어떤 의무도 없이 자유롭다. 산책은 목적지가 없으며 지켜야 할 규칙도 없다. 그저 발이 닿는 대로 제 보폭과 속도로 걸으면 된다. 발끝을 타고 전해지는 단단한 땅의 감각과 이에 반응하는 다리의 근육은 굳어있는 머리를 가볍게 풀어주며 자유연상으로 이끈다. 그 자유연상은 발걸음과 마찬가지로 어디로 나아갈지 모른다는 점에서 낯설고 비제한적이다. 그렇게 우린 관성에서 벗어남으로써 새로운 사유를 경험할 수 있다. 이 책에서 인용한 울프의 말대로 “훼방받지 않는 집중이 아니라 가벼운 주의산만이 상상력을 추동하곤 한다. 그럴 때 생각은 우회로로 간다." 어떤 훼방은 관점의 각도를 조금 틀어놓는다. 정지돈은 파리와 서울을 걸으며 그 훼방의 원리로 축조한 개성적인 사유의 세계를 보여준다.


기존의 관점을 수정한다는 건 관습을 다르게 사유하게 한다는 점에서 매력적이다. 그렇게 다르게 보려고 노력할 때 비로소 기존의 관습을 새롭게 평가할 수 있으며 나아가야 할 방향을 재설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산책은 이를 위한 좋은 촉매제다. 정지돈은 한 예로 차별과 혐오를 언급하며 "차별과 혐오는 예외적인 행위가 아닌 일상적인 상태에 가깝다. 그러므로 저항 역시 그래야 한다. 저항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가져야 할 상태다."라고 설명한다. 산책은 이러한 저항을 가능케 하는 일상의 작은 틈이다. 그 작은 틈으로 깊숙이 파고들어 사유를 거듭할 때 당연하게 여기던 것들이 무너진다. 예컨대, 정지돈은 산책하며 도로를 달리는 자동차를 목격한다. 그의 생각은 단숨에 자동차로 건너간다.


"지금은 자동차 문화가 남성들의 전유물로 여겨지지만 과거를 보면 그렇지 않다. 자동차는 여성들이 집을 벗어나게 해주는 도구인 동시에 집이기도 했다. 남성들이 여성운전자를 의심하고 비웃는 것은 자신들에 대한 위협으로 느끼기 때문이다. 운전대를 잡는 순간 지배에서 벗어나 동등한 위치에 올라선다. (...) 이데올로기적 배치들은 항상 우리를 특정한 발언과 생각 속으로 밀어 넣는다. 중요한 건 그렇기 때문에 이데올로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게 아니라 (이 경우 나이브한 상대주의에 빠질 뿐이다) 자동차와 같은 코드들을 새롭게 발견하고 배치할 수 있는 능력이다. 상황주의의 전략으로 말하면 전환(detournement)이다. 더이상 전복적이지 않은 지배 문화의 요소를 혁명적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바꾸어놓는 것이다."


물론 이렇게 거창한 사유 속에 잠기지 않더라도 산책은 매력적이다. 그건 목적지 없는 이동이기 때문일 테다. 현대인의 이동은 대개 어떤 목표나 의무 때문에 이뤄진다. 작게는 약속(친구를 만나러 가야 함)부터 출근(회사에 가야 함)까지 많은 '이동'이 목적지 없이는 이뤄지지 않는다. 그렇지만 산책은 무용한 이동이다. 어디로 가야 할 필요도 없이 우린 어디론가 가며, 오직 그 이유 때문에 일상으로부터 자유롭다. 비로소 사회가 부여한 정체성을 상실하고 무언가 될 필요 없이 생각이 닿는 대로 생각하고 발길이 닿는 대로 걸을 수 있다. 진정한 휴식의 의미는 바로 그 상실과 무용함에 있다.


이 책을 덮고 집 밖으로 나가 걸었다. 어딜 가야겠다거나 무엇을 생각해야 한다는 강박 없이 보이는 대로 생각하며 걸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산책 코스는 집 앞의 하천을 따라 길게 이어지는 길이다. 나는 날마다 그 길을 걸으며 슬픔을 상실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뚝 뚝 떨어지는 내 슬픔을 하천의 물줄기가 기꺼이 싣고 떠내려가 줄 거라고도 생각한다. 망상인가? 그렇지만 그 망상 덕분에 집에 돌아오는 발걸음은 훨씬 가볍다. 기분은 말할 것도 없이 나아진다. 세계에 도움이 될 사유는 전혀 하지 않았지만 난 그렇게 스스로를 돌보며 휴식을 취한다.


그러므로 산책은 육체적 행위라는 표면적 의미 이전에 영적 재정비의 행위라는 점에서  의미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말미에 나오는 대로 "BBC 하루 1  걷기가 건강에 미치는 영향을 조사하는 다큐를 제작했" "결과는 거의 효과 없음"이라지만 회복에는 특효약이니 말이다. 그래서 정지돈은 말한다.


"산책은 거창한 의미 이전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다. 아름다운 자연과 세련된 숍과 산책로가 없어도 우리는 걸을 수 있다. 돈이 없고 친구가 없고 연인이 없을 때 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일은 걷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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