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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ickypinkpiggy Jan 18. 2022

당신이 묻어놓은 것을 캐지 않고도 안는 방법

박준 -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이번 겨울에 갔던 제주는 제대로 걷기조차 힘들 정도로 바람이 많이 불었고, 그 바람을 따라 얼음 조각이 섞인 눈이 쏟아졌다. 숙소 밖으로 나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눈이 내리기 전 서점에서 구해온 책 몇 권이 아니었더라면 아쉬운 마음으로 시간이 가기만을 기다릴 뻔했다. 눈이 세상을 온통 뒤덮었던 그날 밤, 창문이 흔들리는 소리를 들으며 박준의 시집을 읽었다. 캄캄하지만은 않은 밤이었다.


박준의 시에서 언뜻 비치는 어둑한 쓸쓸함은 이내 다른 시의 환한 포근함으로 덮인다. "사람이 혼자 사는 집에는/ 밤이 이르"지만 홀로 있는 이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햇빛이 먼저 와" 드는 "미인"이 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불을 지펴 솥을 올리고 "내 이름을 불러주던/ 당신의 연음 같은 것들도// 뚝뚝/ 뜯어넣"으며 "나무를 더 넣지 않아도/ 여전히 연하고 무른 것들이/ 먼저 떠"오르는 걸 지켜본다. 내게만 밤이 찾아온 것만 같은 어두운 외로움을 누구나 느껴본 적 있지 않을까. 그런 날 시인은 마음속으로 누군가를 그리는 일만으로도 밤을 밝힐 수 있다. 솥을 올리고 무언가를 끓이는 와중에도 푸른 불길이 번지는 것을 바라보며 사랑의 환한 감각을 떠올리기 때문이다.

이런 방식으로 어두컴컴한 밤을 통과하는 건 시를 쓰는 행위와도 같다. 시인은 밤을 밝히는 시를 씀으로써 환한 사랑을 빚는다. 그렇게 마음속으로 누군가를 정성스럽게 원하고 그릴 때, '사랑'은 비로소 볕으로 나올 수 있다. 그리고 "미인"이 곁에 머무르는 날 "미인의 얼굴에는, 언제나 햇빛이 먼저 와 들고 나는 그 볕을 만지는 게 그렇게 좋았다"고 말할 수 있게 된다. 사랑은 더 이상 캄캄한 시인의 마음속에만 있지 않고 정말로 환하게 감각할 수 있는 것이 된다.


그러고 나면 혼자 남아서도 "슬픔은 자랑이 될 수 있다". "좋지 않은 세상에서 당신의 슬픔을 생각"하는 시인은 "철봉에 매달리지 않아도 이를 악물"고 마음속 누군가의 슬픔을 떠올린다. 누군가의 슬픔을 대신 아파한다는 건 그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의미이므로, "당신"은 시인이 사랑하는 "미인"일 테다. 그렇게 "미인"의 슬픔을 홀로 처리하다 보면 "비 마중 나오듯/ 서리서리 모여드는// 당신의 눈동자의 맺음새"가 떠오르고, 슬픔을 생각하는 일이 더는 슬프지만은 않은, 사랑하는 일의 일부가 된다. 그렇게 사랑하는 이의 슬픔을 나눠 들 수 있을 때, 슬픔은 자랑이 되는 것이다. 이 또한 혼자만의 쓸쓸함이 마음속 누군가를 떠올리는 일만으로도 포근해지는 사랑의 일이다.

이처럼 박준의 시는 사뭇 서글프다가도 더러 다정한 말씨의 아름다운 언어로 촘촘히 엮여 있다. 그 중 「천마총 놀이터」와 「해남으로 보내는 편지」는 특히 '외로운 사람을 다정하게 사랑하는 법'에 대한 전언으로 읽힌다. 시집에서는 두 시 사이에 몇몇 다른 시들이 자리 잡아 두 시 사이의 거리가 먼데도, 이어 읽고 싶은 마음이 드는 까닭이다. 이는 "모든 글의 만남은 언제나 아름다워야 한다는" 시인의 마음을 담았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저는 아직 제 방으로도 못 가고 천마총에도 못 가보았지만 이게 꼭 거리의 문제만은 아니어서요 결국 무엇을 묻어둔다는 것은 시차를 만드는 일이었고 시차는 그곳에 먼저 가 있는 혼자가 스스로의 눈빛을 아프게 기다리는 일이었으니까요"

- 「천마총 놀이터」중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 땅 황토라 하면 알 굵은 육쪽마늘이며 편지지처럼 잎이 희고 넓은 겨울 배추를 자라게 하는 곳이지요 아리고 맵고 순하고 여린 것들을 불평 하나 없이 안아주는 곳 말입니다

해서 그쯤 가면 사람의 울음이나 사람의 서러움이나 사람의 분노나 사람의 슬픔 같은 것들을 계속 사람의 가슴에 묻어두기가 무안해졌던 것이었는데요

땅끝, 당신을 처음 만난 그곳으로 제가 자꾸 무엇들을 보내고 싶은 까닭입니다"

-「해남으로 보내는 편지」중


무언가를 묻어둔다는 건 영원한 제거가 아니다. “먼저 간 혼자가 아프게 스스로의 시선을 기다”리는 일이다. 그것은 묻힌 상태로 사라지지 않은 채 영원의 공간 속에 잔존한다. 「천마총 놀이터」의 화자가 묻은 것은 외로움인 것 같다. 수학여행에 가지 못한 화자는 홀로 놀이터에서 시간을 보내고 친구들이 "돌아오면 '경주는 많이 갔다 와봐서, 바다로 가족여행을 다녀왔어'라고 신발을 털며 말"하겠다고 다짐한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친구들은 돌아오지 않고 화자는 집으로도 천마총으로도 가지 못한 채 놀이터에 덩그러니 남아있다. 이는 어른이 된 화자가 기억 속에 묻어놓은 어린 시절의 한 장면을 떠올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화자는 이 장면을 두고 "먼저 가 있는" 어린 시절의 자신이 성인이 된 "스스로의 눈빛을 아프게 기다리는 일"이라고 설명하는 것만 같다. 유년 시절의 아픔은 몇 번을 건져 올려봐도 여전히 똑같이 아프며, 그런 상태로 영원의 공간 속에서 잔존하니 말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아픔은 어떻게 치유할 수 있을까?


시인은 「해남으로 보내는 편지」에서 그 실마리를 슬쩍 보여준다. 이 시의 화자는 "오랫동안 기별이 없는 당신을 생각하"며 "낮고 좁은 책꽂이에 꽂혀 있는 울음이 먼저 걸어나오"는 걸 보고 있다. 그 울음은 "흙빛 선연한 남쪽 땅으로" 간다. 그곳이 대체 어떤 곳이길래 화자의 울음이 그곳으로 걸어가는걸까? "그 땅 황토라 하면 알 굵은 육쪽마늘이며 편지지처럼 잎이 희고 넓은 겨울 배추를 자라게 하는 곳"이다. "아리고 맵고 순하고 여린 것들을 불평 하나 없이 안아주는 곳"이라 "그쯤 가면 사람의 울음이나 사람의 서러움이나 사람의 분노나 사람의 슬픔 같은 것들을 계속 사람의 가슴에 묻어두기가 무안해"지고 만다. 우리가 묻어둔 것을 손상 하나 없이 끄집어내 안아주는 곳인 셈이다. 그렇게 누군가 안아줄 때 우린 내밀한 아픔을 꺼내 보이고 말고, 비로소 그 기억으로부터 걸어나올 수 있게 된다. 그래서 화자는 "땅끝, 당신을 처음 만난 그곳으로” “자꾸 무엇들을 보내고 싶”어진다. 언 땅처럼 단단한 곳에 묻힌 아픔을 녹이는 건 곡괭이가 아니라 햇빛이다. 햇빛처럼 환하게 어루만질 때, 다그치지 않아도 내보이고 싶게 만들 때, 비로소 회복의 기회가 찾아온다. 다정한 사랑은 예전의 기억도 다른 관점으로 볼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누구나 그런 장소가 하나쯤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 깊게 묻힌 아픈 기억을 꺼내는 일만으로도 조금 더 괜찮아질 수 있다면, 우린 그런 사랑이 더욱더 필요하다. 시인에게 그곳이 해남이었다면, 난 그게 꼭 제주 같았다. (제주는 이제 힐링의 대명사라 이런 말은 식상하지만) 한 해 만에 다시 찾은 제주에서 나도 그런 품을 그리워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캄캄한 방안에서 박준의 시를 읽으며 사랑하는 사람들을 떠올렸고, 그 생각만으로도 조금 환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사람이든 장소든 사람을 살게 하는 건 언제나 그런 품이라고, 박준의 시는 말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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