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오스터 - 『달의 궁전』
일단 북미 대륙 끝에 이르자 어떤 중요한 문제가 풀린 듯한 느낌이었다. 그 문제가 무엇이었는지는 모르지만 그 대답은 이미 내 발걸음으로 틀이 잡혀 있었고, 나는 자신을 뒤에 남겼다는 것, 내가 이제는 예전의 나와 같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위해 계속 걷기만 하면 되었다.
제도권 내로 편입된다는 건 자신이 '예전의 나와 같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과 같다. 변화의 완수가 선행돼야 편입할 수 있단 뜻이다. 그러니 편입 과정은 그야말로 고군분투일 수밖에 없다. 날로 높아지는 취업 경쟁률 때문에 요즘 청년들은 더 고생인 것 같다. (내가 청년이라 하는 소리가 아니라 취업준비생들은 정말 살려고 발버둥 치고 있다) 그런 이들에게 이 책이 희망적인 위로가 되지 않을까.
대학을 졸업한 후 방황기를 맞아 노숙을 하거나 여러 가지 일을 전전하던 포그는 자신을 예전에 고용했던 노인이 실은 친할아버지임을, 그리고 어머니의 교수인 줄로만 알았던 이가 실은 친아버지임을 알게 된다. 이 얼마나 충격적인 사실인가. 심지어 어떤 이도 포그에게 의도를 갖고 접근하지 않았으므로 포그를 이끈 건 오로지 우연이었다. 이러한 전개가 관점에 따라서는 작위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 우연이 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연은 필연의 또다른 이름이다. 폴 오스터는 설득력 있는 문장으로 상황을 전개하면서, 여러 번 겹치는 우연을 어떻게 필연으로 해석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
포그는 자신의 부계가족을 만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의 임종을 맞이하고 갖고 있던 돈을 모두 도둑맞는다. 경제적 형편도, 어떤 인간관계도 결코 예전보다 나아지지 않았다. 그렇지만 포그는 차오르는 달을 보며 자신이 무언가 달라졌다고 느낀다. 여기서 이 소설의 필연이 빛을 발한다. 불행하고 음울하다고만 생각했던 우연이 다른 의미를 환기하는 순간이다. 지난한 곤혹을 겪지 않았더라면 포그는 달의 의미를 끝내 해석할 수 없었을 것이고, 그 의미를 알지 못한다는 건 여전히 내면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단 뜻일 테니, 과거의 가혹했던 우연은 지금 이 찬란한 필연을 이해하기 위한 과정이었던 셈이다. 이처럼 삶은 알 수 없는 우연이 만나 빚어내는 필연으로 이어지고, 미래를 볼 수 없는 인간은 그 필연성을 인지하고 나서야 과거에 자신이 통과했던 우연의 가치를 겨우 헤아릴 수 있다. 요컨대, 여태 포그에게 닥쳤던 여러 곤혹은 그를 세상으로 인도하는 일련의 과정이었다.
누구에게든 삶에 이런 순간이 온다. 지난 곤혹을 새로운 관점으로 읽을 수 있다는 건 비로소 자리를 잡을 준비가, 어른이 될 준비가 되었다는 뜻이다. 그러니 이 소설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건 고군분투하는 모든 이가 빛나는 달이라는 것 아닐까. 손톱만 한 달은 자신이 달인지도 모른 채 가느다란 빛을 발산할 뿐이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살을 채운 달은 동그랗게 차올라 충만하게 빛난다. 그렇게 자리를 잡으면 지난 고군분투가 마냥 고통스럽게 느껴지지 않을 테다. 폴 오스터는 그런 긴 시선으로 삶을 조망할 때 얻을 수 있는 희망을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