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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ickypinkpiggy Feb 03. 2022

사랑하는 이에게는 존중을 담아

이언 매큐언 - 『칠드런 액트』

강변의 들판에 내 사랑과 나는 서 있었지.
기울어진 내 어깨에 그녀가 눈처럼 흰 손을 얹었네.
강둑에 풀이 자라듯 인생을 편히 받아들이라고 그녀는 말했지.
하지만 나는 젊고 어리석었기에 이제야 눈물 흘리네.


아이들은 자연스레 부모의 규칙을 내면화한다. 그건 가정의 결속력을 높이고 사회성을 기르는 데에 도움이 된다. 그렇지만 아이가 어른이 되기 위해서는 내면화된 부모의 규칙을 파괴해야 한다. 부모가 보여준 세계는 아주 작은 일부분에 지나지 않을뿐더러 아이는 부모와 무관하게 자신의 정체성을 좇아야 하기 때문이다. 유의해야 할 건 그 과정을 통과하는 방식이다. 내면화된 규칙을 벗어던지고 자신의 정체성을 개발해나가는 과정은 필연적으로 의견 충돌이 따르기 마련이다. 폐쇄적인 가정일수록 불화가 클 것이며 아이 역시 기존의 규칙을 부수고 새로운 규칙을 따르는 데에서 오는 혼란이 있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생기는 불합리한 조치(비이성적인 통제와 폭력 등)를 완화하고 아동의 복지를 주장하기 위해서는 '아동법(children act)'이 필요하다. 이언 매큐언은 그 점을 법, 도덕, 종교, 사랑 등 여러 측면에서 다루며 아이의 성장과 어른의 역할을 조명한다.


애덤은 여호와의 증인인 부모 밑에서 자라 자연스레 그 종교에 입문하고 깊게 매료된다. 그런 종교적 신념 때문에 17세에 백혈병에 걸렸을 때도 수혈을 거부하고, 병원은 이를 고발한다. 생사를 오가는 시간 속에서 판사인 피오나는 애덤을 직접 만나 대화를 나눔으로써 애덤이 자신의 상황을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는지 확인한다. 이때 피오나는 격식을 갖춘 대화를 나누기보다 아이의 눈높이에 맞춰 대화하기를 택하며 함께 노래를 부르고 애덤이 쓴 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그 결과, 애덤이 자신의 상황을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음에도 "아동기 내내 강력한 하나의 세계관에 단색으로, 중단 없이 노출된 채 살아왔고, 그런 배경이 삶의 조건을 좌우하지 않았을 수는 없"다고 판결문에 적는다. 또한, "애덤의 복지에 더 도움이 되는 것은 시에 대한 사랑, 새롭게 발견한 바이올린에 대한 열정, 활발한 사고력 발휘와 장난기 많고 다정한 본성의 표현이며, 그리고 아이 앞에 펼쳐질 모든 삶과 사랑"이라고 말한다. 요컨대, "애덤은 그의 종료로부터, 그리고 자기 자신으로부터 보호받아야"하므로 수혈을 적법 행위라고 판결 내린다. 


한평생 애덤을 보호하던 튼튼한 울타리와도 같던 종교가 이제는 그의  삶을 위협하고 죽음을 종용하다니. 아이러니하다. 부모의 불완전한 세계관이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그 폐쇄성으로 말미암아 막대한 영향력을 얻는지 생각하면 소름 끼치기까지 한다. 그러니 좋은 부모가 되려면 자신의 세계관이 완전하지 않다는 걸 인정하는 겸허한 태도가 필요한 것 같다. 그러한 겸허함이 없다면 아이는 부모의 사랑을 잃을까 전전긍긍하며 자신의 권리와 삶과 복지를 쉽게 포기하는 사람으로 자랄지도 모른다. 아이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부모라면 그런 걸 원하진 않을 것이다.


애덤은 피오나와의 대화를 통해 여호와의 증인이 아닌 새로운 세상에 눈을 뜨고 그 매력에 흠뻑 빠진다. 자신의 정체성을 찾으며 자신만의 삶의 의미를 찾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애덤은 피오나가 알려준 예이츠의 시를 읽고, 바이올린을 연주하며 점차 건강을 되찾는다. 또, 피오나에게 연이어 편지를 쓰고, 자신을 만나 달라 간청한다. 그렇게 점점 애덤에게 마음이 끌리는 걸 느끼지만 한 번도 모험해본 적 없이 안정적인 삶만 살아온 피오나는 남편의 외도와 겹친 애덤의 편지에 혼란스러워한다. 그래서 어떤 답장도 쓰지 않고 안정적인 삶을 돌보려고 애쓴다. 


그렇지만 소설 말미에 다다라 애덤의 백혈병이 다시 도지고 이번엔 수혈을 거부함으로써 일종의 자살과도 같은 선택을 내렸음을 들었을 때, 피오나는 자신이 추구해온 '아동의 복지'라는 가치가 그저 명성을 위한 자기만족에 가까웠음을 깨닫는다. 그녀가 추구하던 빛나는 이성은 남편의 비이성적 행동 못지않게 한편으로는 취약한 불완전한 세계관이었다.  소설은 괴로워하는 피오나가 그녀의 수치심을 남편에게 고백함으로써 남편과 관계 회복의 초입새에 들어가는 것으로 끝난다.


어른이 되어서도 여전히 관계를 다루는 건 어려운 일이다. 나와 다른 타인의 세계관을 이해하는 게 어렵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해라는 건 영영 불가능한 건지도 모른다. 그러니 다른 의견을 대하는 태도로는 오직 존중만이 확실한 대안이다. 동등한 위치인 남편-아내의 관계도 이렇게나 어려운데 누군가를 양육해야 하는 부모-아이의 관계라고 쉬울 리 없다. 오히려 관계의 불평등 때문에 부모의 사상을 강요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니 나의 사랑이 연약한 이를 향할수록 더더욱 그의 세계관에 귀를 기울이며 마음을 열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우린 겨우 서로를 존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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