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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ickypinkpiggy Feb 06. 2022

당신이 상상한 최대한의 끝보다도 더 멀리 데려가는

파리 리뷰 단편집 - 『모든 빗방울의 이름을 알았다』

한때는 한국문학에  빠져서 해외문학을   읽었다. 번역된 문장의 느낌이 싫었고 나와는 너무나 멀리 떨어진 곳에서 발생한 이질적인 느낌도 싫었다. 그런데 문학을 읽을수록  새로운 맛을 구하게 됐고, 요새는 한국 문학보다도 해외문학을  많이 읽는 지경에 이르렀다. 새로운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특별한 경험이다. 특히 코로나19 외출이 제한된 요즘, 활자만으로도 다른 세계로 건너갈  있단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모든 빗방울의 이름을 알았다> 당신이 상상한 최대한의 끝보다도  멀리 데려가   있는 단편집이다.


<모든 빗방울의 이름을 알았다>는 2012년 미국에서 출간됐지만 한국에서는 작년 11월에야 출판됐다. 현역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열다섯 명의 작가들이 직접 선정한 문제적 단편들로 이뤄져 있으며, 모든 단편의 끝마다 각 작가들의 리뷰가 붙어있어 함께 감상평을 나누는 기분이 든다. 이런 구성은 매우 현명한 선택이었다. 자유로운 기준으로 선정한 '문제적' 단편이다 보니 기존 가치관과는 괴리가 있는 작품들이 더러 있기 때문이다. 또, 도전적인 작품 형식 때문에 재독 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이때 각 단편 끝마다 붙어있는 작가들의 리뷰는 훌륭한 이정표가 되어준다. 이 한없이 낯선 세계에서도 마냥 외롭지만은 않은 기분이다.


마음에 들었던 단편은 <어렴풋한 시간>, <궁전 도둑>, <하늘을 나는 양탄자>였다. 특히 그중 <어렴풋한 시간>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난 이 소설 전체가 관습적인 언어감각에 대한 거부로 읽혔다. 그러니 한 문장 한 문장 읽을 때마다 어딘가 긴장을 늦출 수 없었고, 그 덕분에 오감을 열고 읽는 충만한 경험을 할 수 있었다. 문체만으로도 누군가를 이토록 사랑할 수 있다니. 또, 작가가 표현하려는 세계는 얼마나 독창적인가. 작가는 우연히 태어난 인간이 숱한 우연을 돌파하는 과정 자체를 삶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이는 소설 말미에서 달리는 '맬'의 모습과 겹치며 죽음과 사랑이 공존하는 모순적인 우연을 태어나길 선택한 적도 없는 한 개인이 어떻게 돌파하는지 보여준다.


"맬은 기쁨 없는 삶에서 믿을 수 있는 것은 없으며, 죽음은 어디에나 있으므로 꼭 시체가 있어야 애도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배웠다. 복숭아씨에게 청산가리가 차오른다. 접은 냅킨에 수막염이, 젖은 샤워장에 소아마비가 있다. 영원은 저녁 공기 속에 있다."


<궁전 도둑>은 선생님과 제자들의 재회를 그린다. 한 학생의 부정을 묵인했던 선생님은 그 학생이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해 어떻게 국민을 기만하는지 목격한다. 그러나, 또다시 묵인한다. 이 작가는 선생님과 제자라는 구도를 통해 훈육의 지침을 어떻게 세울 것인지 질문한다. 더 나아가, 이는 역사가 지금까지 작동해온 방식에 대한 메타포로 읽히며 역사에 기록된 승자는 대다수가 위선자였고, 대중은 그에 대한 공모자이거나 무력한 반란자에 불과했음을 꼬집는다. 그러니 역사란 건 결국 '성격이 팔자인' 개인이 모여서 쓴 각자의 이야기가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굴러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디팩은 그런 말을 할 사람이 아니다. 한 사람의 성격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하늘을 나는 양탄자>는 어두운 마음을 환하게 밝히는 환상문학이다. 어렸을 때의 추억을 이렇게 아름답게 묘사할 수 있다는 게 경이롭다. 어린 시절, 누구나 하늘을 나는 양탄자에 비견되는 몽상적인 추억 하나쯤 있지 않을까. 이 소설은 그 푸르던 추억을, 푸르렀던 자신을 일깨운다. 잊고 있던 그 시절의 환한 감각이 갑자기 물밀려 들어올 땐 삶의 생기가 가득하다.


"그동안 나는 여름처럼 따뜻한 9월의 공기 속에서 초록색 사이에 거대한 모반처럼 반짝이는 붉은 나뭇잎의 얼룩을 보았다."


이 단편집은 꼭 그렇게 괜찮은 세계 하나씩 보여주며 독자를 매료시키는 힘이 있다. 어딘가 멀리 건너가고 싶은 이들에게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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