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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ickypinkpiggy Jan 18. 2021

몽상과 현실이 뒤섞이는 경계

밀란 쿤데라 - 『정체성』

  밀란쿤데라의 『정체성』은 개인의 고유한 정체성이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우린 얼마만큼 스스로가 감각하는 자신인지, 또한 얼마만큼 타인이 평가하는 자신인지 설명한다. 정체성은 형태가 없으며 관념적이다. 때론 무수한 사람과 구분되는 단 하나의 정체성이 실존하는지조차 확실치 않아 그 존재 여부에 대해서도 의문이 생긴다. 이 책은 그럼에도 ‘나’를 대변하는 무언가 있을 것 같다고 믿는 사람들을 위해 샹탈의 정체성을 크게 타인의 시선으로 구체화하는 부분, 개인의 의지로 형성하는 부분으로 나눠 이해를 돕는다.


  우선, 이름은 타인의 의지가 개입하며 개인의 정체성을 대변하는 표면적 지표다. 샹탈은 몽상인지 현실인지 분간이 어려운 런던의 집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한다. 그녀를 ‘안’이라 부르는 노년의 남성에게 샹탈은 ‘안’이 아니라 대답하지만, 정작 원래 이름은 기억해내지 못한다. 그러다 사랑했던 남자를 찬찬히 떠올리고, 그 사람의 입 모양으로 이름을 유추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이름을 불렀을 때 느꼈던 따스한 감각을 떠올리려 한다. 이는 타인이 개인의 정체성에 필연적으로 개입함을 드러낸다. 이름은 다른 사람에게 불리기 위해 창조된 문자이자 소리다. 다른 사람이 불러줄 때 비로소 빛날 수 있다. 아무도 이름을 불러주지 않는다면 샹탈처럼 금세 자신을 망각한다. 이처럼 이름은 부모님을 비롯한 타인에 의해 만들어져 평생에 이르러 관계 맺음의 최초 단계에 자신을 설명할 수 있는 가장 분명하고 간결한 단어가 된다. 요컨대, 이름이란 타의로 형성되고 타인의 발화로 그 가치를 다하는 정체성이다.


  정체성을 파악하는 방식 중 이름에 비해 더 내밀한 시각은 몸에 기초하고 있다. 몸은 가까운 타인만이 가닿을 수 있는 정체성의 일부다. 개인적이고 은밀하다. 일상에서 타인에게 내보이는 면면은 고작 얼굴, 목, 손뿐이다. 여름에 팔과 다리를 시원스레 내놓는다고 하더라도 구석에 작게 새긴 타투라든가 특이한 점의 위치라든가 하는 것은 옷에 의해 타자의 시선으로부터 격리되어 있다. 이렇듯 몸의 세세한 굴곡, 사소한 흉터, 부분 부분 바랜 피부 빛은 가까운 관계가 아닌 타자는 쉽게 알아챌 수 없다. 몸은 실체적으로 개인의 정체성을 드러내 보이지만 대중의 시야로부터는 가려진 개별적인 특성의 총체다. 옷 속에 몸을 숨김으로써 개인은 자신만의 개성을 무수한 타자로부터 지켜내고 자각한다. 샹탈은 런던에서 나체 상태로 다른 사람들로부터 도망 다닌다. 이는 자신의 정체성을 멋대로 변형하고 짓누르려는 타인의 시도로부터 끊임없이 자신만의 감각과 몸을 지켜내려는 행위다. 나체 상태에서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은 내밀한 정체성을 드러내는 데에 대한 거부감이며, 도망 다니는 행위는 이러한 폭력성으로부터 단절되고자 하는 의지의 표출이다.


  이는 장마르크가 샹탈에게 편지를 보내고 샹탈이 그 무명의 발신자가 장마르크인 것을 눈치채며 느꼈던 거북함과 맞닿아 있다. 알아채고서도 가만히 있는 장마르크의 침묵이 마치 자신의 내밀한 속마음까지 읽어낸 것 같아 감시당하고 있단 생각이 들었고, 잘 갖춰 입은 사람들 속에 홀로 나체로 남겨진 기분이었기 때문이다. 샹탈은 벗어날 수 없이 조여 오는 갑갑함을 느낀다. 그 결과 몽상의 공간 속 침을 흘리는 여자로부터, 노년의 남성으로부터 도망쳤듯 장마르크로부터 벗어나려 한다. 이는 장마르크가 사랑을 주려 했던 방식이 샹탈이 원하는 바와 달랐고 샹탈에 대한 몰이해가 그녀로 하여금 파리를 떠나게 한 것임을 암시한다. 장마르크의 몰이해는 이미 초반부에 드러난 바 있다. 장마르크는 해변에서 샹탈과 다른 여자를 착각했고 이는 그가 애인임에도 다른 여자들과 구분되는 샹탈의 독창성을 포착하는 능력을 지니지 못했음을 드러낸다. 작가는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사랑하는 여자와 다른 여자의 육체적 외모를 혼동하는 것. 그는 얼마나 여러 번 그런 일을 겪었던가! 그리고 항상 똑같은 놀람. 그녀와 다른 여자들의 차이가 그렇게 미미한 것일까? 이 세상 무엇에도 비교할 수 없고 그가 가장 사랑하는 존재의 실루엣을 어떻게 알아볼 수 없단 말인가.” 


  비단 장마르크뿐 아니라 많은 연인이 비슷한 처지에 놓여있다. 샹탈의 이름을 부르고 몸을 수없이 마주했을 장마르크조차 그녀가 느꼈을 감각은 절대 이해하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내밀한 정체성의 일부인 몸을 마주하더라도 여전히 정체성의 전체에는 도달할 수 없다. 아무리 사랑해도 가닿을 수 없는 개별적인 정체성의 공간이 있고, 그 공간은 영원히 불가해한 상태로 남는다. 장마르크는 샹탈을, 샹탈은 장마르크를 이해한다고 말할 수 없다. 서로를 아무리 사랑하더라도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몸을 바라보며 이름을 부르는 것뿐이다. 이름과 몸, 씁쓸하지만 그것이 타인으로서 인지할 수 있는 최대한의 정체성이다.


  한편, 정체성을 구성하는 자기 관찰적 관점은 런던 행 기차에서 를뢰르와 부인이 나눈 대화에서 드러난다. 부인은 “그렇다면 삶의 위대함은 어디에 있단 말이에요? 우리 운명이 먹는 것, 성교, 생리대에 달렸다면 우리는 누구일까요? 그리고 우리가 고작 이런 것만 할 수 있다면 흔히 말하듯 우리가 자유로운 존재라는 사실에 어떤 자부심을 느낄 수 있을까요?”라고 묻는다. 부인은 ‘너 자신을 알라’던 서양 형이상학이 그랬듯 진정한 자아의 탐색을 추구한다. 이에 대한 답변으로 를뢰르는 “자유라? 당신의 참혹한 현실을 겪으면서 당신은 불행할 수도 있고, 혹은 행복할 수도 있지. 당신의 자유란 바로 그 선택에 있는 거야. 다수의 용광로 속에 당신의 개별성을 용해하면서 패배감을 맛보느냐, 아니면 황홀경에 빠지느냐는 당신 자유야. 우리 선택은 바로 황홀경이지, 부인.”이라 말하며 쾌와 불쾌를 야기하는 선택 자체로 개인의 정체성을 대변할 수 있음을 드러낸다. 부인이 자아 탐구에 집중하여 사유하는 것과 대조적으로, 를뢰르는 ‘활동 자체에 집중해야 자아를 만들어내고 발견할 수 있다’는 니체의 관점과 맞닿아 있다. 또한, 정체성은 선택을 통해 감각하고 다시 선택을 이어가는 행위의 반복에 기초함을 보여준다. 이와 같은 맥락으로 장마르크가 샹탈이 헤매던 런던의 집에서 쫓겨난 장면을 해석할 수 있다. 물론 그즈음에서 작가가 현실과 꿈의 경계를 흐려놓기 때문에 장마르크가 쫓겨났던 집이 샹탈이 헤매던 집이 아닐 수도 있다. 마치 해변에서 샹탈과 다른 여자를 혼동한 것처럼 장마르크는 줄곧 샹탈에 대한 몰이해를 보여줬으므로 잘못된 공간에서 샹탈을 찾고 있었단 점도 어느 정도 설득력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장마르크가 쫓겨났던 공간이 샹탈이 감금되어 도주하려 했던 그 집이었다면, 이는 결국 정체성이 타인의 개입보다는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 더 구체화되어 발견될 수 있는 것임을 암시한다.


  비록 장마르크는 그 집에서 쫓겨나 샹탈을 구해내는 데엔 실패해 벤치에 앉아있지만, 고통스러운 꿈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샹탈을 현실로 돌아오게 하는 데에는 성공한다. 샹탈은 타인이 마구잡이로 헤집고 다니는 공간을 다 둘러보기도 전에 잠에서 깨어난다. 정체성 탐색 과정을 무수한 방이 있는 공간 속에서 헤매는 과정으로 묘사했다는 점은 결국 개인의 자아탐색 노력이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채 허물어질 수밖에 없는 필연성을 드러낸다. 한 개인이 평생 확인할 수 있는 자신의 정체성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 한계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정체성의 일부는 몽상 속에 존재한다는 점에서 더욱더 그렇다. 책의 끝부분에서 작가는 “누가 꿈을 꾸었는가? 누가 이 이야기를 꿈꾸었는가? 누가 상상해 냈을까? 그녀가? 그가? 두 사람 모두?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위해서?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그들의 현실 속 삶이 이런 뻔뻔한 환상으로 변형되었을까? 열차가 영불해협 아래로 들어갔을 때? 그보다 일찍? (......) 현실이 비현실로, 사실이 몽상으로 변했던 정확한 순간은 언제일까? 그 경계선은 어디에 있을까? 어디에 경계선이 있을까?”라고 독백한다. 이는 장마르크가 샹탈에게 편지를 보내지 않았더라면, 샹탈이 필적 감정소에 그 편지를 의뢰하지 않았더라면, 혹은 샹탈이 런던으로 떠나지 않았더라면 다르게 정의되었을 샹탈의 정체성을 암시한다.


  정체성은 절대적인 특성이 아니다. 선택에 따라 달라지는 상대적인 특징이다. 선택을 내리고 그에 따른 대가로 수많은 감정을 느끼는 삶을 통해 정체성을 구체화해나간다. 특정한 선택을 반복하며 정체성을 형성하는 것은 그대로의 그 사람이고, 또 다른 선택을 내렸다면 가졌을 다른 형태의 정체성을 주조해 다른 공간 속 다른 모습으로 사는 것 역시 그 상황 속의 그 사람이다. 즉, 선택에 따라 정체성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선택에 따른 무한한 가능성, 즉 내가 될 수 있었을 수만 가지의 정체성이 몽상 속에 존재한다. 또한 선택할 수 있던 것이 오직 한 가지였기 때문에 현재 정체성은 실재로서 현실에 존재한다. 예를 들어 샹탈은 필적 감정소에 편지를 의뢰할지 안 할지 선택할 수 있었으며 런던으로 떠날지 파리에 남을지 고를 수 있었다. 샹탈이 책의 내용과 다른 결정을 내렸더라면 샹탈의 정체성은 달라졌을 테고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인생이 선택의 연속이란 점을 고려할 때 정체성은 늘 이름과 몸만이 어느 공간에 있든 같은 값을 가지고, 다른 모든 것은 가변적인 채로 몽상과 현실이 뒤섞이는 경계에 머무른다. 기회비용이 존재하는 몽상과 지금까지 선택한 현실이 포개져 정체성을 대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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