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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ickypinkpiggy Jan 19. 2021

내가 볼 수 있는 각도만큼의 너

이기호 - 『김 박사는 누구인가』 中 「탄원의 문장」

  사람은 자신이 보고 싶은 면만 본다. 이 소설에는 자신을 좋아해 주는 사람만 좋아하는 교수의 세계가 나온다. 하지만 사람의 내면이나 진실은 그렇게 납작한 시각의 창으로는 닿을 수 없다. 그 너머를 상상할 수 없기에 실체적 본질에 가까워질 수 없다. 감정이 개입하면 볼 수 있는 면은 축소된다. 사람이든 사물이든 본질적 실체라고 하는 것은 이를테면 반듯한 구의 면면이 이리저리 쓸려, 제각각의 모양인 다각형이 입체적으로 둘러붙어 있는 다각면체의 형태다. 한 면만 보고서는 그 다각면체의 전체를 파악할 수 없고 다종다양한 모양의 면에 온전히 도달할 수도 없다. 애초부터 그 다각면체를 정확히 이해하겠다는 것은 오만이다. 결국 본질적 실체에 도달하고자 노력하는 사람도 저마다의 틀의 크기와 모양에 딱 들어맞는 면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가능한 한 멀리 나가 그런 실체에 최대한 가깝게 도달하여 각진 실체의 면면을 살펴보고, 진실에 가까워지고자 하는 가장 정형화된 노력의 양식이 법이다. 물론 법조차도 완전히 도달할 수는 없다. 많은 사람에게 공감을 얻어 구조화된 모양과 크기의 틀로 본질적 실체의 진실에 근접하고자 할 뿐이다. 이를 통해 법은 이미 보편적으로 인정된 최소한의 약속을 규정한다.


  사람은 자신만의 틀로 진실에 근접하려 한다. 소설 속 최의 ‘이 선배’와 교수의 ‘애제자’와 법정의 ‘피고인’이 P라는 동일 인물임에도 다르게 묘사되는 까닭이다. 사회적으로 공감대를 얻지 않고 사사로운 주관을 개입해 판단한 최의 ‘이 선배’와 교수의 ‘애제자’가 법에 비해 열등한 판단은 아니다. 그저 법과 다른 차원이라 제도 내에 편입되지 못한 방식으로 실체에 접근해 법적 관점에서 어느 정도 누락되고 배제되었을 뿐이다.

 

  또한, 법으로 판단할 수 있는 ‘피고인’에 대한 사실과 ‘이 선배’와 ‘애제자’로 묘사되는 사실은 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소설 속 P는 문학이 법에 선행한다고, 법에 후행하는 행정학과를 관둔 이유를 설명한다. 하지만 현실에서 문학과 고발의 문장이 진정 법의 변화를 이끄는 경우와 그 역의 경우 중 어떤 사례가 더 빈번할지 의문이 든다. 문학은 사회의 변화를 예리하게 포착해낸다. 사람들의 가치관은 시대에 따라 달라져 홍상수 감독 말마따나 시대의 도덕이 ‘그때는 틀리고 지금은 맞는 것’이 되어버린다. 하지만 법의 변화는 가치관의 변화 속도보다 느려 문학과 아예 동떨어져 진실의 실체를 왜곡하거나 사회적 합의를 궤변 속에 남겨놓기도 한다. 여전히 법 감정의 변화와 문학이 바꿀 수 없는 개별적인 법의 공간이 잔존한다. 즉 문학은 행했으나 법은 행하지 못했기에 문학은 법에 선행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별개로 행하는 것이다.


  이처럼 탄력적이지 못한 법이 더는 사회의 보편적인 도덕관념에 부합하지 않아 사람들이 지켜야 할 최소한의 약속을 대변하지 못한다면 법으로서의 실효성은 신뢰를 잃는다. 진실에 도달하고자 하는 개인의 주관적인 틀보다도 본질적 실체에 도달하지 못하는 낡은 문장이기 때문이다. 법을 소위 최소한의 도덕이라 부름에도 불구하고 최고선이 아닌 이유다. 또한, 소설 속 ‘이 선배’와 ‘애제자’로 묘사되는 사실이 탄원으로서의 적합성은 차치하더라도 모두 법의 관점보다 질적으로 열등하지 않은 이유다.


  ‘이’의 사전적 정의는 ‘말하는 이가 생각하는 대상을 가리키는 지시대명사’이다. 소설 속 ‘이 선배’는 법정과 교수에게서 배제된 생각이다. 박희수가 직접 겪고 느낀 P에 대한 주관적 감상이고, 최가 직접 겪은 P에 대한 판단과 고구마 밭에 찾아가는 등의 노력을 통해 유추해낸 의미다. 각자 겪은 사건을 토대로 진실에 근접하고자 하는 저마다의 노력이다. 소설 속 판결문을 고려했을 때 결국 P의 본질은 ‘애제자’로서 보여 온 예바름보다 최와 박희수에게 휘두른 비겁한 폭력성에 더 가깝다. 요컨대, P는 힘의 정도에 따라 교수와 여자 친구와 후배에게 이중적인 태도를 유지했고 그것이 P의 실체였다.


  그렇다면 누군가의 본질에 근접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우선, 잘해주면 된다. 마음속에 있는 사랑을 모두 끌어모아 탈탈 털어 있는 그대로 베풀면 마치 연인 관계에서 누가 더 좋아하느냐에 따라 권력이 나뉘듯 나와 상대방의 역학 관계에 새로운 전환점이 생긴다. 그 전환점 이후 우리의 관계가 상승곡선을 탈지 하향선으로 바닥을 길지를 지켜보면 된다. 상대방도 나에게 호감이 있고 내가 사랑을 더 베풀고 싶을 만큼 그 본질이 나의 취향과 맞닿아 있으면 일반적으로 관계는 상향선을 그린다. 사랑은 받을수록 사랑스러워지는 법이고 사랑스러운 사람에겐 더 사랑을 주고 싶은 법이다. 상대방이 별 반응 없이 날름날름 잘 받아먹는 것도 괜찮다. 자신에게 유리한 상황에 만족스러워하는 건 자연스러운 반응이고 내가 좋아하는 만큼 날 좋아하지 않는 것은 나의 영향력 밖의 일이다. 자존감이 떨어져 속이 좀 쓰리겠지만 사랑을 주고 싶어서 줬고 잘 받아줬으니 고마워하면 된다. 하지만 잘해주자마자 우쭐해져서 우월감에 취해 마음을 착취하려 하는 건 문제다. 보통 이런 사람을 만나면 롤러코스터와 같은 감정의 폭을 감당해야 하기 때문에 토사구팽의 개가 이런 심정이겠구나 하며 사랑을 그만 주면 된다.


  소설 속 인물 간 관계를 고려해봤을 때 후배인 박희수나 여자 친구인 최는 어땠을지 모르니 차치하더라도 교수는 분명 P에게 잘 대해줬다. 오피스텔을 함께 쓰고 술을 마시거나 책을 읽고 온정을 나누며 줄곧 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럼에도 교수는 P의 본질은 깨닫지 못했다. 이는 처음부터 권력 관계가 달랐기 때문이다. 권력이 높은 사람에게 잘 보이고 싶어 하던 P가 제법 괜찮은 수완으로 사회생활을 한 것이다.


  그러므로 잘해준 다음에도 싹싹하게 사랑을 내비치는 사람이라면 약자를 어떻게 대하는지 봐야 한다. 이 지점에서 밑바닥이 드러난다. 약자를 함부로 대하는 건 아주 쉽고 때로는 편리하다. 재바른 행동으로 잘 보이기 위해 애쓸 필요도 없고 가끔 부도덕한 행동을 하며 감정 쓰레기통으로 이용해도 대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 간교함이 몇몇 사람들에게는 있다. P가 후배나 여자 친구에게 손찌검했듯 사람의 본질이 투명하게 드러나는 순간이다.


  물론 사람은 모든 사람에게 착할 수 없다. 동일 인물에 대해 누군가는 분명 나빴다고 생각할 것이고 누군가는 더할 나위 없이 착하다고 판단한다. 앞서 말했듯 사람은 자신이 보고 싶은 면만 보기 때문이다. 그 무엇도 한 사람의 본질적 실체에 온전히 도달할 수 없다. 다만 위에서 소개한 두 가지 실험을 통해 본질이 잘 발현되는 상황을 조성할 수 있을 뿐이다. 추측하건대 ‘사랑을 준 약자’였던 전 여자친구 최가 P의 본성을 가장 빨리 알아챈 것도 그 조건을 만족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 여자친구 최는 후배 박희수가 쓴 ‘이 선배’의 의미를 ‘내가 겪어보니 넌 딱 그런 애임’으로 치환한 후 이미 겪어 알고 있는 ‘그런 애’로서의 P의 성격을 고려해 박희수가 P에게 무슨 일을 당했을지 빠르게 유추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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