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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낫배드파더 Jan 11. 2023

아이 혼내기 전, 꼭 해야 할 질문

최근 아이와 수채화로 그림을 그리다가 혼을 낸 적이 있었다.  아이가 붓을 종이에 세게 내리치면서 물감이 사방으로 튀었다. 여기서 멈추지 않고 아이는 팔레트에 담긴 물감을 종이에 쏟았다. 나는 "하지 마. 그렇게 하는 거 아니야"라고 외쳤다. 아이는 시무룩해지더니 붓을 툭 던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물감이 내 옷 여기저기에 튀었다. 덩달아 내 마음에도 먹구름이 자욱이 끼었다.




아이가 두 돌이 지나면서 "안돼"라는 말을 하는 빈도가 전보다 열 배는 늘었다. 아이의 고집은 전에 경험한 적 없을 정도로 세졌다. 자아가 강해지면서 생기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라지만 적응하기 쉽진 않다. 아이와의 관계에 어느 정도 적응했다 싶었는데 또 변화가 시작된 것이다. 아, 다시 원점이다.


얼마 전부터 아이는 작은 의자나 받침대를 이용해 책장, 식탁, 부엌에 있는 물건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전에 탐구하지 못했던 집안 곳곳 미지의 영역에 흥미가 생긴 것이다. 잠깐 한눈팔고 있으면 집안은 곧 난장판이 된다. 두 돌 전후에는 "하지 마" "가지 마" "먹지 마"라고 할 때 곧잘 듣는 것 같더니 이제는 못 들은 척하거나 장난스럽게 웃으면서 말을 무시한다.


곧 쫓아다니며 안된다는 말을 하는 게 별 소용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아이에게 금기는 곧 판도라의 상자였다. "안돼"라는 말은 호기심을 건드리는 버튼이나 다름없었다. 유아용 자동차에 올라가서 우뚝 서길래 "위험하니까 내려오자"라고 말했더니, 아이는 "나는 장난꾸러기"라고 외쳤다. 내 자식이 맞나 싶다. 환장할 노릇이다. 그렇다고 제멋대로 하도록 내버려 둘 수도 없는 노릇이고. 다시 정신적 공황 상태에 빠졌다. 아, 새로운 난제를 어떻게 풀어나갈 것인가.




상대방이 이해되지 않는 행동을 할 때 시도할 수 있는 유용한 방법 중 하나는 '상대의 신발 신어보기'다. 타인의 입장이 되어보면 의외로 실마리가 쉽게 풀릴 때가 있다. 물론 아직 만 세 살이 되지 않은, 스스로 "장난꾸러기"라고 외치는 사내아이의 심리 상태를 이해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대신 나는 나의 어린 시절 중 부모님에게 혼났던 기억을 떠올려봤다. 그때 나의 심리 상태가 어땠는지 곱씹어봤다. 사실 이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는데, 결과적으로는 '유레카'라는 외침이 나왔다.


아마 4~5살 때쯤이었을 거다. 우리 가족은 원룸에 사글세로 살고 있었다. 어머니가 몇 년 동안 모은 돈으로 아버지에게 자동차를 사줬다. 좋은 차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인생 첫 차였다. 아버지는 차를 자기 몸만큼이나 소중히 여겼다. 그리고 나는 그 차에 경악을 금치 못할 짓을 저질렀다.


지금도 왜 그랬는지 정확한 기억은 나지 않는다. 집 근처 바닥에 동네 아이들이 '1+1=4' 같은 식으로 돌로 낙서해 놓은 걸 봤던 장면이 떠오른다. 나 역시 바닥에다 낙서를 했다면 참 좋았을 텐데, 무슨 생각이었는지 돌로 아버지 차 옆에 '1+1=4'라고 낙서를 했다. 회생불가능한 낙서였다. 뒤통수에 소름이 오소소 돋게 하는 '끽끽' 소리와, 거친 돌멩이가 매끄러운 차 문 표면을 긁어내려 가는 촉감이 지금도 선명하다.


어머니에 따르면, 당시 아버지는 나를 호적에서 판다고 그랬다는데 다행히 이 말을 직접 듣진 못했다. 이 일로 매를 맞거나 크게 혼난 기억은 없다.  너무 많이 맞아서 안 좋은 기억은 잊어버린 것일 수도 있고. 나중에 어머니는 "그나마도 틀리게 계산해서 아버지가 어이없어했다"라고 말했다.


왜 그랬을까. 나 자신도 믿기 어렵지만, 당시 그 행동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던 기억이 난다. 만약 누군가 미리 "아빠는 자동차를 거의 너만큼 소중히 여긴단다. 그러니 차에 낙서를 면 아빠가 엉엉 울지도 몰라"라고 꼬마가 이해 가능한 수준에서 설명해 줬다면, 절대로 낙서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가 돌로 새 차에 '1+1=4'라고 쓰는 일을 예상할 수 있는 어른은 거의 없고, 그 일은 그렇게 일어나 버렸다.




아들은 그때의 나보다 훨씬 더 어리다. 또래보다 말을 빨리 시작해 말귀를 잘 알아듣는 편이지만, 어느 정도로 이해하는지 정확히 알기는 어렵다. 그렇더라도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다. 문제가 생겼을 때 최선을 다해 눈높이를 맞춰서 친절하게 설명해 주는 것이다. 감정을 배제하고, 가장 쉬운 말로, 포기하지 않고 말해주는 일 말이다.


아이의 신발에 나를 맞춰보면서 결심한 게 있다. 아이를 혼내거나 뭔가를 하지 못하게 막을 때 반드시 '정당하고 합리적인 이유가 있는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보는 것이다. 만약 쉽게 설명할 수 있는 합당한 이유를 찾지 못한다면, 혼내려는 충동은 내 편견, 선입견 때문이거나 혹은 내 편리를 위해서 생긴 것일 가능성이 높다. 합당한 이유가 떠오르지 않을 때는 차라리 아이를 그대로 지켜보는 편이 낫다. 그러다 이유가 떠오르면 나중에라도 말해주면 되고, 아니면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건 아이에게 절대로 거짓말을 하거나 임기응변식으로 둘러대는 말을 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부모라면 누구나 쉽게 상황을 모면하고 싶은 충동이 있다. 말 끝마다 "왜요?" "안 할래요" "싫어요"라고 피곤하게 구는 아이의 입을 얼른 다물게 하고 싶은 마음이 어찌 없겠는가. 잠깐의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과장을 하거나 거짓말을 꾸며내기도 한다. 하지만 아이는 부모의 말을 그대로 믿는다. 그 영향력을 과소평가해선 안 된다. 이해하기 쉬우면서도 진실된 말을 해줘야 한다.


감정이 격해진 상태에서 아이를 혼내선 안 된다는 점도 짚어야겠다. 혀를 다스릴 수 없는 상황이라 판단될 때는 마음 가득 떠오른 감정의 찌꺼기들이 가라앉을 때까지 차라리 기다리는 편이 좋다. 길거리에서 아이를 향해 흥분한 채로 거친 말을 쏟아내는 부모들의 모습을 떠올려 보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나는 아이를 훈육해야 할 상황이 오면 '뿌리 깊은 나무'를 머릿속으로 상상한다. 물론 가끔씩 태풍이 그 나무를 뿌리째 뽑아가는 경우도 있긴 하다.


될 때까지 하는 인내심도 꼭 필요하다. 한 번 말한다고 들으면 애가 아닐 것이다. 그 아이는 오히려 상담을 받아야 할지도 모른다. 이 나이대의 대부분 아이들은 부모의 말을 한 번에 따르지 않는다. 아이가 말을 듣든 듣지 않든 눈을 마주치며 조곤조곤 꾸준히 반복해서 알려줄 수 있어야 한다. 가장 중요한 건 아이가 내 말을 듣고 이해해 주리라는 믿음을 가지는 것이다.




수채화를 그리다 아이에게 소리쳤던 그날 밤, 내 행동을 곱씹으면서 '합당한 이유'가 부족했다는 걸 깨달았다. 아이는 물감을 종이에 흩뿌리면서 잭슨 폴록처럼 표현을 하고 싶었는데(미술 천재인가...), 아빠는 소란을 피운다고 생각하고 막아섰던 것이다. 옷과 책상, 다른 물건에 물감이 튈 게 염려됐다면 신문지를 충분히 깔고 아이에게는 버려도 상관없는 옷을 입혔으면 해결될 문제였다. 이날 아이 행동을 제지할 합당한 이유는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았다.


혼내기 전 '합당한 이유가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습관을 들이면서 "안돼"라고 외치는 횟수는 확실히 줄었다. '말빨'도 이전보다 더 잘 먹히는 것 같다. 아이에게는 충동적으로 화를 내는 부모보다는 눈을 마주치며 끝까지 차근히 합리적으로 설명하는 부모의 말이 더 효과적이라는 걸 임상으로 경험하고 있다.  


이 글의 표지 사진은 아이가 마음껏 그리도록 놔둔 결과물이다. 아이가 물감이 이리저리 튀도록 붓을 내려칠 때마다 입이 근질거렸다. 꾹 참고 내버려 뒀는데 아이는 의외로 주변을 많이 더럽히지 않고 그림을 그렸다. 만족할 만큼 충분히 그린 아이는 곧 스스로 붓을 내려놨다. 그리고는 "정말 재미있어요"라고 말했다. '아, 이렇게 하면 되는 거였구나'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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