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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방관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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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정 Mar 27. 2023

방관의 이해

방관일지 EP.0

    N은 얼마 전 이런 생각을 문득했다. 사실 여기가 사후세계는 아닐까. N은 다소 복잡한 감정을 붙잡고 생각을 이어나갔는데, 일렁이는 감정선과는 다르게 명쾌한 명제를 세울 수 있었다. 


    N은 전생에 큰 죄를 지은 죄인이었고, 그 벌로 전생의 기억을 잃은 채 살아가고 있다는 것. 만약 이번 생에 죄를 짓지 않으면 지금의 기억을 가진 채 새로운 삶을 살게 될 것이고, 또 다른 죄를 짓게 된다면 N이라는 존재를 지운 채 다른 이름으로  새로운 삶을 살게 될 것이라는 결론. 결국 N은 사후세계의 무한함이 이 세계의 원리라는 생각까지 도출해낸 것이다. N은 다시금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기억을 잃은 채 이곳에 서 있는가.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막혀 난관을 겪고 있는 것이었다. N은 자신의 사후세계론이 비현실적이고 쓸데없이 받아들여질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N은 아무런 말도 남기지 않은 채 거리를 걸어갔다. 그치만. 이렇게 사는 게 벌이 아니라고?


    N은 찬 공기를 마시면서도 계속 생각의 꼬리를 물었다. 이번 생을 잘 마치고 나면 지금의 기억을 잊지 않을 수 있을까. 역시 이미 틀린 거 같다는 결론이 나왔다. N이라는 존재가 부정당하는 느낌. 한 사람의 일생이지만 일회성 소모품이라고 생각하니 여간 씁쓸하지 않았다. 세상에 하나뿐인 나를 소중히 여겨야 된다는 말. 나는 하나니깐 일회용이라는 소리와 일맥상통하는 것 같았다. 그렇다 N은 일회용. N이라는 비관적인 시선의 푸념이었다. 


    N은 열세 살 무렵 죽음을 이해했다. 차갑게 굳은 손. 딱딱한 피부. 파랗게 질린 얼굴. N은 허벅지 안쪽을 멍이 들 때까지 꼬집고, 입술을 질끈 물며 눈에 힘을 주었지만 참을 수 없었다. 손끝에 닿는 촉감은 시린데 뺨 위로 흐르는 액체는 이상하리만치 뜨거웠다. 삼투압의 영향이었을까. 그때부터 액체가 한기를 내뿜으며 응고하더니 완전히 얼어버리고 말았다. 


    N은 열 살 무렵 죽으면 어떻게 되는지에 대해 생각했다. 주변엔 죽으면 부활 버튼을 눌러야 한다는 아이들만 가득했고, N도 실없이 웃으며 뛰어다녔다. 그러다 천둥번개 소리가 울려 퍼졌고, N은 이마를 붙잡고 뒤로 쓰러졌다. 그날 N은 이마에 주먹만한 혹이 솟아났다.


    N은 열여덟 살이 되던 해에 흥미로운 말을 듣게 되었다. 너넨 죽으면 어떻게 될까 이런 생각 안 하냐? 이 말을 뱉은 장본인은 놀랍게도 국어 학원 원장 선생님이었고, 그만둘까라는 고민이 한창이던 찰나에 N을 붙잡은 말이었다. N은 교실 안을 둘러봤고, 선생의 말을 비웃으며 무슨 소리냐고 웃는 시원찮은 녀석들이 전부였다. 심지어 자신을 학원으로 끌고 온 장본인조차 피식거리고 있었다. N은 살고 싶었다. 비관적이지만 생존본능을 통해 발현된 비관이었고, 가장 궁지에 몰려 살아보겠다는 발악이 삐딱한 시선이 된 케이스였다. 그렇기에 죽고 싶단 생각을 단 한 번도 해볼 여유가 없었다. 하지만 고찰은 또 다른 문제였다. N은 국어 학원이 유익하긴 했다는 생각을 했다. 적어도 자신을 드러내면 안 될 거 같다는 또 다른 확증을 얻었으니깐.


    N은 방관자 포지션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의 방관은 악행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며 축복을 마요네즈에 푹 삶는 행위였다. 바라는 것과 다르게 방관은 N에게 최적화된 생존방식이었다. 알고 있어도 모른 척하고, 몰라도 아는 척하며 자리를 벗어나고, 멀어지면 끊임없이 바라보며 홀로 이별하며 잊어버리는 것. 비겁하지만 고혹적인 방식이었다. 방관은 벗어날 수 없는 마약이었다. 


    N은 자신의 방관을 원망한 적이 많았다. 그로 인해 모든 걸 잃고 앞으로 걸어갈 때도 알 수 없었다. 방관으로 잃고 홀로 가는 행위가 방관이라는 것을. 방관에서 피어난 방관이 아픔을 낳았고 그 아픔이 번져 마블링을 한껏 더럽혔다. N은 그걸 깨닫기까지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다며 자책했다. 이미 현실은 돌이킬 수 없었고, 손을 뻗는 순간 자신이 가해자로 돌변하게 될 것을 알았다. 그 무렵부터 원인을 알 수 없는 가슴 통증을 앓았다. 


    N은 물리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의 연결고리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N은 스스로를 방관했다. 나는 괜찮은 데라는 말이 습관처럼 튀어나왔고, 나는 원래라는 말도 버릇처럼 뱉었다. 


    N은 생각했다. 누구나 이런 순간들이 있었을 것이다. 내가 이렇게 했으면. 혹은 내가 이렇게 안 했으면. 후회와 아쉬움이 가득했던 순간들. 찢어지는 가슴을 부여잡고 펑펑 우는데 행복하게 고개를 들어야 하는 순간들. 우리의 사후세계는 이렇게 시작됐을까. 지금은 너무 힘들지만 나중을 위해 참겠다는 변명. 힘들어질 걸 알지만 견뎌서 이기겠다는 객기. 앞만 바라보고 가겠다며 가시덤불로 뛰어드는 고집. 우리의 죄명은 방관이며, 방관으로 일어난 것들.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방관자가 감당할 파도. 지켜보기만을 원했기에 감당할 각오가 된 너울. 


    N은 이런 걸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니었다. 다 이렇게 사는데 너만 왜 그래. 아니다. N이 건네는 위로는 닿지 않는 어딘가에 존재했고, 존재했을 것이었다. 위로받을 만큼 받았는데, 아플 만큼 아팠는데. 아직도 더 많이 위로받고 더 많이 아플 날들이 진절머리가 났다. N의 상념이 끝나는 순간은 결국 시작이었다. 사후세계를 무한정 돌고 있구나. 


    N은 꿈에서 깰 수 없었다. 


    N은 행복한 순간이 꿈의 일부이며 조금 더 길게 꾸기를 바랐다. 하루하루 행복한 꿈을 헤집고 다니다 보면 출구를 잊을 거라고 생각했다. N은 길 잃은 척을 시작했다. 꿈의 끝자락을 보았지만 고개를 돌렸다. 나가기 싫었기 때문에. 계속. 조금 더 길을 헤매고 싶었다. 지금 이 순간 꾸고 있는 꿈에서. 


    N은 자신도 모르게 방관하고 있었다. C의 삶을. 


    N은 자신이 방관해온 것들을 정리하기로 마음먹었다. 근사한 한 권의 책이 되기를 바라며. 마주 보지 않았던 것들을 마주 보기로 하였다. 오히려 머리가 맑아졌다. 고민할 필요 없었다. 방관으로 잃었다면 그대로 N을 잊고 살기를. 잊어도 괜찮으니 행복한 꿈에서 허우적대기를. 우울한 나날들을 삼키며 눈을 반짝이길. 아플 거다. 부담스럽고 힘들 거다. 눈물이 멈추지 않을 거고, 너무 쓰려서 다 뱉어낼 수도 있다. 침몰하지 않는다면. 고개를 계속 숙인 채 머무르지만 않을 거라면. 내가 네 앞에 나타날 것이다. 미안하다는 말 대신 고맙다는 말을 건네며. 


    N은 기나긴 방관을 시작했다. 스스로에게 약속했다. 난 오늘도 멍청해서 모를 거라고. 저만치 떨어져 들여다볼 거라고. 그러면서 품에 안은 낡은 노트 하나를 쓸어내렸다. 귀찮을 거야. 피곤할 거야. 힘들 거고. 그래도 해야만 해.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깐. 


    N은 떨리는 마음으로 노트 정중앙에 글씨를 새겨 넣었다. 방관일지. 지독하게 비관적인 N과 다 괜찮다며 다독이는 모습이 인상적인 C. 그리고 웃어넘길 수 있는 우리. 아이러니하게 모두 같은 시간 속에 존재하는 것. 


    오늘도 수고했어. 

    우리 모두 내일은

    어제의 나보다 행복하고, 내일의 나보다 불행하자. 





-방관일지 EP.0 'N'-




https://www.youtube.com/watch?v=hmOOkmynj4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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