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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방관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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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정 Apr 01. 2023

그 해 여름, 초록빛 땀방울과 춤추던 낡은 이어폰

방관일지 EP.1


    결론부터 말하자면, N은 여름이 싫었다.


    티끌 한 점 없이 맑은 하늘. 찌르르. 찌르르. 귓가에 선명하게 들려오는 풀벌레 소리. 길게 늘어진 그늘 사이로 몸을 누이면, 볕뉘를 제치고 뺨 위로 엉금엉금 기어 오는 미지근한 바람. 여리여리한 초록색과 쨍한 하늘색이 어울리는 계절. N은 그런 계절에도 눅눅한 방안에만 처박혀 있었다. 여름의 산뜻함은 자신처럼 음침한 녀석과는 어울리지 않는 계절이라고 생각했고, 무엇보다 타는듯한 더위 때문에 계절의 분위기고 뭐고를 떠나 방 밖으로 한 발자국이라도 나간다면 기절해버릴 것만 같았다. 그래서 N은 여름이 싫었다.


    그런데 정작 진짜 문제는 가까이에 있었다. 그 해 여름은 유난히도 더웠고, 놀랍게도 집에 에어컨이 없던 해였다. 살인적인 더위는 집안에서 고독사할 것만 같던 재수 없는 생물을 집 밖으로 이끌어내기에 충분했다. 고릴라가 떨어져 나간 키플링 가방. 돼지라기엔 묘한 이질감이 드는 생물이 박혀 있는 분홍색 캡 모자. 그림자라고 해도 무방할 거 같은 올블랙 상하의. 그렇게 N은, 낡은 아디다스 슬리퍼를 질질 끌며 집 밖으로 나갔다.


    N은 세상에 우연이란 없다고 생각했다. 우연이라는 말로 포장했을 뿐, 사실 인간은 우연에 맞춰 행동했을 뿐이다. 우리는 운명이라는 단에 매료되어 원하는 현상을 끼워 넣고 있다. 끈적한 더위를 피해 집 밖으로 나온 것도 더위 때문이 아닌, 결국 자신의 의지라고 생각했다. 우연을 기대하는 건 하찮고 무능한 자신을 현실 밖으로 끄집어 내는 모종의 행위처럼 느꼈다.


    꽁꽁 얼어붙은 눈덩이 속이 포근하듯, 어쩌면 우연에 기댄 현실은 생각보다 따뜻했을지도 몰랐다. N은 모순적이게 늘 우연을 기대하며 살았던 것이다. 반나절조차 버티지 못하고 녹아버릴 주제에. 삐져나온 현실을 붙잡기 위해 더위에 죽어가고 있던 것이다.


    N은 이어폰으로 귀를 틀어막았을 때 들리는 소음이 좋았다. 먹먹하고 습한 백색 소음. 복잡한 세상의 소리가 절반쯤 들려오고, 옅은 자신의 숨소리가 반의반 정도 섞였으며, 이 모든 소리를 휘감은 답답한 소음이 있었다. N은 하루의 대부분을 이어폰과 함께 지냈다. 집에서도 마찬가지였고 잘 때도 이어폰을 끼고 잤었다. 보통은 음악을 듣거나 라디오를 들었지만 이따금씩 아무것도 듣지 않으면서 이어폰을 끼고 있을 때가 있었다. 정말로 아무 소리도 듣고 싶지 않을 때. 그럴 때 N은 조용히 이어폰을 낀 채로 천장을 바라봤다.


    N은 더위를 피해 집 밖으로 나간 날 도서관을 다녀왔었다. 도서관은 마음 편히 있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장소 중 하나였다. N은 꽤나 자주 도서관으로 향했다. 날씨가 더워서, 하늘이 우중충해서, 돈가스가 먹고 싶어서. N이 향한 곳에는 도서관이 아니어도 항상 책이 있었다. N은 사실 책 읽는 걸 그렇게 좋아하는 인간은 아니었다. 그저 책에 둘러싸인 자신이 평안함을 느낀다는 걸 알았고, 책에서 나는 텁텁한 공장 냄새가 좋다는 걸 알았다. 그뿐이었다. 그래서인지 읽기보다는 책들을 살펴보며 걷거나 가만히 앉아 바라보는 데에 많은 시간을 쏟았다.


    N이 책을 본격적으로 읽기 시작한 건, 조금 더 나중의 일이었다.


    오리가미 교야의 소설 '기억술사'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울 정도로 걱정할 사람들을 만든 건 실패지만, 안녕이라는 말을 하기 힘들 정도로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을 만든 게 더 큰 실패다.'


    N에게 이별이란 매번 같은 맥락이었다. 익숙함에 속지 않아 소중함을 잃어버린 것.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말과는 조금 다른 의미를 지닌 문장이었다. 보통은 익숙함에 속아 소중함을 잃지 말자라고 많이 하는데, 지난 경험들에 의거해 보면 확실히 달랐다. N은 차라리 익숙하다고 인지했더라면 더 좋았을 거라는 생각을 매번 했었다. 익숙해진 존재를 익숙하지 않다고 믿으며 거리를 두어버렸다.


    N은 아무렇지 않게 변해버린 기억들을 잊지 않았다. 세상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 기억이었다. 언젠가 이 말을 꺼내게 된다면 정말 아무렇지 않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N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 어떤 사람도 묻거나 들어준 적이 없었다. N은 모든 현실을 방관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문득 말을 하기가 싫어졌고 그때부터 입을 굳게 걸어 잠갔다.


    N의 실어증 행세는 오래가지 못했다. 의사소통 때문이었다. N은 조용하고 과묵했지만 결코 말이 없는 부류는 아니었다. 의사 표현은 확실하게 했으며 필요한 말은 반드시 하는 편이었다. 의외로 말을 하지 않는 삶은 불편함이 없었다. 의사소통 빼고.


    사실 N은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N은 자신이 잊으면 더 이상 기억할 사람이 남아있지 않다고 생각했다. N에게 있어 기억이란 아물지 않은 흉터였다. N은 잠이 오지 않을 때면 담담하게 이어폰을 꼈고, 누군가가 불특정 다수에게 말하는 목소리를 들으며 시간을 견뎠다. 머릿속이 복잡하면 주변이 고요하길 바랐는데 이상하게 그럴 때면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혼자 있는 게 아닌 누군가와 함께 있는 듯한 기분을 주는 목소리. 대화가 아닌 일방적으로 들을 수 있는 목소리. 적당한 거리에서 방관자로 남을 수 있는 목소리.


    N은 지금도 여분 이어폰까지 총 세 개의 이어폰을 들고 외출을 한다. 하나는 여름이 싫어서. 또 하나는 누군가의 목소리를 듣고 싶어서. 마지막 하나는, 기억하고 싶지 않기에 기억해야만 해서.


    N은 생각했다.

    할 수만 있다면 그때의 나에게 꼭 말해주고 싶다. 다 괜찮다고. 괜찮을 거라고. 잘 지나갈 거고 더 나아질 거라고. 앞으로 종종 힘들겠지만 오히려 그때가 힘듦을 이겨낼 수 있게 해주는 원동력이 될 거라고. 그리고 이어폰도 가끔은 쉬게 해주는 게 어떻겠냐고. 그러니 조금은, 아주 조금은 믿어도 된다고. 네 기억이 아닌 앞으로 기억이 될 현재를 조금은 신뢰해도 된다고.


    N은 펜을 내려놓았다. 땀이 스며들어 눅눅하게 변한 종잇장이 눈에 들어왔다. N은 입가에 미지근한 미소를 머금었다. 역시 여름은 딱 질색이었다.






-방관일지 EP.1 '장마철'-






https://www.youtube.com/watch?v=c3i95dyDB9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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