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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록가방 Feb 28. 2023

신발이 말해주는 것들

책 '신발로 읽는 인간의 역사'

패션의 완성은 신발이라는 말이 있다. 잘 갖춰 입었는데도 신발이 조화를 깨는 경우가 있고, 반대로 무난한 복장에 신발이 포인트가 되어줄 때도 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부분은 아닐지라도 신발 없이 패션을 논하기는 어렵다는 말에는 모두가 동의할 것이다. 누구나 사용하는 보편적인 물건인 동시에 그 종류와 가격대는 무궁무진하게 다양하다는 것도 신발의 특징이다. 오랫동안 인간 곁에서 함께해온 신발은 우리에게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을까. 



『신발로 읽는 인간의 역사』는 신발을 중심으로 역사와 문화를 짚어보고자 한다. 가이드를 맡은 건 캐나다 토론토에 있는 바타 신발 박물관의 수석 큐레이터, 엘리자베스 세멀핵이다. 그는 이 책에서 신발을 크게 샌들, 부츠, 하이힐, 스니커즈 네 종류로 나눈다. 작가는 방대한 문헌 자료, 생생한 사진과 함께 각각의 신발 스타일이 어디서 유래했으며 역사 속에서 어떤 사회 문화적 역할을 수행했는지 독자에게 들려준다. 각 신발 스타일에 얽힌 이야기는 모두 다르지만 읽다 보면 몇 가지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첫 번째, 당연한 스타일은 없다는 것. 지금의 우리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스타일도 처음 도입되었을 때는 파격적이고 난해하다는 반응을 얻곤 했다. 대표적인 스타일이 샌들이다. 로마 제국에서는 흔한 형태의 신발이었던 샌들은 중세를 지나 밖에서 발을 드러내는 게 금기시되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외면받았다. 이 시기 샌들은 이국적인 것의 상징으로, 주류 사회를 거부하는 급진적인 사람들이 신는 신발로 여겨졌다. 시간이 지나 발을 드러내는 게 건강에 좋다는 이야기가 퍼지고, 1차 세계대전 직후 물자 절약의 일환으로 샌들이 권장되며 비로소 샌들은 서구 사회에서 대중화되었다. 


오늘날 플랫폼 샌들, 하이힐 샌들 등 여성이 신는 굽 있는 형태의 샌들은 원피스 같은 격식 있는 옷에도 무난하게 어울리는 반면, 남성 패션에서 샌들의 위치는 아직 여성 패션에서만큼 대중적이지 않다는 부분도 흥미롭다. 실제로 남성 패션에서 샌들이 수용된 것은 1980년대 이후라고 한다. 저자는 여성의 발 노출이 성적 매력으로 연결되는 것과 달리 남성의 발 노출은 위생적으로도 미적으로도 거부감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을 언급한다. 같은 형태의 신발이 젠더에 따라 다르게 수용되는 모습은 우리의 미적 기준이 사회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받는지 잘 보여준다.   



두 번째.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신발에 다양한 가치와 의미를 부여해 왔기에, 특정 시대에 유행하는 신발을 보면 그 시대를 읽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하이힐이 대표적이다. 모든 신발은 정치적 기호로 읽어낼 여지가 있지만, 특히 하이힐은 온갖 담론이 부딪히는 현장이었다. 말에서 쉽게 오르내리기 위한 '등자'라는 도구에서 유래한 신발 하나를 두고 이렇게 많은 담론이 오갔다는 사실이 놀라울 정도다. 하이힐의 수난시대는 18세기 들어 하이힐이 본격적인 여성 신발로 자리 잡고 여성 섹슈얼리티의 상징이 되면서 시작되었다. 


하이힐은 숭배받는 동시에 경멸의 대상이 되었다. 새로운 여성성의 상징이면서 열등한 여성성의 산물이었다. 이를테면 하이힐은 1920년대 전통적인 여성상을 거부하고 짧은 단발머리, 종아리가 드러나는 드레스를 입은 신여성 '플래퍼'들의 신발인 동시에, 사치스럽고 분별력 없는 여성을 상징하는 패션 아이템이었던 것이다. 한쪽에서는 하이힐을 신은 핀업걸의 이미지에 열광했고, 다른 쪽에서는 하이힐 신은 여성의 '도덕적 해이'를 우려했다.  


그러한 모순 때문에 20세기 초중반 여성 참정권 운동가들은 힐을 신지 않는다는 이유로도, 힐을 비판하지 않는다는 이유로도 비난받아야 했다. 심지어는 의학적, 도덕적 이유로 여성들의 하이힐 착용을 금지해야 한다는 목소리까지 있었다고 하니 하이힐이 얼마나 '뜨거운 감자'였을지 짐작해볼 수 있다.  



세 번째. 신발은 사회 문화뿐만이 아니라 당대 산업과 기술 발전에도 큰 영향을 받았다. 스니커즈는 이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신발 형태다. 샌들, 부츠, 하이힐이 그 종류를 조금씩 달리하며 오랫동안 많은 사람이 신었던 형태라면 스니커즈는 19세기 산업시대에 이르러서야 익숙한 신발이 되었다. 사람들이 도시에 모여 살기 시작하며 여가 시간에 체육관에서 함께 운동을 한다는 개념이 이 무렵 정착했기 때문이다. 체육관에서는 바닥을 긁거나 손상하지 않는 신발이 필요했기에 새로운 신발의 수요가 생겨났다. 여기에 고무라는 재료가 대중화되고 대량생산 방식이 도입되면서 스니커즈는 튼튼하고 값싼 신발로 널리 사랑받았다. 


이후 스니커즈는 마이클 조던 같은 스포츠 스타와 '런-디엠씨(Run D.M.C.)' 같은 힙합 스타와 만나면서 21세기 대중문화의 아이콘이 되었다. 오늘날 스니커즈는 실용적이고 대중적인 신발을 넘어서 수집품으로서 가치가 올라가고 있으며, 다양한 분야와의 콜라보를 통해 그 영역을 넓히는 중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점점 샌들이나 부츠, 하이힐의 수요가 줄어들고 운동화의 수요가 늘어나면서 그 시장이 더 확장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전통적으로 계급 표현의 수단이던 모자의 역할이 축소된 오늘날, 패션 아이템으로서도, 자기 표현 도구로서도 신발의 영향력은 점점 커진다. 인간이 이족보행을 하는 한 신발은 계속 우리에게 중요한 패션 아이템으로 남지 않을까. 책 제목이 ‘신발로 읽는 인간의 역사’인데 그 내용이 주로 서구사회에 한정되어 있다는 부분은 아쉽기도 하다. 우리나라의 신발 변천사는 얼마나 서구 문화의 영향을 받았고, 또 어떻게 다를지도 생각하게 된다. 


책을 다 읽고 나면 누구나 자신이 지금 어떤 신발을 신고 있는지 내려다보게 될 것이다. 나의 경우 뉴발란스 운동화를 신고 있다. 깊게 생각하지 않고 고른 이 신발 역시 들여다보면 다양한 역사적, 사회적 맥락이 있을 테다. 책을 다시 읽으며 내가 신은 신발의 다양한 면면을 나름대로 짐작해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



이 도서는 아트인사이트와 함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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