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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록가방 Apr 12. 2023

각자의 방식대로 마주하는 삶

영화 <오늘 출가합니다>



‘중년의 위기’라는 말이 있다. 좀 서툴러도 뭐든 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반짝이던 시절을 지나, 이룬 것 없이 나이만 든 것 같은 자신을 발견하며 불안은 시작된다. 


이대로 계속 살 수도, 그렇다고 죽을 수도 없다는 생각이 턱 끝까지 차오를 때쯤, 불안한 사람들은 여러 가지 선택을 한다. 갑자기 새로운 사랑을 찾겠다며 가정을 박차고 나오는가 하면, 불쑥 여행을 떠나거나 직장을 그만둬버리기도 한다. 


영화 <오늘 출가합니다>에도 이대로 계속 살 수 없지만 그렇다고 죽을 수도 없는, 변화의 기로에 선 두 남자가 나온다. 모텔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사는 진우는 영화 PD이지만 몇 년째 투자를 받지 못해 어려움을 겪는 중이다. 하와이안 셔츠를 입고 삭막하기 그지없는 빌딩 숲 앞에 선 그는 이 도시에 받아들여지지 않는 사람처럼 보인다. 


진우의 오래된 친구 성민은 10년간 준비한 끝에 출가를 앞두고 있다. 출가 전 마지막 친구 모임이 끝난 다음 날 아침, 성민은 진우에게 자신의 차를 줄 테니 절까지 배웅해 달라고 부탁한다. 서울로 돌아가 봤자 골치 아픈 일뿐이기에 진우는 흔쾌히 제안을 받아들인다.  



그런데 이 출가라는 게 10년이나 준비했는데도 쉽지가 않다. 첫 번째로 도착한 절에서는 나이 제한에 걸려서 거절당하고, 두 번째 절에서는 가족 문제로 거절당한다. 


이제 출가한다며 속세에서의 마지막 식사도 마치고 법복도 샀건만 출가할 절이 없는 상황. 축 처진 성민의 어깨를 보던 진우가 한탄한다. “절도 영화도 왜 이렇게 들어가기가 힘드냐.” 나현진 배우의 애드립이었다던 이 대사에 영화를 보는 사람도 웃다가 운다. 


원래는 성민을 절에 데려다주고 몇 시간이면 끝났을 짧은 여정은 결국 며칠의 여행이 되어버린다. 갈 곳이 없어서, 거절당해서 시작된 여행이지만 분위기는 꽤 유쾌하다. 은근히 가리는 게 많은 성민과 그런 성민을 투덜대면서도 받아주는 진우의 티키타카가 웃음을 자아내고, 큰 스크린으로 펼쳐지는 초여름 강원도의 풍경은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아름답다. 그러나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지며 두 사람이 서로의 앞에서 굳이 말하지 않으려 했던 것들도 서서히 드러난다. 


친구들 앞에서 감독으로 별일 없이 잘 사는 척하던 진우는 사실 성민과 별다를 바 없는 처지다. 여성 주연을 남자로 바꾸라는 투자처와, 바꿀 수 없다는 감독 사이에서 그는 갈 길을 잃었다. 소신을 지키는 PD가 되고 싶지만, 돈이라는 현실적인 문제 앞에서는 선택지가 얼마 없다. 뚜렷한 이유가 나오지 않았던 성민의 출가 배경 역시 밝혀진다. 중학생 때 친구가 선배들에게 맞는 것을 방관했는데 그 친구가 몇 시간 지나지 않아 심장마비로 죽은 것이다. 성민은 잊었다고 생각한 그 기억이 갑자기 찾아와 떠나지를 않는다며 중얼거린다.  



두 번째 절에서도 거절당한 후, 이들은 발길 닿는 대로 다니다가 지금은 예술가로 살고 있는 학창시절 친구에게까지 간다. 거기서 두 사람은 새로운 세계를 만난다. 그 세계는 승인이 없어도 모두가 함께 어울리는 세계. 절과 영화를 앞에 두고 들어가느냐 못 들어가느냐 두 가지 선택지만 있던 세계와는 다르다. 예전에 남자였던 친구는 여자가 되어 살아가고, 배우들은 자연을 관객 삼아 공연을 한다. 성민과 진우의 낡아 빠진 차도 예술가들의 그림으로 멋있게 변신한다.


진우는 바다에서 서핑을 연습하며 지금까지 보여왔던 것 중 가장 자유로운 모습을 보인다. 영화의 초반 좁디좁은 욕조에 물을 받아 잠수하던 모습, 두 번째 갔던 절에서 술에 취해 말없이 계곡 속으로 몸을 담그던 모습과 대조적이다. 


예전에 물속에 있던 진우는 꼭 죽기라도 할 것처럼 보였는데, 여기서는 비로소 물을 받아들이고 즐긴다. 욕조에서 계곡을 거쳐 바다에 이르러서야 물이 턱 끝까지 차올라도 헤엄칠 수 있음을 몸소 깨닫는다.  



하지만 여행은 돌아갈 곳이 있을 때 비로소 여행이 되는 법. 이들이 타고 다니는 차는 임시 거처일 뿐이다. 영영 차를 타고 길 위를 떠돌 수는 없다. 한바탕 여행은 성민의 집에서 끝이 난다. 거기서 가족과 재회한 성민은 딸을 사랑하지만 출가의 뜻에는 변함이 없다는 걸 깨닫는다. 서울로 돌아가기를 계속 회피하기만 하던 진우 역시 성민의 가족을 보며 자신이 돌아가야 할 곳이 있음을 기억해낸다. 


여행은 언제나 후유증을 남긴다. 진우는 돌아가는 길에 성민의 딸 지수가 만든 랩을 들으며 엉엉 운다. 당당하게 뮤지션으로 살겠다고 말하는 지수, 여성의 몸으로 태어났지만 이제부터 남자로 살겠다고 선언하는 지수는 또렷한 목소리로 ‘똑바로 세상을 바라보려 해’라는 가사를 내뱉는다. 거기에는 진우나 성민에게는 이제 없는, 시작하는 사람의 반짝거림이 묻어 있다.


여행이 끝났음을 가장 직관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두 사람이 함께 타고 다니던 차가 폐차되는 장면이다. 예술가들의 그림으로 아름답게 장식된 차를 폐차시키는 게 처음에는 의아하게 느껴졌지만, 여행을 여행으로 남기기 위해, 즉 두 사람이 각자의 삶으로 돌아오기 위해 꼭 필요한 과정이었으리라. 폐차 후 이제껏 피하기만 하던 아내에게 전화를 거는 진우의 표정은 한결 후련해 보인다.  



삶에서 잠시 유예된 시간 동안 함께 여행길에 올랐던 두 사람은 여행을 마치고 일시정지해 뒀던 각자의 삶을 다시 재생한다. 서울을 떠나 강원도를 헤매다 다시 자신의 삶이 있는 서울로 돌아온 진우와, 가족이 있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결국 출가를 하고 만 성민은 서로 다른 선택을 내린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폐차 후 아내에게 전화를 걸던 진우의 표정처럼, 마침내 절에 들어가 머리를 깎는 성민의 얼굴도 후련하고 평온하다. 그 표정을 보며 성민의 선택 역시 삶으로부터의 도피가 아니라 자신의 삶을 제대로 살기 위한 적극적 행동이라고 납득할 수 있었다.


가족을 속세에 남겨두고 홀로 종교에 귀의한 그의 선택을 두고 여러 의견이 오갈 수 있겠지만, 그렇게밖에 살아갈 수 없는 삶도 세상에는 있을 것이다. 진우가 그렇게 괴로워하면서도 영화를 계속하며 살아야 하는 사람이듯 성민은 계속 살기 위해 출가가 필요했다. 각자의 방식대로 자신의 삶을 마주한 두 사람은 1년 뒤에 재회한다. 둘의 얼굴은 편안해 보인다.


이 영화는 아트인사이트와 함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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