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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록가방 Nov 12. 2018

생산의 강박을 넘어

<비생산적인 생산의 시간>을 읽고


창의 노동자가 되려는 사람들의 고민


학교에서 공부하는 분야의 특성상 진로 이야기를 하다 보면 다 비슷한 방향으로 이야기가 흐른다. 꼭 순수 창작을 희망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해도 문화산업계에서 일하길 희망하는 사람들은 이미 높은 임금이나 안정성은 어느 정도 포기해야 한다는 걸 인지하고 있다. 문제는 그런 것들을 견딜 수 있을 만큼 이 분야에 열정이 있는가에 대한 의심과, 불확실한 길을 앞두고 이렇게 살아도 좋은가 하는 고민이다. 이야기를 나눌수록 결국 진로와 관련된 건 자신의 선택이고 해 보기 전까지는 모른다는 사실만 뚜렷해진다. 마음속으로는 이미 알고 있지만 고민은 쳇바퀴 돌듯 끝없이 돌고 또 돈다. 최근에도 한 지인과 비슷한 패턴의 대화를 나누었다. 영화계에서 일하기를 꿈꾸는 그는 작년에 상업영화 판에서 일을 해 본 이후 과연 이 일을 해야 하는가 회의감이 들었다고 했다. 우리는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걸까. 문화예술계에서 일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도 다소 막연하고 무엇을 해야 할지 안다고 해도 그 모든 것들을 견디고 버틸 수 있을 만큼 이 일을 좋아하는가도 불명확하다. <비생산적인 생산의 시간>이 반가웠던 건 이런 내게 마침 필요한 책이었기 때문이다.


<비생산적인 생산의 시간>은 영화감독 지망생 열다섯 명을 직접 인터뷰한 저자가 그들의 이야기를 실은 내용이다. 제삼자의 시선으로 그려지는 모습이 아 당사자가 직접 이야기한 내용을 담았다.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는 사람으로 공감되는 부분도 많았고, 영화감독 지망생들이 어떤 마음으로 무슨 일을 하며 살아가고 있는지 엿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모두가 불안하다

불안정성은 때로 역전되기도 한다.
지망생들이 불안정성을 적극적으로 끌어안는 방법이다. 몇몇 지망생들은 영화판의 불규칙한 유동성에서 느끼는 불안정성보다, 영화를 떠나 다른 일을 하면서 사는 삶에서 더 불안함을 느낄 것 같다고 대답했다. 이런 인식 체계에서 불규칙한 유동성과 불안정성은 역의 관계로 성립하고 있었다. 영화감독 지망생들은 안정성을 담보로 하여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는 삶을 적극적으로 거부하고 있었다.

영화감독 지망생이 아닌 입장에서 나 역시 제삼자의 눈으로 그들을 보고 있었는지, 예상과 다른 부분이 꽤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의외였던 건 불안을 다룬 3장과 4장에서의 지망생들의 대답이었다. 영화판에 뛰어들지 말지를 고민하는 시기가 더 불안했고 오히려 결정을 한 지금은 덜 불안하다는 얘기와 미래에 대한 불안보다 자기 자신에 대한 불안이 크다는 이야기를 보고 아무것도 결정된 게 없는 상태가 불안을 야기한다는 걸 실감했다.  최선의 결정이 아닐지라도 일단 무언가를 결정하면 불안은 많이 줄어드는 것이다.


 많은 20대가 뚜렷한 목표 없이 대기업이나 공무원 시험으로 몰리는 것은 사회가 워낙 불안정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정해진 길을 벗어나 본 적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더 나아가 길 바깥에도 길이 있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일지도 모른다. 생산에 대한 강박은 이러한 불안에서 비롯된다. 뭘 하든 의미가 있어야 할 것 같고, 그럴듯한 결과물이 나와야 할 것 같다. 이런 강박을 제일 잘 보여주는 게 휴학이다. 분명 단어는 학업을 쉰다는 의미인데, 오늘날 대학생들 사이에서 휴학은 학업 대신 다른 생산적인 무언가를 하는(해야 하는) 기간으로 읽힌다.


스무 살이 넘어서 친구들을 만날 때마다 했던 말은 '인생이 이렇게 불확실한 것이었다니!' 하는 한탄이었다. 그도 그럴 게, 대학 입시라는 큰 산을 앞두고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에서는 모두 인생의 길이 정해져 있는 것처럼 가르친다. 그 길을 크게 벗어나 보지 않은 채 자연스레 대학생이 되었던 나는 불확실한 미래를 인정하는 데 꽤 많은 시간이 걸렸다. 점수로 내 현재 위치를 알고 무엇을 얼마나 더 해야 할지 판단하던 중, 고등학생 때와 달리 스무 살 이후로는 모든 일을 스스로 판단해야 했기 때문이다. 지금의 나는 어차피 불안함이 삶의 기본값이라면 당장 안정적으로 보이는 일보다 내가 조금이라도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게 낫겠다고 결론을 내린 상태다. 모든 삶은 불안하므로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겠다는 책 속 사람들의 포부는 그래서 조금 위로가 되었다.


창의 노동자를 보는 모순적인 시선

지망생들이 홀로 견디는 시간에 고난에 무게를 더하는 것은 '세상의 법칙'이다. 하지만 길게는 10년씩 걸리는 지망생 기간 내내, 쉬지 않고 무언가를 쓰고 만들 수는 없다. 자극받기라는 행위를 잉여 시간으로 여기는 시각이 대부분이지만, 창의적인 결과물이 나오기 위해서는 인풋(input)에 들이는 시간이 반드시 필요하다.

어쩌면 창의 노동자를 가장 괴롭게 하는 건 업계의 불안정성에서 비롯되는 불안함보다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일 것이다. 현장에서 창의 노동자가 겪는 여러 가지 부당한 일은  현실이지만, 창의 노동자가 아닌 제삼자의 눈에는 그런 부당함조차 낭만으로 쉽게 왜곡된다. 창의 노동자가 겪는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택한 대가' 정도로 치부된다는 뜻이다. 일러스트레이터에게 지인이 당연하다는 듯 무급으로 그림을 요구하거나 예술가는 최저임금이 안 되는 돈을 받고 일하는 게 당연하다는 태도 등은 창의노동자를 바라보는 우리 사회의 시선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  물론 무슨 일을 하든 얻는 게 있다면 포기해야 하는 게 있다. 그러나 유독 창의 노동자의 일은 노동으로 취급되지 않고 취미 정도로 여겨지는 현실 속에서 문화예술계의 여러 직업들은 너무 많은 것을 포기해야하는 선택이 되어간다.


지망생 기간은 열정을 쏟고 의지를 꽃피울 수 있는 기간이 아닌 의지가 깨지지 않도록 저항해야 하는 과정이었다. 꿈을 가지고 뛰어든 이들에게 창의 노동의 장은 열정을 지펴 주기보다 외부적 압력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현재 우리나라의 문화예술 산업은 그 성장 속도나 중요성에 비해 노동환경이 너무나 열악하다. 다행히도 최근에는 문제제기가 이루어지기 시작해 여러 노조와 모임이 만들어지고 있다. 전국 언론노조 방송작가 지부인 '방송작가 유니온'이 작년에 만들어졌고 올해 초 SF작가들의 모임인 '한국과학소설 작가 연대'도 출범했다. 창의 노동자는 일의 특성상 프리랜서가 많고, 그래서 부당한 일을 당했을 때 대처하기가 더 힘들어진다. 책을 읽으면서도 사회안전망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꼈다. 문화예술산업에 종사하는 개개인을 위해서 뿐만이 아니라 문화예술계 전체의 발전을 위해서도 업계 종사자의 권리는 보장되어야 한다. 


지망생으로서의 삶

과정을 소거하고 결과에만 주목하는 분위기 속에서 그동안 지망생을 한 번도 주목받는 대상이 될 수 없었다. 영화 산업만이 아니다. 직장인이 되려는 취업 준비생도 '아직 완성되지 못한' 상태에서 빨리 벗어나야 한다는 요구를 받고 있을 뿐이다. 언제나 과정은 서둘러 탈출해야만 하는 고통스러운 시기로 그려지고, 그 과정을 겪는 사람들은 불완전한 존재로 인식된다. 과정에 있는 건 즐거운 일이어야 하는데, 우리 사회에서는 그게 참 힘들다.  
(중략)
인내와 끈기로 채워지는 과정은 재평가되어야 한다. 지망생들의 열정과 의지를 존중하게 되었다면 우리도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는 것이 어떨까. 꼭 대단한 무언가가 되지 않았을지라도 말이다.


무언가를 만들고자 하는 사람은 늘 대단해 보인다. 그 열정을 존경한다. 나는 그렇게까지 불확실한 무언가에 뛰어들지는 못할 사람이라는 생각에 자신이 자신이 한심하게 여겨질 때도 있다. 사실, 이 글을 읽으면서도 나도 모르게 나와 이 사람들을 비교했다. 불안정한 상황에 놓여 있다 해도 어쨌든 이들은 목표를 가지고 하루하루 열심히 살고 있으니까. 그들이 열정과 의지를 바탕으로 보내는 비생산적인 시간과 나의 비생산적인 시간이 과연 같을까? 책이 고민을 해결해 주지는 않았다. 생산에 대한 강박은 사라지지 않고 변해간다.

그럼에도 위로가 되는 건 우리 모두가 삶이라는 큰 과정 중에 있는 '지망생'이기 때문일 거다. 결과만을 중요시한다면 우리 삶의 끝은 죽음이기에 인간의 삶은 죽음 이후에야 논할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삶에는 비생산적인 시간이 생산적인 시간보다 많고, 그 모든 비생산적인 시간이 열정과 의지를 바탕으로 하지는 않는다. 책에서는
목표가 뚜렷한 비생산적인 시간만 다뤘지만, 이러한 맥락에서 목표가 흐릿한 비생산적인 시간도 괜찮지 않을까. 이런 비생산적인 시간이 모여서 목표를 뚜렷하게 하는 게 아닌가 혼자 합리화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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