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린 이동이 주는 것들
비행기는 빠르고 자동차는 편하다. 하지만 여행의 기분을 가장 잘 끌어올리는 이동 수단은 기차라고 생각한다.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풍경이 점점 바뀌는 걸 보면서, 일상에서 천천히 빠져나가는 감각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올해 봄, KTX 대신 무궁화호를 탔다. 서울에서 강릉까지 다섯 시간 남짓. 빠르게 가면 두 시간이면 되는 거리를 일부러 느리게 갔다. 옆 좌석에는 아무도 없었고, 창가에 기대어 책을 읽다 눈을 들면 산이 보이고, 다시 읽다 보면 바다가 보였다.
강릉역에 내리면 바다 냄새가 난다는 건 과장이지만, 공기가 다르다는 건 사실이다. 역을 나서자마자 카페거리 방향으로 걸었다. 강릉 당일치기 여행 코스 추천 - 커피거리부터 경포대까지 알찬 일정을 미리 훑어봤던 터라, 동선은 머릿속에 대충 그려져 있었다.
커피 한 잔을 들고 경포호수 둘레길을 걸었다. 벚꽃은 아직 이른 시기였지만, 버드나무가 연두색으로 물들기 시작한 호숫가는 충분히 봄이었다. 관광객이 몰리는 4월보다 3월 말이 오히려 여유롭고 좋다.
유명한 여행지는 사람이 많다. 사람이 많으면 줄을 서야 하고, 줄을 서면 여유가 사라진다. 여행에서 여유가 빠지면 뭐가 남는 걸까.
국내 숨은 여행지 추천 - 사람 적고 아름다운 봄 명소를 찾아보면, 이름만으로는 어디인지 감이 안 오는 곳들이 나온다. 그런 곳이 오히려 좋다. 네비게이션에 주소를 찍고 가보면, 나만 아는 장소를 발견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지난해 가을에 우연히 들른 경북의 한 작은 마을이 그랬다. 길 끝에 오래된 정자가 있었고, 그 너머로 산이 겹겹이 보였다. 인스타그램에 올리기엔 뭔가 부족한, 하지만 직접 서면 가슴이 트이는 그런 풍경이었다.
기차 여행을 하다 보면 더 먼 곳으로 가고 싶어진다. 해외여행이란 게 사실 기차의 연장선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이동 자체가 여행의 일부가 되는 경험은 국경을 넘어도 마찬가지다.
최근에 잉글랜드 축구의 심장, 노팅엄 포레스트 그리고 도시 탐방 가이드를 읽으면서, 영국 기차 여행을 떠올렸다. 런던에서 노팅엄까지 기차로 두 시간. 축구를 보러 가는 여정이지만, 창밖으로 펼쳐지는 영국 시골 풍경도 여행의 한 부분이다. 언젠가 그런 여행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강릉행 무궁화호 안에서 피어올랐다.
강릉에서의 하루는 빠르게 지나갔다. 해가 기울 무렵 다시 기차를 탔다. 돌아오는 길은 가는 길보다 항상 짧게 느껴진다. 아마 마음이 이미 일상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기 때문일 것이다.
창밖이 점점 어두워지고, 터널을 지날 때마다 유리창에 내 얼굴이 비쳤다. 피곤하지만 나쁘지 않은 표정이었다. 봄날의 기차역에서 시작된 하루가, 다시 봄날의 기차역에서 끝났다. 다음에는 어디로 갈까. 그 고민이 벌써 즐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