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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te by Oct 27. 2024

관광객도 가끔 할머니가 필요하다

(21) 미국에서 먹는 가정식 아침밥




주말이 오기 전 포틀랜드 근교 아름다운 해안 도시 캐논 비치를 다녀오기로 했다. 예술과 자연과 휴식이 있는 너무나도 사랑스러운 마을이라고 했다. 포틀랜드에서 2년 살았던 J님이 꼼꼼하게 가볼 곳 리스트를 뽑아주며  추천한 곳이기도 했다.


캐논 비치에는 거꾸로 엎어 놓은 모자처럼 생긴 거대한 바위 헤이스택 록(Haystack Rock)이 있다. 헤이스택은 볓짚을 뜻한다. 프랑스 인상파 화가 모네의 그림 <헤이스택>을 보면 볓짚을 엎어 놓은 모양이 이 바위의 모습 그대로다. 캐논비치의 상징이자 랜드마크인 72미터 높이의 거대한 바위인데,  조수 간만의 차에 따라 해안선이 바뀌기 때문에 썰물 때는 걸어서 바위 근처까지 다가갈 수 있다고 한다.


우리는 아침 일찍 출발해서 캐논 비치에서 아침을 먹고 싶었다. 바다 마을의 가정식 브런치. M이 운전하는 동안 나는 식당 검색에 들어갔다.


내가  생각한 가정식은 진짜 가정식, 즉 가족들이 살고 있는 집에서 가족들이 모여 먹는 그런 아침을 맛볼 수 있는 곳이었다. 아침은 커피 한잔이면 되는 나지만 장소에는 진심이었다.




금요일 아침 Sleepy Monk Coffee 앞에는 그 유명한 로스팅 커피를 마시기 위해 사람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맛집인가 보네..."

M이 회가 동하는 듯했으나, 나는 줄을 서서 기다리고 싶지 않았다.


한 블록 지나 딱 마음에 드는 곳이 나왔다. 레이지 수잔(Lazy Susan).  가격은 착하지 않지만 경험할 가치가 있다는 후기에 끌려 작은 가정집의 삐걱이는 작은 문을 열었다.




관광객이라면 마음속에 그려지는 시골 가정식 식당이 있지 않은가. 주인 할머니는 화사한 꽃무늬 옷을 입고 있어야 한다. 마루는 삐걱거려야 하고, 벽에는 낡은 액자들과 접시가 걸려있어야 한다. 이중 몇 개는 살짝 삐딱하게 걸려있는 것이 포인트.


창문에는 레이스 커튼이 있고, 커피 향이 고소하고 밀려들고, 낮은 포크 소리가 들려오는 그런 곳. 물론, 테이블 위에는 작은 꽃병도 있어야 한다.


딱 그런 곳이었다. 헤이스택 바위가 그려진 풍경화. 유리창가의 유리공예품. 자녀들이나 손주들이 선물한 작품일 가능성 50% 이상이다.


할머니의 젊은 시절 사진인 것 같은 액자도 보였다. 사랑스러운 식당이지만 "친절하게 행동하던지, 나가던지" 점잖은 호통도 걸려 있었다.




레이지 수잔 까페는 캐논비치의 오랜 역사와 함께해 온 작은 가족 식당이었다. 식당 이름인 레이지 수잔은 중국 식당에 가면 흔히 볼 수 있는, 테이블 위의 회전 트레이를 뜻하는 말이다. 이 트레이처럼 손님들이 모여 쉽게 음식을 나누라는 뜻이 담긴 이름이라고.


이곳 메뉴 중에서 시그너처는 와플, 팬케이크와 프렌치토스트다. 팬케이크는 두툼하고, 프렌치토스트에는 과일이 수북하게  올려져 나온다.  느긋한 아침이나 해변가 브런치를 맛보고 싶은 사람들에게 권하고 싶은 따뜻한 곳이다.



가정식 음식은 미국인들에게도 중요한 의미가 있다. 미국은 다양한 민족과 문화가 모인 다문화 사회이기 때문에, 가정식도 지역이나 가족의 배경에 따라 다채롭다고 한다. 전통적인 아메리칸 가정식 외에도 이탈리아, 멕시코, 아시아 요리 등이 미국 가정식에 퓨전화되어 스며들어있다.


보통 미국 집밥은 복잡한 조리법보다는 쉽게 만들 수 있는 요리가 많다. 미트로프(meatloaf), 로스트 치킨, 매시드 포테이토, 코울슬로 같이 간단히 조리해서 큰 접시에 담아내면, 가족들이 각자 접시에서 덜어 먹는다. 양이 많고 재료도 소스도 아낌없이 만든다.


미국 가정식에서 자주 쓰는 재료는 감자, 옥수수, 콩, 치즈, 버터, 닭고기, 돼지고기 등이다. 소고기는 의외로 알러지가 있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이러한 재료들은 전통적인 가정식의 기본이고 여기에 각자 집마다 고유한 레시피의 요리법 만들어진다.                  




이런 가정식 식당에 가면 특화된 홈메이드 디저트가 있다. 애플파이, 브라우니, 치즈케이크, 쿠키 같은 가정식 디저트로 식사를 마무리하는 즐거움은 한때 아이들이었던 어른들에게도 추억이 된다.  으레 특별한 날을 기념할 때 등장했던 메뉴들이니까.


어린 시절에 먹던 음식을 '컴포트 푸드(comfort food)'라고 부른다. 할머니만의 비법이 담긴 수프, 스튜, 뭉근한 불에 오래 끓인 음식은 할머니 집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밀려오는 힘이다. 이런 음식은 우리가 성장하며 기억 속에 남아, 힘든 날이나 기분이 좋지 않은 날에 그리워지는 음식이기도 하다.



할머니는 가족의 중심에 깊은 뿌리를 내린 채 서서 오랜 시간 동안 내려오는 가족의 전통과 가치를 지켜온 존재다. 음식의 전통이 가장 강력하다. 할머니가 손수 만든 음식에는 그저 배를 채우는 것을 넘어 정서적 안정과 위안이 나지막한 불 위에서 끓고 있다. 사랑과 정성을 먹는 것이다.


어른이 되어서도 할머니의 그 맛을 떠올릴 때면 힘들고 지쳐도 돌아갈 곳이 있다는 안정감을 느낀다. 손자, 손녀들에게 할머니의 밥은 특별한 기억과 지지의 기억이다.


할머니들은 대개 손주들에게 무조건적인 사랑과 이해를 주는 존재다. 이런 사랑은 손주들이 스스로를 소중히 여기고, 삶의 어려움 속에서도 위안을 얻을 수 있도록 조용히 보듬는다.


부모가 규칙과 훈육을 중요시하는 경우가 많다면, 할머니들은 손주들이 더 자유롭고 편안하게 느낄 수 있도록 따뜻한 안식처가 되어준다.



그래서 가정식 음식에는 가족의 역사와 전통을 이어주는 이야기가 있다. 할머니가 들려주는 옛이야기, 가족의 기원, 또는 가족이 함께 해 온 전통... 손주들에게 자부심과 소속감을 느끼게 해 주는 이런 이야기에서 가족은 뿌리를 이해하고, 자신이 그 가족의 일부라는 정체성과 자부심을 갖는다.


할머니는 오랜 세월을 거쳐 다양한 삶의 경험을 축적한 지혜로운 한 사람이다. 그들은 삶에 대한 조언과 교훈을 우리에게 전해준 사람이다. 어려움을 겪을 때 이야기를 들어주고, 화가 났을 때 같이 욕을 해주는 천군이다. 화가 가라앉은 다음에 그제야 따뜻하고 현명한 어록을 남기는 상담자다.


직접적인 훈계가 아니라, 삶의 다양한 이야기를 통해 교훈을 주는 이야기여서 할머니 말은 잊지 못한다. 내가 내 아이에게 그 이야기를 해주게 되는 기억의 대물림이다.



여행하며 만난 많은 식당들은 그 가게의 역사, 기록을 가지고 있었다. 모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 이런 것 말고.


이곳에도 있었다. 오레곤 지역 신문 인터뷰 기사, 초창기 메뉴, 가게 앞에서 열렸던 산타클로스 잔치 같이 희미하지만 소중한 아카이브...

 


나는 이런 식당을 갈 때마다 할머니의 집밥이 가지는 상징적인 의미를 생각하곤 한다. 할머니들이 수북이 담아주는 고봉밥, 대충 던져  놓은 수저. 제사상처럼 쌓아 올린 음식, 부족하면 더 먹으라고 몇 번이고 말해서 결국 짜증 나게 하는 집요한 사랑.


시간이 지나도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가 내가 문을 열고 들어가면 나올 것만 같은 얼굴 말이다.

왜 그렇게 여위었냐고, 빨리 손 씻고 나와 밥 먹으라며 부엌으로 향하는...

 

관광객도 가끔 할머니가 필요하다.

여행도 나그네길 아닌가.





20240719

Canon Bea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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