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틀랜드에 도착한 다음날 파웰서점(Powell's Books)에 잠시 들러 커피를 마시며 나는 M에게 하루는 꼭 이곳에 처박혀 있게 해달라고 간절히 부탁했었다. 마음이 하늘에 닿았는지 드디어 그 소원을 풀게 되었다.
오전 10시에 책방 앞에 내렸고, 저녁 8시에 M이 다시 나를 데리러 왔다. 그 사이 책방을 나온 시간은 길 건너편 홀푸즈에 가서 연어롤을 먹고 오다가 길 건너 파타고니아에서 책을 담을 수 있는 튼튼한 가방을 하나 산 것이 전부였다. 홀 푸즈 외에 다른 곳은 절대 안 된다고 M이 강조를 해서 건너편에서 한번 더 건너편에 있는 파타고니아 가는 길도 조마조마했다.
파웰서점은 책 애호가들에게 성지와 같은 곳이다. 세계 최대 독립 서점 중 하나이며, 세상에서 가장 큰 서점이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다. 이곳은 1971년 월터 파웰(Walter Powell)이 설립한 작은 책방이었다. 이후 그의 아들 마이클 파웰(Michael Powell)이 운영에 참여하면서 동네 책방은 지금의 파웰로 빠르게 성장했다.
지금 파웰서점의 주요 지점인 파웰시티오브북스(Powell’s City of Books)는 포틀랜드 시내 번사이드 스트리트(Burnside Street)에 있는데, 약 6,300제곱미터에 달하는 매장이다. 뉴욕으로 말하면 트럼프 타워처럼 거리 한 블록을 서점이 당당히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이 서점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지도를 하나 들고 다니는 것이 좋다. 전체 네 개의 층과 3,500여 제곱미터의 서가가 있으니 처음 오는 사람은 길을 잃을 수도 있다. 그나마 다행히 파웰서점은 색상으로 공간을 구분하여 놓았기 때문에 구획의 색을 따라 이동하면 어렵지 않다. 계단에서 굴러도 내가 어느 방에 있는지 알 수 있다. 모를 수가 없다. 눈앞에 색이 있다.
이렇게 9개의 섹션(Yellow Room, Blue Room, Red Room 등)으로 구분된 공간은 각 섹션마다 다양한 장르와 주제의 서적이 배치되어 있다. 그러니까 제일 밑의 중앙에 크게 표시된 색이 내가 지금 있는 곳의 색이다. 한번 제대로 이 서점을 돌아보면 내가 어느 색에 속하는 인간인지 이내 파악하게 된다. 나는 레드형 인간이다.
책이 워낙 다양하기 때문에 하나의 색 아래서 놀아도 하루는 금세 간다. 각 색상 구역마다 세부적인 장르 구분이 되어 있기 때문에 그 구조를 파악하게 되면 원하는 책을 찾기 쉽다. 직원들이 서가를 정리할 때도 색깔별로 구분된 바구니를 이용한다. 효율적인 아이디어다.
나는 레드로 가서 나의 아이돌 샘 셰퍼드의 서가 앞에 섰다.
내가 사랑하는 추억의 프랑스 영화 <빨강 풍선> 원작이 있는 곳을 찾아갔다. 직원이 예쁜 글씨로 노란 포스트잇에 번호를 적어주었다. 이 책을 추천하는 직원의 메모가 있다. "아들, 오늘 이 책 읽는다. 프렌치 웨이브 영화의 세계로~." 다감한 엄마다.
서점 직원들은 책벌레들이다. 직원 추천 코너에는 각각의 책 밑에 그가 왜 책을 추천하는지 이유가 깨알 글씨로 쓰여있다. 그 책을 읽은 다른 독자의 글이 붙어 있는 책도 있다. 모두 글을 잘 쓴다. 글씨체도 곱다.
킨포크의 성지, 포틀랜드에서 킨포크를 펼쳐 읽는 기쁨이란.
나우 매거진의 1호 포틀랜드를 사고 싶었지만 끝내 사지 못했다. 서가에도 재고에도 없고, 아마존에도 없었다. (이 책 가지신 분 연락 바랍니다. 사례합니다.)
파웰에서 시간을 보내면 마치 책으로 이루어진 도시를 탐험하는 듯한 느낌에 빠진다. 서점 내부 곳곳에 안내 지도와 표지판이 잘 되어 있고 각 섹션마다 인포메이션 직원들이 친절히 서가를 안내해 준다.
파웰서점은 신간과 중고 서적을 같이 판매하는데 같은 책이 새 책과 중고 상태로 함께 진열되어 있는 경우도 많다. 새 책과 중고의 나란한 진열 방식은 이곳이 단순히 책을 사는 곳이 아니라 독서하는 사람의 주머니나 서가를 구성하는 방식에 맞는 옵션을 같이 제공해 주겠다는 의도가 아닐까 싶다.
이곳저곳에서 사람들이 자기가 다 본 책을 가져와 판매하는 곳이 있고 서점 직원은 책의 상태와 그 책의 수요를 찾아보고 적절한 가격을 제시한다. 파웰서점이 계속해서 넉넉한 재고를 유지하는 이유도 바로 이것이라고 한다.
서점의 1층과 2층 중간, 즉 반층 위에 위치하는 메자닌에는 책을 읽다 커피 한잔 마시며 쉴 수 있는 카페가 있다. 서점에서 구입한 책이면 읽을 수도 있다. 와인을 마시며 친구들과 대화를 하는 사람들도 보인다.
작가와의 만남, 책 낭독회, 사인회 등의 다양한 이벤트도 정기적으로 열린다고 하니. 글을 쓰는 사람, 읽는 사람, 언젠가 글을 쓰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커뮤니티가 자연스럽게 형성된다.
파웰서점은 포틀랜드의 독립서점의 자부심이 대단하다. 이 독립서점을 지켜온 지역 사회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지역 예술가들의 작품을 전시하거나, 독립 출판물과 희귀 서적들을 위한 공간도 있다.
4층에는 포틀랜드 아카이브 사진도 살 수 있다. 자전거의 친화도시 포틀랜드에서 살 수 있는 상징적인 사진들이다. 친환경 스타트업을 경영하는 막내동생에게 줄 선물로 이날 이 사진들을 사오지 못한 것이 아쉽다.
서점에서 소장하고 있는 희귀 서적과 독립 출판물 방이 <Rare Book Room>이다. 미리 데스크에 가서 배지를 받아 착용하고 나서 이 방에 들어갈 수 있다.
애서가의 천국으로 불리는 이 희귀 서적 공간에서 허클베리핀의 원서나 구텐베르크 인쇄서를 구입하는 사람들 모습을 볼 수 있다. M의 남편인 MS도 이 희귀 서적코너에서 셰익스피어 시기의 희곡집을 구입한 신사 고객이다.
독특한 굳즈 구경도 즐겁다. Keep Portland Weird('포틀랜드 내버려 둬'). 이 도시의 슬로건이 새겨진 기념품들도 있다.문제 출판물로 경고받은 출판사들이 먹고살게 해달라고 출시한 굳즈들은 따로 잘 보이는 곳에 전시되어 있다.
포틀랜드, 계속 삐딱한 채로 살게 내버려 두어야 한다.
포틀랜드의 뭔가 엉뚱하고 삐딱한 정서는 도처에 있는 알 수 없는 낙서와 스티커에도 충만하다. 청개구리 정서가 가득한 창조의 공간이다.
파웰서점은 단순한 서점이 아닌 관광 명소로서 포틀랜드를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필수 코스가 되었다. 매년 수많은 여행객들이 파웰서점을 방문하여 방대한 책 더미 속에서 자신만의 보물을 찾아 떠나는 특별한 경험을 한다.
서점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을 "Lost in Powell's"라고 부르며 관광객들은 이곳에서의 경험을 독특한 기억으로 소중히 간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