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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트폴리오 May 27. 2022

나에게 정말 필요한 무언가를 찾는 여정

[창작자와의 인터뷰] 김나훔 작가

“마침 봄이 오기 시작했어요. 앙상한 나무에서 새싹이 자라기 시작했고 움트는 자연을 보면서 저도 조금씩 살아나기 시작했어요. 그 때부터 다시 그림이 그려지더라구요. 자연스럽게 직업을 바꾼다거나 하는 생각은 머릿속에서 사라지고 진짜 예술적인 삶이란 무엇일까 하는 생각에 집중하게 됐어요.”
누구나 한번쯤은 봤을 법한 김나훔의 2013년 작 <내리면 탑시다>. 만원 지하철을 타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실소가 터져 나올 것이다. 그 당시 김나훔이 보여주던 작업들은 대체로 이 세상을 따끔하게게 꼬집겠다는 시니컬함이 엿보인다. 무슨 일이 있었을까? 2017년 노트폴리오와의 인터뷰 이후 5년 만에 만난 김나훔 작가는 그의 새로운 삶의 터전이 된 강릉 바다처럼 꾸밈이 없고, 자유롭고, 동시에 아름다운 삶의 자세를 제시한다. 계획이 없다면 없는대로, 계획이 있다면 계획대로 자신의 창작을 계속해나가고 있는 김나훔 작가의 속도에 맞추어 같이 걸어보자.







안녕하세요 나훔님! 2017년 이후 노트폴리오와 5년 만의 인터뷰네요!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드려요.


안녕하세요. 강릉에서 그림을 그리면서 아내와 갤러리 겸 소품샵 오어즈를 운영하는 김나훔입니다.



그간 어떻게 지내셨는지,
어떤 작업을 하셨는지 보기 위해 조사를 좀 했는데요(웃음),
노트폴리오, 블로그, 인스타그램, 브런치, 개인 홈페이지까지…!
굉장히 다양한 SNS를 운영 중이시더라고요. 열정이 대단하신 것 같아요.
김나훔 작가의 작업실

다양한 곳에 제 이야기를 올리는 것 좋아해요. 처음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계기도 싸이월드의 작은 클럽에 게시물을 올리면서 시작이 되었으니까요. 제 자신을 알리는 것은 당연한 일인 것 같아요. 반대로 그렇게 제 목소리를 여기저기에 내지 않으면 천천히 소멸해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도 작용하고요. 큰 돈을 들이지 않고도 내 그림, 글들을 여러 사람에게 내보일 수 있다는 것은 정말 큰 축복이라고 생각해요. 예전 같았으면 꿈도 못 꿀 일이죠. 운 좋게 참 좋은 시대에 태어났다고 생각합니다.



노트폴리오가 서비스를 런칭한 게 2012년 11월인데,
나훔님의 첫 번째 작업은 11월 29일자로 업로드 되어 있어요.
노트폴리오는 어떻게 접하게 되셨나요?
김나훔 작가의 노트폴리오 초기 업로드작

제 창작물을 내보일 수 있는 플랫폼을 찾았던 게 첫 번째겠죠. 한두 사람이 반응을 보여주는 것에 만족하던 어느 날 노트폴리오에서 제 작업을 메인 피드에 소개해줬는데, 더 많은 사람에게 주목받을 수 있게 되었어요. 수백 명이 ‘좋아요’를 누르고 게시물을 공유해주었죠. 실력도 자신감도 부족했던 제겐 정말 황홀한 기분이었어요. 그날의 일이 밑거름이 되어서 지금까지 굶어 죽지 않고 밥 벌어먹으며 살고 있다는 생각합니다.



인스타그램이나 다른 SNS도 많은 팔로워를 보유하고 계시는데, 노트폴리오를 계속 사용하시는 이유도 궁금해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방치되고 도태되는 플랫폼이 많은데 노트폴리오는 계속해서 개선사항을 업데이트하며 안정성을 더해가는 것 같아요. 그렇게 안정성을 더해갈 때 제 작업의 퀄리티도 더 좋아 보이는 효과가 있어서 노트폴리오를 꾸준히 이용하게 되는 게 아닐까 해요. 예전에는 좋은 창작가들을 소개해주고 조명을 받게 해주는 것에 그쳤다면 지금은 좀 더 창작가들의 생태계 조성에 이바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수업을 통해서 사람들의 새로운 재능을 발굴하도록 돕는 모습도 정말 좋고요. 이렇게 큰 그림을 꾸준히 그려 나가다 보면 미래엔 더 큰 위업을 달성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좋은 이야기 감사합니다. 다시 인터뷰로 돌아와서, 2017년 노트폴리오와의 인터뷰 이후 어떻게 지내셨나요?


2017년 쯔음 번아웃이 와서 정말 힘들었거든요. 무엇을 위해서 이 일을 하고 있는지? 나의 사회적인 위치, 직업에 대한 고민… 부정적인 생각들이 넘쳤어요. 그때 정신적으로 너무 피폐해서 살도 쭉 빠지고 반년간은 그림도 그리지 못했어요. 지금은 그 시기를 감기처럼 마음의 병을 잠시 앓던 시기라고 말하곤 하지만 그땐 정말 심각했습니다.



잘 이겨내신 건가요? 그 당시에 그렸던 고등어 그림이 나훔님의 거의 모든 SNS채널 프로필 사진이더군요.


어느 날 침대에 누워 무기력한 모습으로 티비채널을 빙빙 돌리다 우연히 다큐멘터리에 고등어가 나오는 장면을 보게 되었어요. 고등어들은 어망에 걸려 그것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이 몹시 처절하여 마음이 아팠고 동시에 살고자 하는 거친 생명력 같은 것을 느꼈습니다. 다음 장면에서 고등어들은 다양한 식당으로 팔려나가 손질되고 밥상 위에 올라갔습니다. ‘밥상 위로 오늘 올라가는 저 녀석들에겐 내일이 없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고등어>

그 순간 갑자기 그림이 그리고 싶어졌어요. 고등어가 저를 바라보며 “너에겐 그래도 내일이 있잖아”라고 말하는 모습을 떠올렸죠. 그림을 어떤 구성으로 그려야겠다는 고민도 없이 그냥 의식의 흐름대로 마구 그려 나갔어요. 그 이후로 저는 독일에 가서 1년 정도 생활했고 많은 부분을 극복해서 다시 한국에 돌아왔어요. 예전에는 바라보면 안 좋은 기억이 떠오르고 마음이 아픈 그림이었는데, 지금은 동서를 막론하고 남녀노소 많은 분이 관심을 주셔서 저도 기분 좋게 바라볼 수 있는 그런 애정 넘치는 그림이 되었습니다.



맞아요. 그즈음이었죠, 베를린에 다녀오신 걸로 알고 있어요.


2017년 당시 정신이 온전치 못할 때 그림을 그리지 못하는 자신을 보면서 ‘이건 정상적인 직업이 아니다’라고 혼자 정의를 내렸어요. 제가 제 생각이나 이야기를 그림으로 표현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그때 알았죠. 그래서 직업을 바꿔야겠다는 생각까지 했어요. 예전부터 왠지 모르게 베를린에 꼭 가보고 싶다고 생각했었는데 마침 독일에는 외국인 직업학교 같은 코스도 있다고 하니 일단 가보자고 생각한 거죠. 무작정 독일어학원을 끊었어요.


그곳에서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도 만나고, 낮은 건물들 사이의 자연도 만끽하고… 조금씩 치유가 되기 시작했어요. 삶의 본질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됐고요. ‘남들의 시선, 부의 축적, 일에 대한 욕심 등 불필요한 내 삶의 욕망을 천천히 덜어내면서 내가 삶을 이어 나가는 데 정말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에 대해서 생각하게 됐죠.



아무것도 없는 낯선 곳으로 떠나 자신의 기초를 이루는 것에 대해 고민하게 되셨군요. 그 생각들은 어디로 어떻게 흐르게 되던가요?


마침 봄이 오기 시작했어요. 앙상한 나무에서 새싹이 자라기 시작했고 움트는 자연을 보면서 저도 조금씩 살아나기 시작했어요. 그때부터 다시 그림이 그려지더라고요. 자연스럽게 직업을 바꾼다거나 하는 생각은 머릿속에서 사라지고 진짜 예술적인 삶이란 무엇일까 하는 생각에 집중하게 됐어요. 당시 오스카 와일드, 고흐, 릴케 등… 이미 떠나간 예술가, 문학가들의 이야기를 책으로 접하면서 용기를 얻었고 마음을 다잡기 시작했습니다.


연작 <놀라운 하루 (베를린1)> 중 일부


이윽고 ‘굶어 죽지 않는다면 내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창작을 하면서 살자’라고 제 삶의 방향을 정했어요. 그렇게 정신을 가다듬고 한국에 돌아왔죠. 지금 연고도 없는 강릉에서 나름 재밌게 창작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것은 그 시기 덕분이라고 생각해요.



신기한 게, 그렇게 힘들고 극복하는 시간을 보내셔서 그런지, 그 이후 그림에 따뜻한 깊이가 느껴지기 시작했어요.


그림 스타일도 많이 바뀌었죠. 2018년부터 아이패드를 사용하기 시작했거든요. 베를린에서 살면서 아이패드를 구입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정말 신세계를 만난 기분이었어요. 그전까지는 마우스, 타블렛으로 모니터를 보며 그림을 그렸는데, 직관적으로 그림이 그려지는 것도 재밌었고 간편하면서도 범용성이 넓은 인터페이스에 매료되었어요. 어디서든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점도 엄청난 메리트였고요. 디지털 작업임에도 불구하고 제가 좋아하는 유화, 아크릴의 느낌도 꽤 잘 살려준다는 생각이 들어서 요즘엔 아이패드만 사용하고 있어요. 상업작업에서 회화작업으로 넘어가게 된 계기가 되지 않았나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머니가 지어주신 이름인 ‘나훔’의 뜻이 히브리어로 위로자였던가요? 이전 그림에서는 냉소적인 태도로 웃음과 공감을 끌어냈다면, 지금 그림에서는 진짜 위로를 주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요.



작업을 하면서 ‘사람들에게 위로를 줘야지!’라는 생각하지는 않아요. 다른 창작가들도 마찬가지겠지만 첫 번째로는 결국 창작을 통해 본인 스스로 만족하고 치유가 되는 그 과정을 즐기는 것 같고요. 그것을 감상하는 사람이 동시에 위로받는다면 그 만족감이 배가 되는 것 같아요. 그 부분이 예술의 아름답고도 근사한 면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또한 위로를 주는 그림이 꼭 따뜻하고 아름다워야만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말씀하신 것처럼 이전에는 시니컬한 작업을 많이 했었는데, 돌이켜보면 당시에는 세상을 그런 자세로 대면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부조리하고 어딘지 불공평하고 답답하게 느껴졌던 사회의 모난 부분을, 그림으로나마 꼬집고 싶다-는 어떤 얄팍한 의지랄까요? 그런 그림을 보고 감상자들이 “사이다를 마신 것 같아요”, “속이 시원해요”라는 댓글이나 반응을 보여주시면 ‘이것도 이거대로 위로를 준거겠지~’하고 멋대로 생각했던 것 같아요.


<저녁의 위로>


지금은 그런 사회의 모난 부분을 눈여겨보려고 하고, 또 꼬집으려 하기보단 내 눈앞에 아름다움을 좇기도 바쁘다는 생각으로 전환이 되고 있습니다. 나이 때문인 것도 있고 환경이 바뀐 탓도 있겠죠. 강릉에선 계절, 자연의 변화를 더 빠르게 가까이서 느낄 수 있어서가 아닐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시니컬하고 그로테스크한 주제가 이젠 싫냐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에요. 늘 양극단의 취향이 다 제 안에 있거든요. 언제든 그런 작업을 할 마음은 있습니다.



그렇군요. 또 신기한 변화를 찾았는데, 이전에는 타이포그래피가 그림과 함께하여 포스터 같은 느낌을 줬다면 최근의 그림에서는 문자가 배제되었어요.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요?



연작 <내 친구 자연> 중 일부

여전히 한글에 대한 애정과 관심은 많아요. 다만 베를린에 있는 동안 언어적이나 문화적인 부분에 대한 한계점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됐어요. 그동안 미묘한 뉘앙스라든지 디테일을 살리는 한국적 정서를 갖고 노는 걸 좋아했는데요. 이 부분이 반대로 다른 국가의 문화권에서는 한계로 작용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게 됐어요. 글자로 소통하는 것도 좋지만 좀 더 시각적인 측면에서 소통하고 싶다는 욕심이 생긴 것 같아요. 아 그리고 강릉의 대자연에 매료된 탓도 있을 거예요.



이제 그림이 아닌 다른 창작에 관해 이야기해볼까요? 블로그와 브런치를 통해 긴 글도 쓰시더군요. 최근에는 노트폴리오 아티클의 필진으로 활동하고 계시잖아요. 덕분에 재미있게 감상했어요. 글을 본격적으로 쓰는 창작자는 드문 것 같은데,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나요?
노트폴리오 아티클에 게재된 김나훔의 글

저는 그저 어떤 경험을 하고, 감정을 느끼면 그걸 어떤 식으로든 기록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아요. 그게 그림일 때도 있고 사진일 때도 있고 글일 때도 있는 거고요. 보통은 아무도 물어보지 않는,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는 저의 일상 이야기를 주절주절 떠드는 걸 좋아하고요. 더 나아가 제가 경험한 어떤 일에 대해 이런 내용에 대해선 꼭 다른 사람과 의견을 나누고 싶다거나 난 이렇게 생각한다… 등 의견을 내비치고 싶을 때 글을 씁니다.



무언가를 경험하고 생각하는 빈도가 잦으신가봐요. 글의 양이 길 뿐더러, 자주 발행하시던데요. 그림도 자주 그리시고 글도 자주 쓰시고. 정말 부지런한 창작자 같으십니다.

요즘엔 좀 뜸한 것 같은데 그런 말씀을 해주시니 뜨끔하고 민망하네요. 그림도 겁을 먹고 돌고 돌다 비전공으로 시작했는데 글도 그렇게 겁을 먹었던 것 같아요. 막상 적어 내려가다 보니 정말 즐겁더라고요. 내 이야기를 가장 잘 쓸 수 있는 사람은 나 자신이니까 그렇게 솔직하게 접근하다보니 이렇게 됐네요.


지금도 글쓰기 실력은 몹시 부족해서 좀 민망하지만 어쨌든 저로선 솔직함이 무기인 것 같아요. 있는 말 없는 말 전부 빈칸에 쏟아붓고 그걸 또 고쳐 쓰면서 다듬다 보면 나중에 속이 후련하거든요. 중학생 때 국어 선생님이었던 담임선생님이 “글쓰기에 소질이 있는 것 같다.”고 말해주셨던 무척 소중한 기억 딱 하나가 있네요. 부족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저도 감정의 해소를 위해 글을 쓸 때가 있어서 후련하다는 나훈님의 말에 공감이 됩니다. 정기적으로 치러야하는 의식처럼 말이에요. 혹시 기록의 필요성을 느낄 때가 있으신가요?
연작 <독일 생활> 중 일부

늘 느껴요. 일단 기억력이 좋은 편이 아니라 제가 지나온 모든 일들이 글로 남았을 때 진짜 남는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생각, 기억이라는 게 제게는 너무 빠르게 휘발되어버리거든요. 메모의 개념으로 몹시 중요하게 생각해요. 지금도 아이폰에 수년째 적어나가는 메모어플이 있어요. 메모가 만개 가까이 되는데 저한텐 그게 정말 소중해요. 첫째는 그런 메모의 역할이고 둘째는 생각을 정리하는 개념인 것 같아요. 실제로 누군가에게 읽힌다고 생각하면서 글을 쓰다 보면 계속 고쳐 쓰게 되고 좀 더 문장을 매끄럽게 하려는 시도 속에 글쓰기의 쾌감이 있는듯해요.



글을 쓰고 자신의 경험과 생각을 정리하는 것이 그림을 그리는 창작자에게도 도움이 될까요?


제 그림에 대해서 소개할 때도 글은 정말 큰 힘이 됩니다. 베를린에서 작은 전시를 열었었는데 그때 제가 쓴 글을 번역가 친구에게 부탁해서 전시소개, 작품소개 글을 한글, 영문으로 준비했었거든요. 그때 제 고등어 그림에 담긴 이야기를 한 독일인 분이 보시고 작품을 구매하셨던 일도 있어요. 그분은 독일의 심리상담가이신데 지금도 그분이 일하시는 베를린의 심리상담소 한쪽 벽면에 그림이 걸려있다고 해요. 글을 기록하는 힘이 없었다면 아마 이런 뿌듯한 기회는 생기지 않았을 거예요.



앞으로를 위해 어떤 계획을 하고 있나요?


사람 김나훔으로서는 이제 결혼하고 가정이 생겼기 때문에 아내와 행복하게 우리의 일, 그리고 각자의 일을 오래오래 꾸려나가고 싶어요. 저희는 따로 거창하게 계획하지 않아요. 계획 없이도 더 효율적이고 유연한 판단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나훔 작가와 아내 성경 디자이너가 함께 운영하는 강릉의 편집숍 Oars

작가 김나훔으로서는 좀 더 확고한 나만의 ‘더미’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합니다. 작품집도 좋고 에세이집도 좋고 나를 대표할 수 있는 더 멋진 하나의 더미를 엮어내고 싶어요. 위에서 말한 것과 상충하는 내용이기도 한 것 같은데 그러려면 계획을 좀 짜기는 해야 할 것 같네요(웃음).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인생 짧대요. 하고 싶은 거 다 하면서 살아요 우리.



김나훔 작가

노트폴리오 | notefolio.net/nahum
인스타그램 |instagram.com/nahumkim
OARS|instagram.com/oars.kr





노트폴리오 [창작자와의 인터뷰]
창작자와의 인터뷰는 노트폴리오에서 활동하고 있는 창작자를 선정하여 창작자의 작업과 작업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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