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밥은 맛없다.

그래도 먹는다.

by 김용현

학교 식당은 맛없다.
주위에 식당이 없어 매번 의무방어전을 치른다.
학생도 교직원도 그렇다.
메뉴 제목은 호기롭다.
'옛날 순두부 국', '선비 콩자반', '찹쌀 오징어볶음'
뒤에 붙는 명사가 반찬의 본질이고
이를 꾸미는 어휘는 식권을 구매하게 만드는 힘이다.
물론 대량 급식이 맛의 세밀함을 잡지 못함을 안다.
기호의 개별성을 충족 못함도 안다.
공통으로 만들어 개별적으로 들어가는 음식의 질감이 다를 수 있다.
하지만 육천 원의 무거움을 알아야 한다.
그것은 설렁탕엔 못하지만 자장면에 버금가는 맛의 향응을 채워야 한다.
난 학교 식당의 체계를 잘 모른다.
대형 국 조림 기와 볶음용 팬을 보면
식사의 산업화와 효율화가 내재됨을 본다.
그 사이에는 정감이 상실된 밥이 있다.
일하다 먹으러 왔고
먹이는 일을 하며 밥을 먹는 사이만 존재할뿐이다.
다시 안을 들여다본다.
늘 분주히 돌아가는 저 안에서 국과 반찬을 만든다.
나이 든 아주머니들이 정신없이 움직인다.
영양사는 거북선을 지휘하는 이순신처럼 늠름하고 빠르게 돌아다니며 지시한다.
맛은 아주머니들의 손으로, 그 맛의 설계는 영양사의 머리로 결정된다. 머리와 손이 분리되어 창조되는 맛의 실체는 결합될 수 없고 아득하다.

그 아득함은 달고 짜고 맵지 절충선은 없다.
식단을 짜는 영양사의 머리는

허상 속에 실체를 가늠하며 설계하되

지난달 반찬을 참고해 재조립함으로

그것은 통계와 경우의 수에 근거하니

실체에 가깝고 보이지 않으니 에둘러 허상이다.
반복됨을 피하고 새로움처럼 보이지만

내실은 반복이고 다 그게 그거다.
아주머니들은 영양사의 허상이 구체화된 실체의 재료를 만지고 다듬어 대형 반찬통과 국통에 담는다.
나는 담는 아주머니의 표정을 봤다. 무거움에 고통스럽고 열기에 찌든 이마의 주름이 온전히 삶의 할퀴로 서린다.

먹고사는 이의 고통이 먹고사는 이의 식판에 담긴다.
다시 요리로 넘어간다.
요리는 불과 시간의 싸움이다.
익히는 세기에 따라 맛의 질감이 다르다.
세기는 시간으로 다시 분류되어 치아의 감각과 닿는다. 시간은 재료의 성숙과 닿는다.
긴 시간이 주는 깊음과 부드러움, 찰나에 투입되는 재료의 신선함과 단단함은 씹고 넘김으로 느낀다.

이토록 예민한 식재료의 가냘픔은

대량 급식의 속도와 효율 앞에 무참하다.


먼 글을 썼는지 모르겠다.
여하간 육천 원 내고 먹는 식당밥이 싫어 쓴 글인데
그냥 먹어야겠다.
원래 사는 건 다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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