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선택하도록 돕는 일
주변에서 가끔 묻는다.
피아노 배우고 싶다고 먼저 얘기한 둘째 딸이 성실하게 연습해서 좋은 결과물을 내놓을 때면, 사람들은 곧잘 말한다.
"엄마가 피아니스트니까, 딸도 타고난 재능이 있겠지~"
하지만 단 한 번도 그런 말에 마음이 흔들린 적 없는 나는 단호하게 대답한다.
"전공은 무슨, 재능 없어."
그런데도 고사리 같은 손으로 건반을 정성스레 누르고, 내가 건넨 조언을 스스로 터득하거나 몰입하는 모습을 보면 문득 이런 생각이 스치기도 한다.
혹시 이게 재능의 신호일까?
하지만 곧 마음을 다잡는다. 세상에는 너무나 많은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으려 애쓴다. 아이의 미래를 단 한 곳에 묶어두고 싶지 않아서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내 인생의 큰 결정을 내렸다. 아니, 사실 결정했다고 믿었다.
좋아하는 피아노를 내려놓고 싶지 않은 마음은 엄마도 마찬가지였나 보다. 어느 날 엄마가 물었다.
"네 생각은 어떠니? 피아노를 계속할지, 그만둘지 이제 결정해야 해. 매일 다섯 시간씩 연습할 자신이 있으면 전공을 택하고, 그렇지 않으면 그만하자."
순수했던 마음에, 피아노와 헤어질 수 없다는 이유로 바로 "있다"고 대답했다. 그렇게 나는 전공의 길에 들어섰다. 정말 매일 다섯 시간씩 연습했다. 그만둘 수 없었으니까. 내가 스스로 약속한 거니까.
그런데 이제 와 돌이켜보면, 말도 안 되는 질문이었다. "피아노 계속할래? 말래?"라는 양자택일 말이다.
13살에 "자신 있다"고 말한 이유는 단순했다. 피아노가 좋았으니까. 그러나 내가 진짜 직면해야 했던 어려움들, 무대 위에서 넘어지고 다시 일어나야 했던 순간들을 상상조차 하지 못한 나였다. 그 무지한 가운데 했던 용감한 선택이 내 인생을 이끌었다. 물론 화려한 순간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진짜로 1할에 불과했다. 나머지 9할은 수없이 반복된 연습과 그 과정에서 마주한 외로움, 질문, 그리고 끈기였다.
지금은 가끔 생각한다. 피아노가 아니더라도 내가 걸어간 다른 길에서도 나는 결국 프로가 되었을 거라는 당찬 생각. 결국 중요한 것은 어린 시절의 재능이나 좋아함이 아닌, 엉덩이 힘과 태도 그리고 끝까지 버티는 성실함이었다.
"피아노를 전공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피아노는 내게 삶의 의미를 깨닫게 해 준 스승이었다. 다만 아이가 스스로 선택하지 않은 길을 걷게 하고 싶지 않을 뿐이다. 나는 피아노를 선택했지만, 때로는 그 선택이 완벽히 자유롭지 못했음을 인정한다.
그래서 나는 딸에게 자주 묻고 싶다.
행복이라는 질문이 너무 추상적일지 모른다. 그러나 딸이 스스로 묻고, 답할 시간을 충분히 가졌으면 한다. 아이가 선택할 길은 피아노가 아니어도 괜찮다. 음악이 아니어도 상관없다. 무엇이든 상관없다. 중요한 건 그녀가 스스로 삶의 악보를 그려가며, 자기만의 리듬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삶은 연습실보다 훨씬 더 복잡한 악보를 품고 있다.
그 악보는 단순하지 않을 것이다. 실수도 많고, 때로는 고칠 수 없는 음표가 적힐 때도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모든 악보를 스스로의 손으로 그려나간다는 것이다.
나는 딸이 스스로의 인생을 연주하는 연주자가 되기를 바란다. 그녀가 어느 무대에 서든, 어떤 악기를 들든, 그것이 단순히 누군가를 위한 음악이 아니라, 그녀 자신을 위한 음악이기를.
어떤 길을 걷든, 그 길이 반드시 평탄할 필요는 없다. 어쩌면 길이 울퉁불퉁하고, 때로는 막다른 곳에서 멈추게 되는 순간들이야말로, 스스로의 발걸음을 다시 돌아보고 더 단단히 내딛게 해주는 기회가 될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 길이 자신의 선택이었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삶의 고비마다 다시 일어날 용기를 준다.
삶이라는 무대는 각자 다른 악보로 채워진다. 나는 딸이 그 악보를 남이 아닌 스스로의 손으로 그려가길 바란다. 그리고 그 선율이 힘든 날에는 위로가 되고, 기쁜 날에는 축제가 되기를...
건반 밖 엄마, 서나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