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목소리를 듣는 삶
좁은 연습실에서 내가 연주하는 음색을 듣기란 어려웠다. 분명 소리를 내고 있는데, 내 귀엔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나는 듣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선생님은 늘 "왜 듣지 않느냐"고 물었다. 어떻게 들어야 하는지 배워도, 마치 귀가 닫혀있는 기분이었다.
그 시절, 다른 사람의 소리는 너무 잘 들렸다. 내가 흠모하던 피아니스트의 연주를 모방하고 따라하는 게 흥미로웠다. 그들의 몸짓, 표정, 음과 음 사이의 타이밍까지 따라 하면 내 음악도 멋스러워질 것 같았다. 그렇게 하면 나도 그들과 닮아갈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제대로 듣지 못하는 상태에서 보여지는 것과 들리는 것을 흉내 내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어느 순간, 연주는 했지만 그 음악이 내 것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그들의 음악을 자세히 듣기 시작했다. 반복해서 많이 듣고, 낱낱이 쪼개 세밀하게 들었다. 음정과 리듬만이 아니라, 음과 음 사이의 쉼, 건반이 눌리는 깊이, 페달이 남기는 잔향까지. 그렇게 섬세하게 듣다 보니, 들리지 않던 소리가 마음으로 들리기 시작했다. 더 놀라운 것은, 단지 물리적 소리가 아니라 마음을 움직이는 언어로 들리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그제야 알았다. 내가 타인의 연주를 대할 때는 남다른 섬세한 듣기로 마음을 기울였다는 것을. 그렇다면 나는 나의 연습, 나의 연주 역시 섬세하게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도. 그래서 선택한 방법이 나의 소리를 녹음하는 일이었다. 마치 타인의 연주를 듣듯, 나의 연주를 조금 더 객관적으로 바라보기 위해서. 내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자, 비로소 제대로 연습할 수 있었다. 내가 원하는 음색을 위해 어떻게 터치해야 하는지, 페달은 얼마나 깊게 밟아야 하는지, 어떤 타이밍에 음을 눌러야 하는지 분석하고 적용했다. 그렇게 마음에 합한 소리로 연주되었을 때 느낀 희열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었다.
피아노 연습에서 간과하기 쉬운 부분이자 가장 어려운 과제는 '나의 소리를 듣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내가 내는 음을 물리적으로 듣는 것을 넘어선다. 진짜 중요한 것은 '내가 원하는 소리를 내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는 것이다. 그 소리가 청중에게 어떻게 전달되고, 어떤 감동을 줄 수 있을지까지 상상하며 연습해야 한다.
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음악의 외적인 요소, 즉 정확한 음정, 곡의 흐름에 맞는 다이내믹, 그리고 음색의 질감을 섬세하게 구별하는 물리적 청각이다. 다른 하나는 그 소리가 내면에 어떤 감정을 불러일으키는지, 그리고 그것이 곡의 의미와 어떻게 어우러지는지를 느끼는 정서적 공감이다. 이 두가지를 동시에 단련해야 하기 때문에 음악에서 듣는 훈련이 매우 중요하다.
삶에서도 우리는 수많은 소리에 노출되어 있다. 알람으로 눈을 떠 누군가의 목소리, 음악, 영상, 대화 등 외부의 소리를 들으며 하루를 보낸다. 나 이외의 것, 혹은 누군가가 내는 소리를 듣고 반응하는 데 익숙하다. 하지만 정작 내가 내는 소리, 내 마음의 소리를 듣는 일에는 얼마나 소홀한가?
어릴 적 나는 부모님께 나의 마음을 이야기하는 법을 몰랐다. 내가 하고 싶은 것보다 부모님이 좋아하실 것을 찾는 데 더 익숙했으니까. 기대에 부응하며 살았던 나는 칭찬받기 위해 노력했고, 부모님께 기쁨을 드리는 것이 내 선택의 기준이 되었다. 그들의 말에는 예민했지만, 내 마음의 소리는 듣지 못했다. 그렇게 나는 나의 소리를 억누르고, 타인의 소리에만 귀를 기울이는 연습을 했던 것 같다.
대학에 진학하면서 스스로 결정을 내려야 할 순간들이 찾아왔다. 그때마다 나는 막막함을 느꼈다. "내가 진짜 원하는 게 뭘까?"라는 질문이 낯설고 두려웠으니까. 하지만 연습했다. 내 마음을 읽는 연습. 그 중 하나가 읽고 쓰는 일이었다. 사소한 감정도, 순간적인 느낌도 모조리 적고 소리 내어 읽었다. 객관적으로 바라보며 내 안의 내가 무엇을 말하는지 귀 기울여 들었다. 그제야 비로소 나의 소리를 듣기 위한 첫걸음을 내디딘 것 같았다.
시간이 흘러 내 마음에 진심으로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을 때, 부모님의 진짜 마음도 들리기 시작했다. 부모의 기쁨은 자녀가 부모의 기대를 채우는 것이 아니라, 자녀 스스로 행복해지는 데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치 헤르만 헤세의 <크눌프>에서, 죽음을 앞둔 크눌프가 "난 왜 훌륭한 인간이 되지 못했을까요?"라고 한탄했을 때, "난 오직 네 모습 그대로의 널 필요로 했다."는 하나님의 말씀에 그제야 편안하게 누웠던 모습처럼 말이다.
사실 그런 훈련 후에 결혼을 한 건 너무 다행이다. 하루에도 수십 번 나를 부르는 아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그 언어를 이해하며 지혜롭게 반응하기 위해서는 먼저 나의 소리를 듣는 과정이 필요하니까.
내 마음의 소리를 들을 때, 비로소 다른 이의 마음도 제대로 읽을 수 있었다. 피아니스트의 연주가 끝난 뒤 고요히 울리는 숨소리와 공기의 떨림까지 귀를 기울이듯, 나 자신의 내면에도 그렇게 귀 기울여야 함을 깨달았다. 나는 지금 무엇을 속삭이는가? 그 소리는 진정으로 나를 드러내고 있는가?
결국 나의 소리를 듣는 일은 나 자신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익숙하지 않아도, 때로는 불편해도, 나는 계속 귀를 기울이려 한다. 내 안에서 흐르는 그 소리를 놓치지 않기 위해. 그리고 언젠가, 그 소리가 온전히 나를 닮아 있을 때, 나는 조금 더 나다워질 수 있기를.
건반 밖 엄마, 서나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