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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작‘처럼 살아온 인생들에게

이력서에 쓴 시, 손택수

by 서나송

올해의 마지막 한 달을 남겨두고 나니, 마음이 괜히 분주해진다. 계절이 넘어갈 때마다 나는 습관처럼 나를 돌아보게 된다. 잘 살았는지 물어보고, 혹시 너무 못 산 건 아닐지 반성해본다.



열심히 살았다.

정말, 열심히.

매 순간 성실하려 애썼고,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하루를 건너왔다고 믿고 싶다.

그런데 연말이 되니 묘하게도

이렇다 적을만한 나의 성과들이 너무 없다.


선명하지 않은 결과물 앞에서

이루지 못한 계획들이 더 또렷하게 떠오르고,

미루어둔 일들과

놓쳐버린 기회들만 헤아리게 된다.

이룬 것 보다 시작도 못한 일들이 많이 보인다.



그 사이,

누군가는 크고 분명한 열매를 들고 서 있는 것 같다.

누군가는 단숨에 몇 계단을 올라

다음 계절로 넘어간 것처럼 보이고,

누군가는 정상에서 만세를 외치는 것 같다.


나만 제자리걸음을 하는 것 같고,

나만 유독 더딘 사람처럼 느껴질 때,

내가 살아온 하루들이 괜히 ‘고작’처럼 보인다.



고작 이 정도?

고작 이만큼?



눈에 보이는 결과가 없다는 이유로

내 시간을 결코 무의미하게 보낸 것이 아님에도

당당하지 못한 마음이 드는 건 뭘까?

한 해가 그냥 그렇게 가버린 느낌이다.


머리로는 안다.

눈에 보이는 걸 이루지 못했다고 해서

결코 헛된 삶을 산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아무것도 하지 않은 시간과

보이지 않게 애쓴 시간은

결코 같은 무게일 수 없다는 것을.


그런데도 마음 한쪽이 자꾸 가라앉는다.

알면서도 서운해지고,

이해하면서도 허전해진다.

보이지 않는 내 안의 것들은

분명 많이 자라고 있었는데.


조급해지는 나를 들여다보며 다독였고,

무너지는 밤들을 스스로 일으켜 세웠고,

참아내야 할 순간을 도망치지 않고 견뎠고,

돌아서는 법보다 머무는 법을 배웠고,

포기하는 대신 조금 덜 미워하는 법을 익혀가고 있었다.

일년동안 그렇게 최선을 다해 살았다.

그런데 그런 것들은 어디에도 적히지 않는다.

보여지는 공간에는 도무지 적을 수 없는 나의 진짜들이다.



문득 손택수 시인의 시 <이력서에 쓴 시>가 떠오른다.



생년월일 사이엔 할머니의 태몽이 없고

첫 손주를 맞은 소식을 고하기 위해

소를 끌고 들판에 나가셨다는 할아버지의 봄날 아침이 없고

광주고속 거북이 등을 타고 와서 여기가 용궁인가

동천 옆 고속터미널에 앉아 있던 소년의 향수병이 없고

길바닥보단 지붕을 좋아해서

못을 징검돌처럼 밟고 슬레이트 지붕을 뛰어다니던

도둑괭이 문제아가 없고

가난하고 겁 많은 눈망울을 숨기기 위해

아무데서나 이를 드러내던 청춘이 없고

남포동 통기타 음악실 무아에서 허구한 날

죽치고 앉아 있던 너를 그냥 보내고 시작된

서른 몇 해 동안의 기다림이 없고

신춘문예 응모하러 가던 겨울 아침

그게 무슨 입사지원서나 되는 줄 알고

향을 피우고 계시던 어머니가 없고

참 신기하지 재가 되었는데 무너지지도 않고

창을 비집고 든 바람 앞에서 우뚝하던 향냄새가 없고

늦깎이 근로 장학생으로 대학에서 수위를 보던 그때

일하면서 공부하느라 고생이 많다고, 힘내라고

밥을 사준 이름도 모를 그 행정실 직원이 없고

이후로 나를 지켜준 그 밥심이 없고

이력서엔 영영 옮겨올 수 없는 것들이 있어

구겨진 이력서에 나는 시를 쓰고 있네​​


손택수




이력서에는 쓸 수 없는 나의 이력들이 있다.

어쩌면 내 삶의 대부분이 그렇지 않을까.


무너지지 않기 위해 애쓴 밤들,

티 나지 않게 울고 티 나지 않게 버텨온 시간들,

사람을 미워하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설득하던 순간들,

아무도 모르지만, 나는 분명 달라지고 있었던 그 시간들.

그 모든 것은 그 어느 칸에도 들어가지지 않는다.



연말이 되면 늘 같은 질문을 하고 답을 얻는다.

무엇을 이루었는가.

하고자 하는 것들을 많이 해냈는가.

그 답은 늘,

여전히 부족한, 고작 이것밖에는.



하지만 이제 질문의 방향을 바꿔보련다.


나는 매 순간 성실하게 반응했는가.

나는 주어진 하루에 감사를 택했는가.

나는 무너지지 않고 잘 견뎌냈는가.

나는 내 마음을 잘 지켜냈는가.


이런 질문들 앞에서는 더 이상 초라해지지 않는다.

정말 그렇게 살았으니까.

비록 겉으로 남은 것이 많지 않아도, 나는 안다.

이 한 해 동안 나는

조금 더 단단한 사람이 되었고,

조금 덜 날 선 사람이 되었고,

조금 더 나를 이해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그건

‘고작’이 아니다.



타인에게 제출하는 이력서에는 적을 것이 없다해도

내가 매일 적는 일기장에는

하루도 빛나지 않던 날이 없었으니.


참 잘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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