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모 있다고 착각하는 것
이사를 준비하는 요즘, 하루가 피폐해질 만큼 정신이 쏙 빠져 있다.
눈을 감았다 뜨면 새 집에 모든 짐이 정갈히 들어앉아 있고,
나는 몸만 옮기면 되는 기적 같은 일이 벌어지면 좋겠지만
현실은 늘 반대였다.
비워내는 일은 왜 이렇게 어렵고 지난한 걸까.
살면서 처음 알았다.
내 집에 쓰레기가 이렇게나 많다는 것을.
냉장고 한 칸을 정리하다 당황스러웠다.
먹다 남은 소스, 이름 모를 페이스트,
냉동실에서 화석처럼 굳어버린 정체 모를 것들.
한때는 필요해서 들였을 테지만
지금은 존재 자체가 잊힌 것들.
대체 왜 이렇게 쟁여두었을까.
‘언젠가 쓸 거야’라는 말로 스스로를 달래며
손 닿지 않는 구석에 밀어둔 것들.
그 뒤편에 숨어 있던 건
미련과 욕심, 그리고 불안이었다.
박스도 뜯지 않은 새 물건이 있었고
유행이 지나 손이 가지 않는 것들도 있었다.
버리자니 아깝고, 나누자니 미안하고,
손을 뻗으면 마음 한 켠이 죄스러웠다.
결국 음식쓰레기 봉지는 금세 묵직해졌고
재활용 상자는 순식간에 차올랐다.
나는 내 돈과 시간을 써서 쓰레기를 산 걸까.
버리는 건 생각보다 훨씬 어려웠다.
아까움, 미련, 죄책감 같은 것들이
내 손을 잡아끄는 느낌이었다.
있는지도 몰랐으면서,
한 번도 찾지 않았으면서 말이다.
유통기한을 훌쩍 넘긴 음식들을 보며
문득 마음이라는 냉장고도 떠올랐다.
내 마음 안에도, 이렇게 방치된 것들이 있지 않을까.
제때 꺼내지 않으면 상하고,
간직해도 무의미해지고,
붙잡고 있으면 마음을 병들게 하는 것들.
삶에서 가장 버리기 어려운 건
쓸모 있는 것이 아니라
쓸모 있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마음일지도 모른다.
정말 나에게 필요한 것인가,
아니면 ‘놓기 싫어서’ 쥐고 있는 것인가.
솔직히 말하자면, 많았다.
쓸모는 없는데 놓기 싫어 붙든 감정들,
나눌 필요 없는 무게들,
떠나오지도 못한 마음의 장소들.
그러나 버림은 잃음이 아니었다.
서랍을 하나 비울 때마다
퇴적물 같은 마음이 조금씩 걷혔다.
물건이 빠져나간 자리엔
작은 공간이 생겼고,
그 공간이 생기자
숨 쉴 여지가 생겼다.
‘언젠가’를 믿고 끌고 오던 미련들,
지금의 나에게 불필요한 감정들을 정리하는 일이
이토록 절실한 일이었다니.
그제야 이해했다.
새 집으로 들어가기 위해 오래된 집을 비우는 일이 필수이듯
새로운 나로 가기 위해
오래된 마음을 비우는 것도 필수라는 것을.
그동안 나는
버리지 못해서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꽤 오랫동안 쓰레기를 쥐고 살았다.
부끄러운 자백이지만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누군가를 용서하기 전에는 미움이 꽉 차 있었고,
나를 돌보기 전에는 희생이 넘쳐났고,
무언가를 시작하기 전에는 두려움이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버려야 할 것을 손에 쥔 채
새로운 공간을 맞이할 수는 없다.
새로운 마음은
가득 찬 사람에게 오지 않는다.
비워낸 사람에게 온다.
이사를 준비하며 매일 쓰레기를 꺼냈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은 가벼워졌다.
채우는 삶보다
제때 비우는 삶이 더 단단하다는 걸
비로소 깨달았다.
살아가기 위한 비움,
시작하기 위한 놓음.
그동안 쥐고 있었던 쓰레기들,
나라고 착각했던 낡은 마음들,
놓기 싫어서 붙들어온 모든 것들을
천천히 정리해보려 한다.
다행이다.
나의 마음은
이미 먼저 이사를 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