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싶은 것만 봐도 괜찮아

더하기보다 덜어냄

by 서나송

어릴 적 우리 가족의 여행은 거의 수학여행에 가까웠다. 계획형 부모님 덕분인지, 여행엔 언제나 일정표가 따라붙었다. 꼭 가야 할 명소, 들러야 할 유적지, 빠짐없이 채워야 할 하루. 아침 일찍 출발해 저녁 늦게 숙소에 도착할 때까지, 보고, 알아야 하는 것들로 하루는 빽빽했다. 그 안엔 ‘쉼’이라는 단어는 없었다. 맛집을 찾아다니는 문화도 드물었고, 인터넷도 없던 시절이라 종이 지도와 손글씨 메모에 의존해 계획을 세웠다. 어느 도로를 탈지, 어느 휴게소에 들를지, 모든 것이 철저하게 짜여 있었다.


그 여행들이 싫었던 건 아니다. 하지만 내가 기억하는 가장 생생한 장면은 유명한 명소가 아니라, 아빠 차 뒷좌석에 앉아 창밖 풍경을 멍하니 보며 과자봉지를 들고 수다 떨던 시간이다. 그저 흘러가는 풍경 속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여행 같았다’. 반대로 목적지에 도착했을 땐 이상하게도 피로함이 먼저 밀려왔다. 마치 숙제를 하듯, ‘거기까지 갔으니 봐야 하는’ 무엇. 해야 하는 감상. 놓쳐선 안 될 것들. 언젠가부터 여행은 정보 수집이자 수행 과제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였을까. 나에게 여행은 ‘덜어냄’이 되어야 했다. 마음과 머릿속을 가득 채운 것들 중, 불필요한 것들을 털어내는 시간. 계속 굴리던 생각이 멈추고, 조여오던 의무감이 흩어지는 순간. 그게 내가 꿈꾸는 여행이었다. 보고 싶은 걸 보고, 그 장면이 마음에 오래 남는다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믿고 싶었다. 모든 걸 다 해야 한다는 강박, 다 챙기지 않으면 손해라는 불안감이 더는 나를 따라오지 않았으면 했다.


결혼 후 그 마음은 조금씩 구체화되었다. 남편에게 여행의 목적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바다가 되었든, 산이 되었든, 그곳이 나에게 쉼이 될 수 있다면 충분하다고 했다. 처음엔 낯설었다. 돌아다니는 게 더 익숙했고, 들인 시간과 비용을 생각하면 한 군데라도 더 가야 한다고 믿었으니까. 계획 없는 시간은 허비 같았고, 빈 일정은 뭔가 빠진 것 같았다. 하지만 남편을 통해 알게 되었다. 머무는 것만으로도 충만한 시간이 될 수 있다는 걸. 그리고 ‘쉼’이라는 말이 단지 멈춤이 아니라 ‘회복’이라는 걸.


부산 여행은 내 마음을 실천으로 옮긴 도전이었다. 짐을 쌀 때부터 ‘넣기’보다 ‘덜어내기’를 실천했다. 예매한 기차표, 예약한 숙소. 그 외엔 아무 계획도 세우지 않았다. 마음속에도 단 하나만 있었다. 바다. 바다 하나면 족했다. 무엇을 먹든, 어디를 가든, 다 부차적인 일이었다.


기차 안에서도 마찬가지였다. 2시간 40분이라는 시간 동안 평소 같았으면 ‘부산 맛집’, ‘근처 명소’, ‘아이와 부산 2박 3일’ 같은 검색어를 열심히 저장했을 것이다. 알찬 계획이 곧 좋은 여행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핸드폰을 가방에 넣고, 사두고 읽지 못했던 책을 꺼냈다. 한 줄 한 줄 따라가며 마음이 풀어졌다. 인터넷 정보는 금세 사라지지만, 문장은 오래 남았다. 책 속 문장에 나의 사유가 이어지고, 마음이 확장되는 느낌. 가장 가볍게 넣었던 책이 내 마음을 가장 깊이 채웠다는 걸 알게 되었다.


부산에 도착했을 때, 계획 없는 발걸음이 그렇게 가벼울 수 없었다. 오직 바다만을 떠올리며 온 여행이었기에, 기다리지 않아도 바다는 분명히 내 앞에 펼쳐질 테니까. 도착한 날의 하늘은 어둑했고, 바다의 끝은 흐릿했지만, 그 풍경이 더 위로가 되었다. 출렁이는 파도소리와 짠내 가득한 공기만으로도, 그곳이 바다라는 걸 느낄 수 있었으니까. 보이지 않아도 느껴지는 것들이 있다는 말처럼, 그날의 바다는 조용히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어떤 지도에도 없는 감정이, 그 바다에는 있었다. 시시각각 바뀌는 색과 반짝이는 윤슬, 일렁이는 물결. 단 한 번도 같은 얼굴을 보여준 적 없는, 그 순간에만 존재하는 바다. 언제든 갈 수 있지만, 언제든 볼 수 있는 모습은 아니었다. 설명을 듣지 않아도, 안내판을 읽지 않아도, 그저 느끼고 바라보는 것으로 충분했다. 그 바다는 내가 기대한 것보다 더 깊이 나를 어루만졌고, 나를 비워내고 다시 채워주었다. 바다를 눈에 담는 순간, 어떤 의무도, 일정도, 목표도 사라졌다.


‘봐야 한다, 먹어야 한다,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말들 사이에서, 나는 늘 무언가를 확인하듯 움직여왔다. 하지만 내려놓고 나니, 보였다. 내 마음이, 내 아이가, 그리고 바다가 전해준 조용한 위로가.


뭘 보든, 뭘 먹든 상관없는 날들. 내게 꼭 필요했던 여행의 방식이었다. 나는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가장 많은 것을 누렸다. 해야 할 일을 내려놓고 나니, 비로소 하고 싶은 일이 남았다. 내 안의 강박을 덜어내고, 느낀 것들로 마음을 채운 시간.


'내 마음이 가리키는 것만 보기'

그걸로 충분하다면, 더는 욕심내지 않아도 괜찮다는 말.

그 말이, 지금도 내 마음을 잔잔하게 울린다.



서나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