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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착한여성들 Jan 25. 2023

당신, 잘 보고 있나요?

'눈'에 대하여

     


 안녕하세요. 안수입니다. 새해에도 당신을 보게 되어 반갑습니다. 


 이번 주제가 ‘눈’인데요. 구면인 분들은 알겠지만 저는 그렇게 낭만파는 아닙니다. 겨울하늘에서 하늘하늘 떨어지는 눈꽃에 얽힌 사연이 별로 없습니다. 돌이 든 눈뭉치에 맞아서 멍이 들던 폭력의 시절 같은 거면 몰라도…. 낭만적인 일이 생긴다면 언젠가 적어보겠습니다.     

 1월의 둘째 주에 아마 제 글이 도착할 텐데요. 본격적으로 새해를 살아가기 전에 우리, 스스로에 대해 점검을 좀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잘 가동되는지, 어디 고칠 데는 없는지.     

 그리하여 제가 준비한 눈 이야기는 하늘에서 내리는 눈이 아니라, 우리의 눈에 대해서입니다. 한 번 눈을 점검해봅시다. 저는 친절한 점검 직원은 아닐 겁니다. ‘안착한’ 여성이니까 아무쪼록 이해해주시기를. 먼저 이 글을 보고 있는 당신은-     



 보여요?”



 나는 당황스러웠다. 엄마, 아빠가 보여요? 분명 오늘 아빠를 보러 ‘아버지합창단’의 연말 공연에 찾아왔는데, 무대로 들어오는 통통한 아저씨들 사이에 우리 집 아저씨가 보이지 않았다. 장발 아저씨, 안경을 쓴 동글한 아저씨, 키가 2미터는 될 법한 아저씨… 스무 명 정도가 자리를 잡고 섰다. 지휘자가 나오고 노래가 시작되었다. 나는 멀뚱멀뚱 엄마를 바라보았다. 이게 뭔 일이람? 그런데 나를 바라보는 엄마의 표정이 딱 이랬다.     


 ‘넌 어쩜 그렇게 눈썰미가 없니….’


 엄마는 미간에 우아하고도 깊은 주름을 잡으시더니 합창단 가운데 부근을 가리켰다. 아까 본 안경 쓴 동글한 아저씨. 아빠랑 비슷한 체형인데 안경을 쓴… 어, 아빠다! 이제 보니 아빠가 웬 짙은 뿔테 안경을 쓰고 있는 것이었다. 가끔 방에서 안경 쓰고 책 읽는다는 건 알았지만 밖에서 안경을 쓴 모습은 처음이었다. 몽골인 급 시력을 가지고 있는 아빠가 안경을 썼다니! 2시간의 공연 동안 노래보다도 아빠의 낯선 얼굴이 더 흥미로웠다. 뚱뚱한 스티브 잡스 같군….     

 

무사히 공연을 마친 아빠를 공연장 밖에서 만났다. 아빠는 안경을 안경집 안에 넣고 있었다. 안경 쓰니까 아빠를 못 알아봤지 뭐예요, 농담 삼아 말하니 아빠가 답했다. “안경을 안 쓰면 악보가 안 보여서.”


 아빠도 벌써 오십 줄에 들어섰으니, 어느새 노안(老眼)이 본격 찾아왔다. 나이가 들면 점점 가까이에 있는 것들이 보이지 않는 자연스러운 노화 현상. 아빠는 책이나 악보 같은 활자들은 영 흐릿해 보여서, 이제 안경 없이는 보지 못한다고 말했다. 이야기를 들으니 마음이 일렁일렁 이상했다.      


 맨눈의 아빠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집에 돌아왔다. 엄마가 합창단원을 위한 와인을 따고 있을 때, 나는 내 방 피아노 앞에 앉았다. 항상 악보가 잔뜩 쌓여있지만 읽어보는 건 오랜만이었다. 하얀색 종이 위에 검은색 잉크로 새겨진 수많은 오선보. 촘촘한 다섯 개의 줄들이 쭉쭉 그려져 있다. 그 촘촘한 줄 사이사이 혹은 줄 위에 알알이 박혀있는 조그마한 음표와 쉼표들. 음표의 기둥에서 자그맣게 삐져나온 꼬리. 보일 듯 말 듯 찍혀있는 점사분음표의 점들. 이곳저곳의 샾(#)과 플랫(b)과 같은 기호들….      

 내 눈엔 다행히 잘 보였다. 당연하다. 이제 겨우 스물넷이니까. (만 나이는 스물 둘!) 그런데 아빠는 이게 잘 안 보인다는 거지. 아빠의 시야처럼, 악보가 흐릿해보이도록 눈을 반만 떠보았다. 속눈썹들의 검은 잔상들 사이로 흐릿하게 보이는 검은 음표들이 혼란스러워 보였다.                   


 갑자기 의문이 들었다. 내가 이렇게 ‘째깐한’ 활자들을 보며 살고 있었나? 어쩌다 이렇게 작은 것들이 표준이 되었던 거지? 쌓여있는 악보들을 죄다 살펴보았는데 전부 작고 불친절한 녀석들뿐이었다. 아니, 세상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눈이 안 좋은데. 우리 아버지보다 나이 많은 사람들이 세상 천지에 널렸다. 사람마다 눈이 두 개 있다 치고 계산해보면, 수십억의 눈알들은 표준 크기의 오선보를 맨눈으로는 읽기 힘들다는 게 된다.    

  

 반골 기질이 우글우글 끓어올랐다. 왜 문서들은 죄다 10, 11포인트지? 공책의 한 줄은 손가락 한 마디도 안 되나? 어릴 때는 칸이 넓었는데 왜 점점 칸이 좁아질까.

 만약 표준이 더 커진다면 ‘노안’의 시기도 달라진다. 보통 책의 활자가 잘 읽히지 않는 무렵에 노안이 왔다고 생각하니 말이다. 만약 활자가 13포인트 이상이 기본이 된다면, 오선보의 음표가 더 크게 그려진다면 노안이 시작되는 나이는 지금보다 5년은 늦게 되리라.     


 새삼 시력은 상대적이고 정치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우리는 안과에서 하얀 전광판 같은 곳에 거꾸로 그려진 ‘C’ 모양과 숫자를 읽고 1.0, 0.3과 같은 절대적인 수치로 시력을 측정한다. 그러나 그 숫자는 숫자일 뿐. 압도적으로 작고 흐리게 적어놓으면 아무리 눈이 좋은들 보이지 않는다. 아주 큰 글자들은 시력이 좋지 않아도 잘 보인다.

 세상에 중요한 것들은 항상 작게 쓰여 있다. 보험 광고를 보면 정말 중요한 약관은 너무도 작은 글씨로 순식간에 지나가버린다. 블로거들의 ‘본 게시글은 협찬을 받아 작성된 글입니다’과 같은 글귀는 글 마지막에 유달리 작고 흐리게 적혀있는 법이다. 반면 지역 정치인들의 자기 칭찬 현수막, 식당 전화번호, ‘안 믿으면 지옥 떨어진다.’는 피켓이나 ‘안착학원 XX고 유안수 학생 하늘대 진학’ 이런 것들은 큼직큼직해서 잘도 보인다.      

 새해를 맞아 굳이 시력 검사를 하러 안과에 갈 필요는 없다. 세상을 돌아다니면서, 중요한 게 얼마나 보이는지 확인해보면 된다. 보험 광고가 아무래도 괜찮을 것 같다. 다양한 크기의 활자들이 많으니 말이다. 흐릿하게 보이는 것들, 섬광처럼 사라지는 것들. 시선으로 잡아채지 못하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런데 시력 외에도 고려할 게 더 있는 것 같다.          



 어디 있어요?”      



 피곤한 키즈카페 알바생의 앞치마를 붙잡는 고사리 손이 느껴진다. 이번 꼬마 손님은 어떤 용건이실까. 다리를 굽혀 아이와 눈을 맞추었다. 나도 큰 키는 아니지만 새삼 아이들은 참 작다. 내가 물었다. 뭐를 찾아요?

    

 “정수기 컵이요.”


 아이는 정수기를 가리켰다. 아아, 누가 또 높이 당겨놓았다. 내가 일하는 키즈카페는 정수기의 일회용 컵을 기다란 홀더에서 하나씩 뽑아먹어야 한다. 그런데 이게 정수기에 자석으로 붙어있다. 주로 어른들이 물을 자주 마시니까 자꾸만 컵 홀더를 정수기 위쪽으로 당기는 것이다. 얼른 컵을 하나 뽑아 아이에게 건네고 최대한 아래쪽으로 붙여놓았다. 뛰어다니다가 내 앞치마 주머니에 코를 박는 아이들의 눈높이를 고려해야 한다.      

 우리 키즈카페는 본래 키즈카페를 위한 공간은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아이용 세면대나 변기도 없고 아이에게 영 친화적이지 않다. 그런데 유독 4~6세 경 아이들의 눈높이에 정확히 맞춰놓은 게 있다. 바로 과자와 음료 유리 진열장이다. 카운터에 있으면 문득 카운터 아래쪽에서 콩콩, 유리 진열장을 두드리는 소리가 난다. 내려다보면 아이가 진열장 안에 있는 과자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다. 알록달록한 포장지들, 큰 글씨로 몽글몽글 쓰여 있는 맛있는 이름들.     


 참 잔인하다. 속으로 혀를 찬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진열장에 손때가 묻으니 얼른 손 떼게 할 때만큼 스스로가 별로일 때가 없다. 이건 부모님한테 사달라고 해야 해. 작게 말해줘도 아이들은 아랑곳 않는다. 달콤한 음료들과 솜사탕, 과자…. 어른인 나에게도 유혹적이다. 어른들이야 참고 넘어가는 것이지, 아직 돈을 모르는 아이들에게는 얼마나 괴로울까. 마치 가져가라는 듯 눈앞에 있지만 유리로 막혀있다.     

 부모님이 진열장에 달라붙어 있는 아이를 찾는다. 부모들은 몸을 숙이고 아이의 시야를 본다. 이렇게 많은 과자들이 있다니! 부모님들은 약간 괴롭고 딱한 표정으로 몸을 숙여 진열장에 끈끈하게 달라붙은 자기 자식을 떼어낸다.      


 세상은 때로 아이 같은 약자의 눈높이에 맞춰주기도 한다. 단, 대부분은 돈이 될 때에만 그렇다. 아이의 갈망에 찬 눈망울을 보는 부모님들은 마음이 약해진다. 마트의 두세 배 값을 주고 과자와 음료를 사준다. 그걸 볼 때마다 생각한다. 세상은 나의 눈높이에서 무엇을 보이게 할까? 백 육십의 평균키 여성에게 세상이 보여주는 것은 무엇일까?      

 내 키는 여성복 매장에서 옷들을 뒤적이기 딱 좋은 눈높이다. 도서관에 세로로 6칸의 책장이 있으면 3, 4번째 칸의 책들은 잘 보인다. 하지만 제일 아래 칸, 제일 위의 칸은 잘 안 보게 된다. 반쯤 엎드리지 않으면, 도서관용 사다리에 오르지 않으면 제일 아래와 위쪽 칸에는 어떤 책이 있는지 모른다. 어쩌면 지나친 책장들에 내 인생을 바꿀 책이 있었을 지도 모르겠다.      

 지금 책상에 쌓여있는 책들은 내가 고른 걸까, 아니면 세상이 내 시야에 보이게 한 책일 뿐일까? 스티븐 테오의 '왕가위의 시간', 양귀자의 '모순', 한나 아렌트의 '인간의 조건' 그리고 '5분 컬러링북: DOG coloring.' 어쩌다 이 책들은 내 눈에 띄게 되었는지, 다른 책이 아니고 왜 이 책들인지 괜히 의아해진다.      

 문득 책을 보니 마지막으로 하나 더 점검해볼 게 떠오른다.      



 이게 맞아?”     



 세상에는 놀라운 뉴스들이 가득하다. 대개는 좋지 않은 일들이다. 지금 어디에서 사고가 났다고? 대충 훑어보니 사람들이 많이 죽었다고 한다. 스크롤을 다시 올려본다. 처음부터 차근차근 읽어본다. 기사 하나, 글자 하나도 겨우겨우 읽어간다. 아니, 읽어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 기자의 의도를 제대로 읽어내고 있는 걸까? 애초에 이 기사를 읽는 게 좋은 선택인 건지 모르겠다. 무언가를 보면서도 막막해지는 기분.     


 내가 본 것들, 제대로 봤다고 할 수 있을까? 

 나는 세상을 제대로 알고 있는 걸까?     


 오늘도 초록색 뉴스란에 뜬 XX일보, XX신문들의 ‘한글’ 기사를 통해 어느 지역의 전쟁, 어느 곳의 비극, 어느 곳의 이야기들을 읽는다. 그런데 이거, 정말 맞을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알고 보면 진실이 아니던 일들이 얼마나 많았는가. 이 나라가 나쁜 걸까, 저 나라가 나쁜 걸까? 이 정치인은 정말 이런 의도로 이런 말을 한 걸까?

 평생을 읽은 한국어조차 잘 보고 있는 건지 긴가민가하다. 보고 있는데도 읽어지지 않는 외국의 활자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뭔가 더 중요한 게 있는 거 아닐까? 세상 대부분의 정보들은 영어와 중국어, 러시아어, 에스파냐어, 일본어, 포르투갈어 등으로 이루어져 있으니 말이다.     


 세상은 혼란하다. 눈 뜨고도 코가 베이는 곳이다. (코가 낮은 걸 보니 나는 이미 베인 듯하다) 시력이 아무리 좋아도 정말 중요한 것은 너무나 작으며 순식간에 지나가 볼 수 없다. 어떤 눈높이에서든 반드시 보이지 않는 게 존재한다. 만원의 지하철 안에서 키 큰 사람은 앞 사람의 다리가 보이지 않고, 키 작은 사람은 앞 사람의 정수리 상태를 알지 못한다. 때로는 봤다고 생각한 것도 잘 봤는지 긴가민가하다. 믿을 거 하나 없다. 다들 뭔가 믿긴 하지만.     


 글을 쓰면서 나를 한 번 점검해보니 아무래도 잘 가동되어왔던 것 같지가 않다. 일단 안경 하나 썼다고 아빠도 못 알아봤다는 점에서 큰 문제가 있다. 당신도 점검을 해보니 어떠한가? 괜찮은가? 잘 보고 살아왔다면 다행이다. 하지만 잘 못 보고 살아온 나 같은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할까. 모르겠다. 나는 점검하러 온 것이지 수리공은 아닌지라….      

 다만 점검을 하다 보니 점검 자체가 중요하게 느껴진다. 내가 무얼 보지 못했는지 점검해야만 다른 식으로도 보려고 노력하게 될 것이다. 노안이 온 아버지의 시야를 한 번 경험해보고,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게 물건도 좀 옮겨주고, 뭔가를 볼 때마다 한 번쯤 이게 맞는지 의심은 해보는 것.     


 사람이 없을 때 유아용 세면대에서 손도 한 번 씻어보고(허리는 아프지만), 책장 가장 높은 칸과 낮은 칸에 있는 책도 한 번쯤 들여다보고. 가끔은 도서관 어린이 공간에 가서 동화책도 꺼내어 읽어보고 다시 제자리에 꽂아보기도 하고. (참고로 동화책은 얇아서 위치 번호가 잘 보이지 않아서 제자리에 꽂기 무진장 어렵다. 널브러진 동화책들이 이해가 가는 대목이다)      

 허리가 굽은 사람들의 시야를 보기 위해 고개를 숙여 걸어보기도 한다. 가방이 무거운 날에는, 돈이 없고 몸이 축축 쳐지는 날에는 왜 이리도 바닥에 뿌려진 유흥업소와 대부업체 명함들이 잘 보이는지 궁금했던 적이 있었다. 원래 이렇게 많이 떨어져 있었던 걸까. 누군가는 저 명함을 주워 전화해본 적이 있을까.      


 가끔은 번역기라도 돌려서 해외 뉴스들을 읽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보이지만 해석하지 못하는 글자들에 담긴 세상을 읽어내는 것. 초록색, 파란색 검색창에 벗어나 다른 곳에서도 정보를 찾아보는 것. 싫어하던 언론사의 뉴스도 가끔은 봐주고, 1호선 열차를 가로지르는 미치광이 같은 사람의 말도 가끔은 들어보는 것. 슬프고 억울한 사연이 있는 경우가 꽤 있다.     



 마지막으로, 항상 기억해야 한다. 무엇을?

 우리는 보이는 대로, 보이는 만큼의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는 걸.     





Written by 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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