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에 대하여
표지 사진: Unsplash의Lidya Nada
내 본명엔 ‘햇살 현(晛)’자가 들어간다. 흔히 쓰이는 ‘나타날 현’이나 ‘밝을 현’이 아니라 나름 자부심과 애정을 가지고 있는 글자다. 왠지 햇살처럼 밝게 살 것만 같은 느낌이 들어서 좋아한다. 하지만 어느 날, 술 취한 아빠가 내 이름을 한자로 썼을 때 그 애정이 반쯤 깨어지고 말았다. 아빠가 쓴 한자는 ‘睍’이었다. 날 일(日)자가 아닌 눈 목(目)자가 들어간 현. “이거 아니라고~” 웃으면서도, 설마 이게 정말 존재하는한자인지 찾아보았는데 진짜 있었다. 눈 작을 현(睍).
뭐… 이런 한자가 있지? 그것도 하필 내 이름에? 아빠가 착각했다고는 했지만, 분명 주민등록증에도 ‘햇살 현’이 적혀있긴 했지만, 왠지 ‘햇살 현’ 자가 아니라 ‘눈 작을 현’ 자가 내 진짜 이름인 것 같았다. 어릴 때 눈 작단 소리깨나 들었던 나로서는.
나는 눈이 안 예쁘단 소리를 정말 자주 듣고 자랐다. 그 때문인지 나는 사람 얼굴의 미적 기준을 눈으로 잡게 된 것 같다. 눈 이외에도 이, 구, 비, 얼굴형, 조화 이런 것들도 미적인 요소에 포함된다는 것도 알지 못했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잘 나온 사진을 고를 때 오직 눈만 보고 결정했다.
어느 날은 친구의 사진을 골라주는데, 내가 고른 사진을 보고 친구가 배경, 포즈, 입 모양 모든 게 다 이상한데 눈만 잘 나온 걸 골라서 뭐하냐고 핀잔을 주기도 했다. 그만큼 눈에 별로 자신이 없었고, 누군가 내 눈을 오래 보는 걸 안 좋아했다. 그러니 당연하게도 나도 누군가의 눈을 오래 볼 일이 없었다.
나는 사람 보는 눈이 영 꽝이다. 부정적인 의미만은 아니다. 첫인상이 좋았던 사람이 나중에 가면 안 좋아지는 경우도 있지만, 첫인상이 안 좋았던 사람이 나중에 좋아지는 경우도 많다.내가 영 안목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나서는, 첫인상으로는 사람을 잘 판단하지 않아왔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첫인상만으로 타인을 잘 파악하곤 했다. 첫눈에 자기랑 맞는 친구를 간택하는 사람. 혹은 쎄한 사람을 구별하고 멀리하는 사람. 그들은 어떻게 첫인상을 읽는지 궁금해서 물어보기도 했지만 이해할만한 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들은 뭔가 너도 다 알고 있지 않냐는 듯이, “그냥…. 그 있잖아. 아, 그냥 설명 못 하겠는데 그런 느낌이 있어.”라고 할 뿐이다.
최근 ‘맑은 눈의 광인’이라는 말이 유행하면서 나는 맑은 눈과 광기가 어떻게 결합될 수 있는지 고민했다. 맑은 눈이면 맑은 눈이고 광기 있는 눈이면 광기 있는 눈이지, ‘맑고 선한 눈빛’이나 ‘맑고 광기 있는 눈빛’ 혹은 ‘맑고 사악한 눈빛’들이 어떻게 서로 구분이 된단 말인가? 그러니 첫인상 촉은 포기한 지 오래. 나는 그냥 사람을 오래 보고 천천히 알아가는 타입인 거지. 그렇게 믿어왔다.
다시 ‘눈 작을 현’으로 돌아가서, 나는 내 눈 생김새를 누군가 자세히 보는 게 싫어서 어느 순간부터 자연스럽게 터득한 방법이 있다. 바로 눈이 안 보이게 웃는 것이다. 다 다르게 생긴 눈들이 웃을 때는 대체로 비슷하게 보인다는 것을 알게 되고는, 눈 마주칠 일이 있으면 자주 웃었다. 진심으로 우러난 웃음도 있었지만 간혹 필요하다면 어색하게 짜내는 웃음도 있었다. 그럴 때는 눈꼬리가 바들바들 떨려서 분명 상대방도 내가 웃음을 짜내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챌 줄 알았다. 하지만 의외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잘 알아채지 못하는 듯했다.
예전에 일하던 곳에서는 워낙 긴장되고 내 또래도 없어 진심으로 웃을 일이 없었다. 대개 무표정하거나 그저 어색하게 웃을 뿐이었다. 그런데도 같이 일하던 분은 내가 항상 웃으며 밝은 에너지를 전해줘서 좋았다고 말했다. 그게 참 이상했다. 내가 어색하게 웃는 게 다 티 날 거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거울을 보면서 가짜 웃음을 지어보았더니 생각보다 진짜 웃음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눈을 접어 웃으면 진짜인지 가짜인지 잘 구분이 안 가는구나.
‘눈은 마음의 창’이라고 하는 말은, 아마 눈을 통해 사람의 속을 읽을 수 있다는 뜻일 거다. 하지만 나는 눈으로 사람을 못 읽는 사람이다. 눈이 작아서는 아닐 거다. 눈매에 자신이 없어 눈을 피해서, 아니면 반대로 내가 눈으로 사람을 읽지 않으려고 눈맞춤을 피하는 걸 수도 있다. 선후 관계가 어떻게 되었든, 상대와 내 눈동자가 맞닥뜨리는 시간을 최소화하려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눈이 마주치면 웃어버리는 것도 마찬가지. 눈동자가 최소한으로 드러나게 하는 것이다.
내가 사람을 금방 보고 파악하지 못하는 것만큼, 나 자신도 누군가에게 금방 읽히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상대방은 쉽게 몰랐으면 좋겠다. 날 아예 끝까지 모르거나 혹은 아주 어렵게 알아갔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 사람은 절대 알 리 없는 내 모습을 적어도 한 개는 감춰두고 싶다. 그래야만 내 진짜 본질 같은 게 지켜지는 것 같았다. 눈을 통해 아무것도 드러내지 않으려고 만들어낸 눈웃음에 결국 그런 마음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것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나를 내어놓지 않는 만큼, 나도 상대방의 전부를 알아갈 수 없다. 눈을 돌리거나 감으면 상대방의 눈을 제대로 읽을 겨를이 없다. 그 사람의 말과 행동만으로는 다 설명되지 않는 무언가를 읽을 수 없다. 날 내놓지 않는 것처럼 상대방을 진정으로 받아들일 준비도 되어있지 않은 상태이다. 이런 상태로는 첫 만남이 아니라 몇 번을 보아도 그 사람을 제대로 보았다고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눈을 마주치지 않고 옆에서 훔쳐보면서, 그 사람의 눈 모양새, 깜박임, 움직임 정도로만 사람을 읽는 것은 너무 얕다. 바다의 물결치는 모양을 멀리서 바라보는 사람이랑 그 물결에 직접 들어가 파도를 타는 사람이랑은 바다에 대한 이해의 깊이가 다른 것처럼.
비록 ‘눈 작을 현’의 인생이지만, 이 작은 눈이라도 또렷하게 뜨고 있어야 햇살을 받든 뭘 하든 할 거 아닌가. 그러니까 결심한다. 내 눈동자가 말해주는 나를 감추려 들지 말자. 그리고 상대방의 눈동자가 말해주는 그를 똑바로 받아들이자. 그저 지나가는 ‘아이컨택’이더라도, 지금의 나에게는 거의 영혼 공유에 가까울 만큼 중대하고 숭고한 일이다. 지금껏 피해왔던 ‘영혼 공유식’에 용기 내 참여해보고자 한다.
그리고 나와의 영혼 공유식에 저절로 참여하게 된 당신, 내가 가짜로 웃는 게 티가 안 난다 해서 앞으로의 내 웃음을 의심할 필요는 없다. 당신도 내 눈을 제대로 보는 사람이라면 그 정도는 너무 쉽게 구분할 수 있을 테니까.
이하녕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