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페티(confetti): (결혼식 등의 특별 행사 때 뿌리는) 색종이나 금속 소재의 작은 조각
202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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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2023년 정도 되었으면 어릴 적 상상화 그리기 대회에서 떠올렸을 법한 미래 도시 하나 정도는 이미 존재해야 하는 거 아닌가? 23년이라... 퍽이나 이질적인 어감이라며 속으로 내내 질겅이기만을 반복한 지 2주가 지났다.
새해에도 난 변함없을 예정이다. 새로운 한 해, 새로운 만남에 필연적으로 뒤따르는 자기소개 시간이 되면 스스로를 “바다를 동경하는 사람이 바닷가에 살지 않는 사람뿐”이라 정의하며 머쓱하게 웃어 보이겠지. 구병모 작가의 책 <파과>에 나오는 이 한 문장으로 나를 묘사한 지도 벌써 3년째이다.
무슨 말이냐고?그저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는, 고향이 부산인 사람이라는 뜻이다. 게다가 해가 갈수록 바다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커져 당혹스러운 나의 심정까지도 대변해주는 듯하니, 이보다 좋은 자기소개 멘트가 있을까 싶다.
나는 (여행과 같이 특별한 일탈을 제외하면) 태어나서 성인이 되기 전까지 바다 근처를 벗어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분명 이사를 여러 번 하였는데도, 그때마다 우리 집이 걸어서 20분 만에 광안리 바닷가에 도착할 수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나에게 바다가 여태껏 너무나 당연한 존재였던 만큼, 상경한 이후로는 바다를 보고 싶을 때 쉽게 보지 못하는 답답함에 상사병이라도 걸린 사람마냥 굴었다. 그러나 옛말에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게 있다고 하지 않던가. 바다를 가까이에 두고 마음껏 보지 못하는 대신 서울살이를 시작하면서 내심 기대하고 있던 것이 있었는데, 바로 눈 내리는 풍경이었다.
부산이 고향인 나에게 눈은 그런 존재이다. 바다를 향한 그리움의 치환, 아직은 낯설고 어딘가 신비스러운 계절의 치환. 눈 쌓인 풍경 속 겨울이라는 계절을 다정하게 맞이하며 한 해를 갈무리하는 게 얼마나 벅찬 일인지 모른다. 한겨울 내리는 눈이 태어날 때부터 당연한 일이었던 사람들은 (아마) 모른다.
눈이 내리면 사람들이 우산을 쓴다는 사실도, 눈이 1cm 이상 쌓여도 휴교하지 않는다는 사실도, 전부 상경하고 처음 알게 된 것들이었다.
혹시 ‘눈이 오면 좋아하는 세 종류의 생명체’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는가? 그 생명체가 ‘강아지, 어린이, 그리고 부산 사람’이라는 답변에 반박할 수 없을 만큼, 아니 오히려 맞는말이라며 따봉을 날려 줄 만큼 부산에서 쌓인 눈을 보기란 쉽지 않다.
어릴 적 눈에 대한 기억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지만, 딱 한 번 폭설로 부산 전체가 떠들썩하였던 어느 하루를 기억한다. 발목까지 푹푹 잠기는 눈밭도 처음이었고, 눈사람을 직접 만드는 것도 처음이었고, 머지않아 아려오는 손발의 감각 또한 처음이었다.
동생과 내가 노는 모습을 지켜보시던 할머니는 우리가 감기라도 걸릴까 봐 걱정이셨는지 커다란 대야에 눈을 가득 담아 집 안으로 들였고, 그렇게 초대받은 눈은 투명해질 때까지 우리의 손을 잡아주었다.
그날이 소중한 추억으로 남아있는 건 어색하던 영하의 감각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내가 정말로 잊지 못하는 건,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선명한 그날의 온기 - 할머니의 사랑, 맞잡은 동생의 작은 손, 들뜬 마음에 가빠지는 입김 – 가 아닐까.
어쩌면 겨울이야말로 역설적이게도 서로의 온기가 가장 뚜렷해지는 계절인 것 같다. 섭씨 36도밖에 안 되는 우리의 날숨이 뽀얗게 드러나는 것만큼이나 서로의 따뜻한 진심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계절. 그러한 계절을 장식하는 눈을 난 좋아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눈이 왜 좋은 건데?”
경기도 출신이라 여태껏 눈을 지겹게 봐 온 친구가 내게 물었다. 위의 이야기에도 마음이 동하지 않는 듯한 친구의 반응에, 내가 눈을 좋아하는 또 다른 이유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소신 발언을 하나 하자면, 눈을 좋아하는 행위는 퍽 자연스러워 보인다. 무언가를 항상 남기고 싶어 하는 인간에게 눈이 쌓인 풍경만큼 매력적인 공간이 또 있을까. 백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존재로 태어난 이래 나와 여러분이 다시금 하얀 도화지와 같은 세상을 마주할 기회가 얼마나 되리라 생각하는가? 이 세상에 나의 존재를 마음껏 새겨 볼 수 있는 경험이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를 떠올려 본다면, 눈밭에 수많은 메시지를 남기고 저마다의 개성을 지닌 눈사람을 만드는 게 너무나 당연한 것 같기도 하단 말이지.
“그건 그래. 근데 눈은 내린 직후에야 예쁘지, 녹으면 또 더러워지잖아.”
“난 그런 것까지도 인생 같아서 마음에 들어. 아름다움이 찰나에 그치는 그 냉정함이 우리의 인생과 다를 게 뭐야. 그래도 있지, 눈은 휘발되지 않잖아. 녹아 더러워지더라도 그 자리에 있었다는 건 변하지 않잖아. 멋지지 않아? 나도 질펀하게 이 세상을 살아갈 거야.”
친구의 말마따나 서울에서의 겨울을 몇 년 더 보내고 나면 나 역시 이 눈에 무뎌질까? 비단 눈뿐만이랴.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것들에 무뎌지는 나를 마주하게 될까? 난 그저 10년 뒤에도, 20년 뒤에도 지금처럼 눈을 보고 설레는 나이면 좋겠다고 되뇌었다.
할 수 있을까?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난 휘발되지 않는 것들을 사랑하니까.
아침부터 함박눈이 내려앉던 다음 날, 집을 나서며 일부러 우산을 챙기지 않은 건 그저 오래 설레고 싶다는 고집에서 비롯된 충동적인 행동이었다. 그래, 그런 아침이었다.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문득 지금 내 머리 위에 안착하는 눈이, 마치 1년이란 무대를 잘 끝마친 내게 내려주는 컨페티(confetti) 같다며 미소 지었던 산뜻한 아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