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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착한여성들 Mar 03. 2023

당신의 울음 코드는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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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메이션 <후르츠 바스켓>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가끔 터무니없는 상상을 한다. 어느 날 내 앞에 전지전능한 존재가 나타나 소원을 들어준다고 한다면 무슨 소원을 빌까? 물론 부자가 되게 해주세요, 와 같은 진부한 소원도 좋겠지만 실은 오래전부터 생각해 둔 게 하나 있다.


 신이시여, 펑펑 울어도 눈이 붓지 않게 해주세요.                

 

 나는 눈물이 많은 편이다. 슬픈 영화나 책을 보고 남들보다 먼저 울음을 터뜨리는 유형의 사람이다. 하지만 그뿐만이 아니다. 다소 생소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으나, 우는 행위는 내게 일상 속 루틴으로 자리한 개념이다. 굳이 비유하자면 매달 꼬박꼬박 납부해야 하는 관리비 같은 것이다. 한 달에 한 번은 형체도 출처도 불분명한 감정들을 눈물에 흘려보내니 말이다.

 단 하룻밤 만에 개운한 상태의 자신을 되찾을 수 있으니, 눈물은 그야말로 나 자신을 관리하는 비용인 셈이다. 특별한 일이 없어도 주기적으로 울어주어야 하는 나의 유별남은 대충 ‘카타르시스 중독’ 정도로 정의하면 될 듯하다.

*카타르시스: 정신 분석에서, 마음속에 억압된 감정의 응어리를 언어나 행동을 통하여 외부에 표출함으로써 정신의 안정을 찾는 일.

              


 벌써 몇 달째 울음을 참고 있다. 인턴을 시작한 이후로는 좀처럼 울 타이밍을 못 잡아서다. 울고 나서 붓는 체질이 아니었더라면 원하는 때에 마음껏 울었을 텐데. 심지어는 다음과 같은 생각까지도 하였다. 어디 보자,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출근하니까 부어도 되는 날은 일요일. 그럼 토요일 저녁에 운다면 문제없군! 하하... 정말이지 터무니없는 발상이다. 아무리 내가 계획형 인간이어도 울 타이밍까지 미리 정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렇다고 서로의 표면만을 공유하는 비즈니스 상대에게 퉁퉁 불어버린 내 눈을 보여주고 싶지도 않다.

 어릴 땐 ‘라면 먹고 눈이 부은 거예요.’ 따위의 거짓말로 상황을 얼버무린 적도 있었다. 그마저도 울었다는 사실을 부끄러워하는 스스로가 영 못마땅하여 얼마 안 가 그만두었지만 말이다. 전날 밤 흘린 눈물에 대해 거짓 변명하기는 싫으니 선택지는 이제 단 하나 남았다. 애초에 부은 눈을 설명할 상황을 만들지 않는 것! 나의 눈물 참기 챌린지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우리는 울음을 숨기는 작태가 만연한 세상에서 살고 있다. 우는 모습을, 혹은 울었던 사실을 남에게 드러내기를 망설이는 우리 자신이 바로 그 증거이다. 왜 그렇게까지 망설이는가를 고민하다 보니 문득 우리 사회가 다양한 울음을 포용하지 못한다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특정 상황에 특정한 이유로 흐르는 눈물만을 ‘진정한 눈물’로 정의하는 사회일지도 모르겠다. 가령 소중한 이의 죽음, 큰 시험에서의 불합격으로 흘리는 눈물은 그 진정성을 의심받지 않는다. 반면 나의 눈물이 참된 눈물을 정의하는 경계를 벗어난다면 어디에도 털어놓지 못하는 부끄러움이 될지도 모른다. 한 마디로 우리를 울게 하는 수만 가지 이유가 오늘날 터부시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울음은 그 원인을 희비(喜悲)라는 이분법적 틀 안에 한정하기에는 너무나 신비롭다. 우리는 기쁨과 슬픔만이 아니라 분노, 놀람, 심지어는 그리움까지도 모두 눈물에 녹이니 말이다. 우는 행위는 결코 하나의 카테고리로 묶일 수 없을 것만 같은 무수한 감정들의 유일한 교집합이다. 그러니 한 번쯤은 눈물을 숨기고 싶은 관성에 맞서 우리 자신의 울음을 면밀히 들여다보아도 좋을 것 같다.       

         

 그렇다면 당신의 울음 코드는 무엇인가? 웃음 코드는 들어봤어도 울음 코드라는 말은 들어 본 적이 없을 것이다.

 친숙한 개념인 웃음 코드를 먼저 떠올려 보자. 우리는 각종 예능 프로그램 혹은 일상 속 친구와의 대화를 통해 나 자신이 언제 웃는지, 무엇이 나를 웃게 하는지를 잘 알고 있다.

 반면 우리가 눈물을 흘리는 수만 가지 이유들은 그 가치에 비해 충분히 조명받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언제 어디서 무엇이 나를 울게 하는지 잘 알지 못하는 것 같다.

 그러나 자신만의 울음 코드를 찾아가는 건 뜻깊은 일이다. 웃음 짓는 순간들을 정성스레 파고들 듯, 울음이 터지는 순간에 집중하다 보면 역설적이게도 내가 무엇을 사랑하는지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여전히 울음 코드가 낯설 당신을 위하여 오늘은 나의 울음 코드를 한 가지 소개해보려 한다.                






 나의 울음 코드가 집약된 애니메이션, <후르츠 바스켓>은 타카야 나츠키의 만화 후르츠 바스켓을 원작으로 한 일본 애니메이션이다.

 성숙한 내면을 지닌 주인공(혼다 토오루)이 저주라는 판타지적 요소로 저마다의 상처를 지닌 등장인물들과 하나둘 인연을 맺어가는 이야기이다. 주요 인물의 대부분이 속해 있는 소마 가문은 십이지신(十二支神)의 저주로 인해 각 수호신의 원령이 씐 아이들이 대대손손 태어나는 집안이다. 십이지의 원령이 씐 사람은 이성에게 안기거나 컨디션이 좋지 않을 때 동물로 잠시간 변한다는 비밀이 있다.

 어느 날 교통사고로 부모님을 여의고 소마 가문에 신세를 지게 된 토오루가 우연히 가문의 비밀을 알게 되는 데에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원작이 순정 만화로 분류됨에도 불구하고 로맨스 위주의 가벼운 전개가 아니라는 점이 다소 독특하다고 할 수 있다. 오히려 섬세한 감정 묘사와 독백 형식의 심리묘사를 통해 인간관계 전반, 개인의 고뇌와 성장, 인간 본질과 욕망 등 다양한 주제를 무게감 있게 다루는 작품이다.     



 내가 이 애니메이션을 애정하는 가장 큰 이유는, 많이 울기 때문이다. 저마다의 사연을 지닌 등장인물들을 따라 함께 울며 나의 울음 코드를 찾아갈 수 있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가장 좋아하는 애니메이션이니만큼 여태껏 세 차례의 정주행을 완수하였는데, 세 번 모두 나의 눈물샘을 터뜨렸던 장면들이 여럿 있었다. 그중에서도 딱 한 장면만 꼽아야 한다면 망설임 없이 선택할 장면이 바로 아래 장면이다.      


 위 장면은 소마 모미지(십이지신 중 토끼에 해당하는 인물)가 토오루의 품에 안겨 위로받고 있는 장면이다.

 토오루는 모미지와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던 중 모미지의 안타까운 사연을 듣게 된다. 모미지의 어머니는 동물로 변하는 아들을 끔찍하게 여겼으며, 그런 자식을 낳았다는 사실과 아들의 존재를 모두 부정하였다. 나날이 정신이 망가져 가는 어머니의 모습을 지켜보던 어린 모미지는 결국 본인의 존재를 어머니의 기억 속에서 지우도록 하는 데 동의한다.

 기억이 삭제된 어머니는 건강을 회복하였고 이후 원령이 쓰이지 않은 자식(모미지의 여동생)을 낳아 화목한 가정을 꾸려나갔다. 끝내 가족으로부터 잊힌 모미지는 홀로 슬픔을 감내하면서도 멀리서나마 그들의 행복을 빌어 왔다고 한다.               


 울음 코드를 통해 자신이 사랑하는 게 무엇인지를 알아차릴 수 있다고 앞서 이야기한 바 있다.

 위 장면에서는 ‘어머니와 여동생에 대한 기억은 이젠 혼자만의 기억이지만, 그럼에도 내겐 소중한 추억들이니 간직하고 살아가겠다’는 모미지의 대사를 엿볼 수 있었다.

 내가 이 장면에서 눈물지었던 이유는 흘러가 버린 것들에 대한 애정을 간직하려는 모미지가 안쓰러우면서도 사랑스러웠기 때문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것을 잊고 또 잃는다. 나는 여전히 이러한 비(非)영원의 세계가 두렵다. 망각된 소중한 기억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조금씩 멀어지는 젊음, 곧 끝마치게 될 대학 생활 – 결코 시간을 역행할 수 없는, 나를 슬프게 만들 일투성이다. 비록 무엇 하나 영원한 게 없는 세상이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상실의 감각에 지지 않고 모미지처럼 씩씩하게 한걸음 한걸음 나아가고 싶다고 생각하였다.    

            

 <후르츠 바스켓>은 다른 어떤 애니메이션보다도 우는 장면이 소중한 작품이라 장담할 수 있다. 자신의 울음 코드가 무엇일지 찾고 싶다면 이 애니메이션을 시청해 보기를 추천한다.

 혹여 애니메이션을 즐겨 보는 편이 아니더라도 한 번쯤은 일상 속 본인만의 울음 코드를 생각해보기를 바란다.

 당신은 언제 울고 싶은가? 무엇이 당신을 울게 하는가? 당신의 울음 코드는 무엇인가? 만일 좋은 울음 코드가 있다면 내게도 소개해주길 바란다. 답신은 언제나 환영이다.     



달여섯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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