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콘텐츠
학기 초마다 사라지지 않는 부끄러운 시간이 돌아온다. 교실 앞까지 나가거나, 앉은 자리에서라도 하게끔 만드는 그것. 자기소개.
저의 취미는 ‘드라마를 보는 것’입니다. 항상 소개할 게 없을 때 내뱉는 말이었는데, 이제 이 취미는 어느 정도 친해진 친구에게만 털어놓는 편이다. 모두가 드라마를 좋아할 거라는 착각 속에 살았을 때는 내가 좋아하는 드라마에 대해 열심히 설명하기도 했지만, 돌아오는 반응들은 언제나 시큰둥했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드라마를 잘 안 본다는 사람들도 더러 있어서 적잖이 충격을 받기도 했다. 처음에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친구는 참을성이 없는 편인가.’
우리가 살아가는 21세기에는 온갖 정보가 넘쳐흐르고 있다. 이제는 많은 정보를 어떻게든 우리의 눈과 귀로 흡수시키기 위해 ‘유튜브 쇼츠’나 ‘인스타그램 릴스’처럼 짧고 빠른 콘텐츠를 즐겨 보는 시대가 온 것이다. 그래서 가끔 영상을 시청할 때면 도저히 여유가 느껴지지 않는다. 무엇 하나 제대로 감상하면서 넘길 틈도 주어지지 않는다. 습득하는 정보량은 많지만 머릿속에 남는 건 없는 느낌.
드라마는 우리가 자주 보는 릴스보다도 훨씬 긴 분량을 짧게는 20분, 길게는 1시간 30분 정도로 끊어 평균 16화 정도를 앉은 자리에서 다 봐야만 이해가 되는 콘텐츠다.
나는 바로 이런 점 때문에 드라마를 좋아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점 때문에 드라마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니. 가뜩이나 짧고 빠른 콘텐츠를 좋아하는 세상인데 앞으로는 드라마를 유튜브 클립으로만 시청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아질까. 드라마는 클립으로만 보면 제대로 봤다고 할 수 없는 건데…. 동네 어르신처럼 훈수를 두면서 진심으로 깊은 고민에 빠진 적도 몇 번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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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에 이렇게까지 푹 빠지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 갓 태어난 시절의 나는 당연히 몰랐을 테고, 우리 부모님도 전혀 몰랐겠지만, 우리 집에 있던 텔레비전은 아마 알고 있었을지도. 초등학교에 다닐 적부터 별의별 드라마를 섭렵했다. 저녁 7시, 8시부터 하던 일일연속극, 시트콤, 그리고 10시부터 하던 미니시리즈 등등. 학교를 마치고 투니버스를 보던 친구들과 달리 나는 드라마 재방송을 보기 바빴다. 그때부터 텔레비전은 내 친구가 되었다.
텔레비전 앞에서 떨어질 일이 없던 아이는 이제 다 커서 OTT 서비스를 구독해 드라마를 스스로 찾아보는 어엿한 성인이 되었다. 드라마를 시청하는 방식이 달라지면서 느낀 점이 하나 있다면, 이제는 볼 수 있는 드라마의 범위가 훨씬 넓어졌다는 것이다.
TV로 드라마를 볼 때는 제시간에 방송국에서 틀어 주는 드라마만 볼 수 있지만, OTT에서는 내가 보고 싶은 것을 골라서 아무 때나 시청할 수 있다는 게 신세계처럼 느껴졌다. ‘시간이 지나면 나도 정신 차리고 적당히 보겠지’ 하던 생각은 이제 사라진 지 오래다. 시간이 지나도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는 건 변함없이 신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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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드라마를 찾아보면서 드라마에도 취향이라는 게 생겼다. 나는 요즈음 잔잔한 드라마에 빠져 있는데, 이 타이밍에 내가 생각하는 ‘잔잔한 드라마’의 축에 들었던 작품 몇 가지를 골라 소개하고 싶다.
내가 보면서 위로를 받고, 따뜻함을 느꼈던 두 작품을 멀리멀리 퍼뜨려 많은 사람들이 인생을 살면서 한 번쯤은 꼭 보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 작품들에 대한 나의 감상을 공유해 보려 한다.
1) 런 온(2020)
출처: JTBC
* 스포일러 방지를 위해 줄거리만 간단하게 소개하겠다.
외화 번역가 ‘오미주’와 육상 국가대표 ‘기선겸’. 두 사람은 서로의 직장에서 쓰는 언어도 다르고, 성격이나 집안 배경까지 모든 것이 다르지만, 어린 시절에 각자의 이유로 받은 상처가 마음속에 남아 있는 것만은 닮아있다.
세상에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은 잘 모르지만 다른 사람을 사랑할 줄은 아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이 만나 서로를 위로하고, 보듬어 주며 그 상처를 아물게 한다. 어릴 적부터 너무나 다른 세계에서 살아온 두 사람이 각자의 언어로 소통하며 서로를 이해하고, 관계를 맺는 이야기다.
2) 나기의 휴식(2019)
출처: TDMB
28살, 무직, ‘오시마 나기’. 상황의 분위기를 파악할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어 자신의 표현을 아껴 왔던 나기는 어느 날 평소처럼 분위기를 읽던 중 과호흡으로 쓰러진다.
더는 안 되겠다는 마음에 별안간 퇴사 선언을 하고, 당분간 도쿄 교외의 작은 아파트에서 지내기로 결심한다. 자체 휴식기를 가지며 더 이상 남의 눈치를 보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나기의 고군분투 일상을 담은 이야기다.
내용은 전혀 다르지만, 결이 비슷한 드라마라서 이 두 작품을 유독 좋아하게 되었다. 이 두 작품의 공통점을 소개해 보자면,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겠다.
1) 주인공뿐만 아니라 주변 인물까지 성장한다.
등장인물들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그동안의 일들을 묻어 두기보다는 지난날의 과오를 인정할 줄 알고, 서로의 관계에서 찝찝했던 부분들은 모조리 정리한다. 극중 악역을 맡은 사람들도 후반부에 갈수록 자신을 되돌아보며 잘못을 깨달아가고, 이들이 변한다면 선한 사람들과의 관계가 회복될 수 있다는 여지를 남겨 둔다. 사람은 마음만 먹으면 변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결말이 두 작품의 공통점이자, 내가 이 작품들을 좋아하는 이유다.
두 작품에서는 제각기 다른 상처를 가진 사람들이 만나 서로를 보듬어 주는 분위기가 공통적으로 느껴진다. 상처의 크기가 크건 작건, 그런 건 상관없다. 상처받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은 보살피지 못했지만, 비슷한 사람들이 모여 서로를 위로한다. 상처받은 그 마음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므로.
그런 사람들과 함께하며 ‘나는 괜찮아 보였겠지만 실은 괜찮지 않았다’고, 스스로에게 무감했던 사람들이 자신의 속마음을 깨닫고 비로소 표현할 줄 알게 되는 주인공들의 변화가 부러웠는지도 모르겠다.
2) 평범함의 순기능
‘지극히 평범하지만, 그래서 더 닮고 싶은’ 인물이 등장한다.
내가 좋아하는 드라마에 나오는 여주인공들은 과거 각자의 사정으로 인해 마음에 상처가 남아 있는 인물로 나온다. 어떤 여자는 어린 시절이 불우했고, 어떤 여자는 분위기를 읽을 줄 모르고 소심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러면서도 신분은 평범한 일반인이라서, 언뜻 보면 ‘나도 주변에 저런 사람 한 명쯤은 볼 수 있을 것 같은데?’라는 생각이 든다.
이 평범한 사람들이 각자의 배경에서, 각자의 자리에서 평범한 하루를 보내는데, 이런 내용이 너무나 잔잔해서 도파민 중독자들이 이 드라마를 처음 본다면 ‘이쯤에서 무슨 큰일이 하나 터져야 하는 거 아니야?’라는 생각을 할 것 같다.
나는 바로 그 점을 좋아한다. 그 사람들의 하루하루가 그렇게 단조로워서 부럽다는 생각을 하며 끝까지 챙겨 본다. 솔직히 처음에 이 작품들을 볼 때는 그들의 잔잔한 일상을 부러워했다. 엄청난 일이 터지지 않는 삶, 자극을 좇지 않는 삶, 무언가에 쫓긴다는 압박 없이 좋은 사람들과 좋은 곳에서 편히 쉴 수 있는 삶.
평범한 주인공의 삶을 구경하며 등장인물의 처지와 마음에 공감하다 보면 드라마가 전개되는 과정에서 위로를 많이 받는다. 당장 나의 인생은 어떻게 흘러갈지, 결말이 어떻게 될지 몰라 그저 막막하기만 한데, 앞으로의 날들은 밝고 행복하기만 할 거라는 미래를 그리는 결말을 볼 때면 나까지 응원받는 것 같은 기분이 들 때도 있다. 여주인공들이 모두 평범한 인물로 그려져서 그런 걸까. 작품 하나를 다 보고 나면 대한민국의 평범한 국민1인 나의 결말도 왠지 밝을 것만 같은 예감이 든다.
이런 드라마 속 세상을 유토피아라고 말해도 될까? 지극히 평범해 보이지만, 확실히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에서는 찾기 어려운 평범함이다. 우리는 모두 무언가를 향해 앞으로 나아가야만 하는 압박을 느끼고, 잠시 멈추거나 그만둘 때면 루저라는 생각이 들게끔 만드는 분위기 속에서 살아가고 있으니까.
드라마를 보면서 작품 속 따뜻한 사회가 현실에도 남아 있기를 꿈꿨지만, 현실에서는 나와 비슷한 사람을 찾는 것도 어렵고, 서로를 이해할 줄 아는 사람도 찾기가 점점 어려워진다. 그래서 이런 드라마에 더 애정을 쏟을 수밖에 없었던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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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라면 뭐든 가리지 않고 봤다. 평점을 보지 않고 무작정 정주행한 작품 중에는 초반에 재미있다가 결말은 새드 엔딩으로 나의 마음을 깨부순 것도 있었고, 내용이 꼬여 있어서 처음부터 끝까지 나에게 스트레스만을 안겨 준 것도 있었다. 그 작품들을 비난하는 것은 아니지만, 하루 일과를 마치고 드라마를 보며 힐링하는 나로서는... 그런 작품을 보면서 도저히 힐링되는 기분을 느낄 수 없었다.
자극적인 드라마는 보통 평범한 사람보다 조금 더 뛰어난 인물이 나오거나, 폭력적인 내용이 담긴 드라마가 많다. 일반 시민들보다 돈이 많은 부잣집 사람들의 막장 이야기, 범죄 사건을 다룬 이야기 등.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드라마에는 이런 소재가 주를 이루지는 않는다.
이런 드라마는 마치 잘 편집된 브이로그를 보는 것 같기도 하다. 판타지보다는 현실적인 내용의 드라마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이토록 평범한 이야기들이 매력적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다. 브이로그를 볼 때처럼, 남이 어떻게 사는지 보고 듣는 일은 언제나 재미있으니까.
드라마 취향은 사람들이 맵고 짠 음식을 선호하고, 간이 거의 안 되어 있는 건강한 맛은 그닥 끌리지 않는다고 하는 것과 비슷한 것 같다. 자극적인 작품들이 시청률도 잘 나오니까 오히려 내가 보는 것들이 비주류처럼 느껴질 때도 있는데, 나는 그래도 그런 작품이 좋다.
남들이 보기에는 조금 지루할지라도 느린 속도로 전개되는 작품, 꼬인 것 하나 없이 평범한 삶을 그린 작품, 처음부터 끝까지 긍정적인 분위기를 놓지 않는 작품.
자극만을 좇는 세상에서 1시간의 휴식을 주는 드라마가 더 많아진다면 좋겠다. 평생 비주류여도 좋고, 이런 작품이 일 년에 한 번만 나오더라도 좋으니, 꾸준히만 나와 주길 바란다. 나는 언제든 그 작품 옆에 돗자리를 깔고 1시간짜리 힐링캠프를 열 준비가 되어 있으니까.
체이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