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에 관하여
뺨을 스치는 찬 공기가 아직도 어색하다. 그래도 조금은 따스해졌나? 마스크를 벗으니 바깥 공기가 양 볼에 맞닿아 계절의 변화도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코로나가 잔잔해지고 있음을 실감한다.
이 분위기에 힘입어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스멀스멀 떠오른다. 아, 나도 여행 가고 싶다. 당장에 떠날 수 있는 상황이라면 참 좋았을 텐데. 아쉬운 마음에 이제는 까마득한 옛날이야기가 되어 버린 내 마지막 여행을 떠올려보았다.
대학에 입학하고 맞이한 첫 방학이자 코로나가 시작되기 전 마지막 여름이었다. 일본은 10년 만에 재방문하는 거라 설레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인생 처음 혼자 돌아다녀 본 여행이라는 점에서 특별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사실 완전한 혼자만의 여행은 아니었다. 어머니의 취미 생활 모임에 끼여 간 거라 단체 일정에 따르다가도 슬쩍 빠져 혼자만의 계획을 즐기기도 하는 3박 4일이었다. ‘따로, 또 같이’를 시전하며 그야말로 안전함과 자유로움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을 수 있었다.
3년도 더 지난 일이라 아쉽게도 정확한 동선이나 일정이 촘촘히 기억나지는 않는다. 하지만 희미한 기억들 사이로 울리는, 지금까지도 종종 그리워지는 소리가 있다. 바로 히카와 신사(氷川神社)의 후우링(風鈴, 풍경) 소리이다. 이전부터 일본 신사 특유의 고즈넉하고 신비로운 분위기에 대한 환상이 있었던지라, 혼자만의 일정을 계획하던 순간부터 신사는 무조건 1순위로 들려야 하는 장소였다.
내가 방문하였던 히카와 신사는 가와고에(川越)에 위치한 작은 신사로,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으나 당시에는 관광 명소임에도 다른 신사에 비해 조용한 편으로 알려져 있었다. 게다가 매년 7월부터 9월까지 열리는 풍경 축제가 그렇게 아름답다고 하니 매력적이지 않을 수 없었다.
첫 홀로 여행이라 해서 무슨 거창하고 위대한 이야기가 탄생한 건 아니다. 그저 사소한 일이라 정의되는 기억들과 찰나의 감정들만이 남아 있다.
가령 한국에서도 길을 자주 잃는 내가 그 어려운 일본 지하철을 무사히 타고 나서 느낀 안도감. 신사 가는 길에 발견한 가게들의 아기자기함을 함께 나눌 사람이 없어 느낀 외로움. 일기예보와 다르게 비바람이 몰아치는 상황 속에서도 이상하게 바닥나지 않던 즐거움. 지나가는 현지인을 붙잡고는 사진 한 번만 찍어달라며 개구지게 웃어 보이던 나의 씩씩함. 날이 갬과 동시에 신사 입구를 발견했을 때의 성취감. 그리고 마침내 풍경 소리. 영원히 그 순간에 머물러도 될 것만 같은 풍경 소리가 있었다.
그곳에서 들었던 소리는 여태껏 살면서 들어 본 소리 중 가장 아름답고 청청한 소리였다.
신사를 둘러싼 흙길에는 스피커가 띄엄띄엄 설치되어 있었다. 입구를 통과하기만 하면 신사 내 어디를 가든 잔잔한 동양풍 음악이 울려 퍼졌다. 처음엔 그저 노래가 너무 좋다며, 꼭 음원 정보를 알아내고 한국으로 돌아가야지-라는 다짐과 함께 흙길에 접어들었다.
잠시 후 간지럽게 불던 바람이 멈추자 배경음악도 일순간 빈약해졌다. 그제야 깨달은 것이다. 신사를 가득 채우던 노래의 풍성함은 스피커 음향이 아닌 머리 위 빼곡한 후우링에서 비롯되었음을.
분명 제각각 딸랑대는데 단 한 순간도 조화롭지 않은 적이 없으니 신묘했다. 아마 소리가 정직하게 바람만을 실었기 때문이겠지. 내가 보고 들은 풍경은 그러했다. 소리에는 바람을 싣고 표면에는 햇빛을 담고 있었다. 투명하고 유려한 곡선을 따라 빛이 흘러내렸다.
그 장면이 못 견디게 반짝여서 내내 고개를 젖히다 보니 도저히 정면을 보고 걸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앞으로 나아가는 건 어렵지 않았다. 흙길을 따라 묵직하게 서 있는 나무들에게 길 안내를 받을 수 있었으니 말이다. 팔을 옆으로 뻗은 채 나무 기둥에 손끝을 스치며 그렇게 계속 걸었다.
얼마 안 가 사람들이 줄 서 있는 곳에 멈췄다. 다들 한 번씩 안아보고 가는 나무가 있었다. 한아름 안아도 둘레의 절반밖에 미치지 못하는 걸 보아 아마 신사에서 가장 굵은 나무인 듯했다. 나무 기둥을 아래서부터 찬찬히 올려다보니 거친 질감을 진정시킨 듯한 표면이 눈에 띄었다.
어림잡아 성인 평균 키에 해당하는 높이. 아하, 그렇구나. 여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포옹을 받아왔길래 넌 이렇게 매끈해진 거니-라는 싱거운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새 내 차례가 되었다. 잠시 머뭇대다 손바닥을 조심스레 갖다 대어 보았다. 울컥. 형용하긴 어려우나 눈물지을 수밖에 없는 아늑함이 있었다. 나를 둘러싸던 공기는 한없이 아름다워 공명할 수밖에 없는 밀도를 지니고 있었다.
그냥 떠나긴 아쉬워 남들처럼 두 팔 활짝 벌려 안아보았다. 나무 기둥은 제 그늘 아래라 해를 쬘 일이 없었는데도 어딘가 미지근했다. 이 온기는 잎을 타고 내려온 여름의 열기일까, 아니면 방금 떠난 앞 사람의 체온일까.
껴안은 자세였음에도 포옹을 받는 이는 다름 아닌 나인 것 같다는 착각이 들었다. 자신의 소망을 나무판에 새기거나 종이쪽지로 달아매는 신사에서, 나만은 나의 작은 소망을 그해 생길 나이테에 끼워두는 상상을 하며 혼자 즐거워했다. 양팔 두른 자세를 풀고 자리를 떠나는 순간까지도 여전히 찰랑이는 후우링 소리에 청각을 맡긴 채였다.
지금까지도 귓가를 울리는 후우링 소리는 당장이라도 날 히카와 신사에 데려다 줄 듯하다. 한 번 방문한 여행지에는 미련을 두지 않는 편인데도, 히카와 신사만큼은 죽기 전에 꼭 재방문하겠다고 매년 다짐한다. 그곳의 소리가 이토록 그리운 이유는 무엇일까. 반나절에 불과한 짧은 시간 동안 나는 무얼 남겨 두고 온 것일까. 혹은 무엇을 되찾고 싶은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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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는 시간을 찾아 헤맨 적이 있는가. 시간을 악착같이 소모해야 하는 자원으로 바라보는 이 세상에 맞서본 적이 있느냐는 물음이다. 현대인이라면 응당 해야 할 일투성이라며 하루하루 시간에 쫓긴다. 시간을 좇는 게 아닌 시간에 쫓기는 삶. 이루어 내야 하는 것들에 파묻혀 살다 문득 나의 시간이 내 것이 아니라는 느낌을 받곤 한다.
재작년 휴학을 결심하였던 순간도 그러했다. 분명 나의 시간들인데 나를 스쳐 지나가지 않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쉼표를 찍어버렸다. 잠시만요, 숨 좀 쉴게요. 생각해보면 여행은 쉼표를 찍을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이다.
시간에 대한 느긋한 태도는 본질적으로 풍요의 한 형태이다. - 보니 프리드먼-
히카와 신사에서는 시간이 느리게 흐른다. 충분히 느려서 평소였으면 그냥 지나쳤을 풍경 소리도, 나무의 온기도, 나의 소망도 전부 선명해진다. 그곳에서의 기억이 애틋한 건 단순히 아름다웠기 때문만이 아니다. 나는 그날 가쁜 숨을 가라앉히고 어지럽게 부유하는 나의 시간도 가라앉혔다. 반나절 동안 느린 공기 속에 머물며 삶의 속도를 진정시킬 수 있었다.
우리는 결코 시간을 지배할 수 없지만, 내 시간의 주체 정도는 될 수 있으리라. 허덕임을 멈추고 순간을 음미하다 시간의 주체가 되어 본 그때의 감각을 지금까지도 종종 그리워한다. 후우링 소리가 그리운 이유이지 싶다. 가속이 붙는 일상 속 희미해져 가는 자신을 견디지 못할 때쯤 히카와 신사로 훌쩍 떠날지도 모르겠다.
달여섯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