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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낫띵nothing Nov 03. 2024

<나도임> 그런데 나는 왜?

나는 나르시시스트에게서 도망친 임상심리사입니다. 

한번, 두 번, 세 번 그리고 벌써 네 번째다. 집으로 찾아온 게 이번이 네 번째이다. 세 번째 까지는 잘 돌려보냈다. 무반응, 친구 부르기, 바쁜 척 하며 두고 가버리기를 했다. 분명하게 거절의 의사를 밝혔다. 다시는 오지 말라는 확실한 표현도 했다. 그리고 다음에는 신고를 하겠다고 경고했다. 세 번째와 네 번째 사이에는 텀이 꾀 길었고, 그동안은 전화도 없었기 때문에 마음을 놓고 있었다. 


저녁 10시쯤 인터폰이 울렸다. 배달을 시키지 않았는데 이 시간에 초인종이 울린다는 것은 하나의 경우 밖에 없다. 매번 건물 앞에서만 기다리던 나의 나르시시스트가 이번에는 현관 앞까지 들어온 것이다. 공동현관 비밀번호쯤이야 쉽게 뚫을 수 있으니까. 처음 찾아왔을 때는 심장이 두근거리고 불안했는데 이쯤 되니까 아무 느낌이 없었다. 나는 인터폰으로 차에 가서 기다리면 내려가겠다고 말했다. 내려가는 것을 확인하고 차키를 챙겼다. 여차하면 차로 도망갈 생각이었다. 


- 진짜 안 오려고 했는데 또 왔어. 

"응"

- 그렇게 ai처럼 대답만 하지 말고 우리 얘기 좀 해.

"나는 할 말 없어"

- 나는 있어

"그럼 해"

- 왜 그렇게 차갑게 말해. 따뜻하게 대해주면 안 돼?

"나는 할 말 없어. 너도 없으면 갈게."

- 알겠어 알겠어할게. 할 테니까 간다고만 하지 마. 


나의 대응은 항상 똑같다. 나의 나르시시스트가 하는 말도 매번 똑같다. 말의 요점이 없다. 여기까지 와서 꼭 해야 할 만큼 중요한 내용은 없다. 왜냐하면 목적이 대화가 아니기 때문이다. 자신의 대화에 말려들게 해서 내 감정을 끌어내려는 의도이다. 말려들기만 하면 설득, 회유, 약속등으로 다시 자신의 통제안에 넣어두고 싶은 것이다. 할 말이 있어서 온 게 아니다. 잃어버린 유실물을 찾으러 왔을 뿐이다. 나르시시스트는 자신의 의도를 인지하고 있지 않다. 이것도 뒤에서 더 자세히 다루겠지만 악의가 없어서 더 대처하기가 힘들다. 자신의 행동이 선인지 악인지도 모르고 타인에게 해를 끼치는 순수악이라고 볼 수 있다. 나는 나의 나르시시스트가 하는 말도 안 되지만 또 말이 되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생각했다. 



그래, 너는 나르시시스트라서 이런다고 치자. 
그런데 나는 왜 너를 받아주고 있는 걸까?









나르시시스트에게서 도망치는 1년 2개월 내내 나는 나의 취약점이 연민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나르시시스트가 불쌍하다. 그런데 나의 친구는 그들은 불쌍한 게 아니라고 했다. 그래서 나르시시스트에 대한 연민이 조금이라도 표현되면 친구는 버럭 화를 냈다. 아프리카 난민이 더 불쌍하다며, 또 나르시시스트에게 당한 내가 더 불쌍하다고 했다. 내가 상담한 피해자들에 비하면 나는 당한 것도 아니다. 하지만 나와 비교도 안 되는 그들의 큰 고통 속에도 나르시시스트에 대한 연민의 감정이 있다. 한 사람을 깊이 알고 나면 이해 못 할 게 없다. 이해하고 나면 연민이 생길 수밖에 없다고 했더니 친구는 깊이 알고 싶지 않다고 했다. 그렇지만 그게 나의 직업이다. 한 사람을 깊이 알아야 한다. 직업 특성인지 원래 성향인지 모르겠지만 나에게는 거부할 수 없는 불쌍한 포인트가 몇 가지 있다. 그 포인트를 나의 나르 시시스트는 가지고 있다. 그 때문에 나는 나의 나르시시스트에게 최소한의 대응을 한다고 생각했다. 


한시라도 편해 보이지 않는 모습이 불쌍했다. 본인은 모르겠지만 관심과 인정을 받지 못할 까봐 매번 긴장하고 불안해하는 게 눈에는 보였다. 같이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나기만 해도 "어디가?" "왜? 뭐 하게?" 하면서 통제할 수 없는 상대의 행동도 다 확인해야 한다. 항상 불안한 상태이다. 

상대방에게 잘해줄 때도, 비난을 할 때도, 매달릴 때도, 웃고 있어도, 화를 내고 있어도 불안해 하고 있다. 계속 관찰하다 보면 상대방 눈치를 보고 있는 걸 알 수 있다. 눈치껏 잘하고 싶은 건 아니다.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보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의 시선을 모두 의식하고 있다. 상대방의 반응을 살핀다. 누군가 자신을 공격하지는 않을까 경계한다. 조금이라도 자신의 자존감에 위협이 될 것 같은 상대를 보면 '으르렁' 거린다. 상대방의 표정, 목소리 톤, 말투 하나하나 다 꼬투리 잡는 것도 민감하게 관찰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무표정도 그들에게 위협이다. 나르시시스트는 지옥에 살고 있다. 뭐가 저렇게 불안할까? 힐끗 보면 세상 제일 잘난 사람처럼 굴지만, 자세히 보면 세상 불편해 보인다. 나는 이런 모습에 연민을 느낀다. 그 핑계로 최소한의 방어만 하는 나를 합리화했다.




연민? 나르시시스트는 뭐 얼마나 대단한 불안하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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