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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훈 Sep 05. 2022

觀 - 감정에서 떠오르기

부자로 가는 길에서 만난 수행자(9) 2-1


오늘부터는 "부자로 가는 길에서 만난 수행자"의 두 번째 챕터입니다.



지난번 첫 번째 챕터 멈추기 止 파트를 갈무리하며 예전에 써 두었던 두 번째 챕터 관조하기의 내용을 다시 정리하면서 원고를 많이 수정하느라 지난주에 글을 올리지 못했습니다. 글을 쓸 때마다 인식이 깊어지고 할 말이 많아지는데 마음공부가 처음인 분들도 이해하기 쉽게 쓰려고 하다 보니 시간이 더 걸리는 것 같습니다. 어쩌면 글이 길어지는 것은 제 집착이 아닌가 하는 마음이 들기도 해서 여러 번 고민하고 이번 글을 씁니다.



부디 이 글이 여러분의 뇌에만 기억되지 않고 가슴에 가 닿기를 바라면서...








2-1. 관조하기 觀 - 나의 감정에서 떠오르기



부자로 가는 길에서 만난 수행자에게서 배운 두 번째 단계는 바라보는 시선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때 볼 관觀이라고 쓰는 것은 볼 視 와는 좀 다른 면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볼 視는 보이다(示)와 본다(見)를 합한 글자인 반면, 볼 觀이라는 글자는 떠올라서 본다는 뜻입니다. 觀이라는 글자는 황새(雚)처럼 높이 떠올라서 본다(見)는 말입니다.




관조한다는 것은 그만큼 높이 떠오른 시선이라는 뜻입니다.



보이는 대로 보기만 해서는 사물과 사람의 전모를 파악할 수 없습니다. 관조하는 높은 시선을 유지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높아진 시선으로 보아야 할 것이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나'의 실체이고 또 하나는 '세상(남)'의 실체입니다.




1) 나에게서 떠오르기



사물을 한눈에 파악하기 위해서는 비행기를 타고 높이 올라서 보거나 드론을 띄워서 공중에서 촬영한 것을 보면 되겠죠.



그러나 경제활동은 물리적 높이만 높아진다고 그 실체를 파악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의식의 시선이 높아져야만 하는 것이죠. 그리고 모든 경제활동에는 인간의 심리가 배어있기 마련이므로 인간의 내면을 관조하는 인문학적 통찰도 필요합니다.



통계적인 숫자로 파악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숫자 너머에서 흐르는 인간의 심리를 나타내는 정량화할 수 없는 징조를 확인하는 인문학적 시선도 필요합니다. 경제주체들의 움직임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거시적이고 높은 시선과 인간의 심리를 파악하는 미시적이고 깊은 시선을 함께 갖추는 것이 관조입니다.



그러나 내가 내 안에 머무르면서 보는 것으로는 실체를 보기가 어렵습니다. 워낙 오랫동안 나의 감정과 생각, 몸이 나와 혼연일체가 되어 있어서 온통 나의 실체를 가리고 있습니다. 실체가 아닌 것으로부터 참된 나의 모습을 분리해서 바라보아야만 실상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86세대(80년대 학번 60년대 생)로 대표되는 저와 제 또래 어른들은 좋은 시절을 만나 열심히 일을 했습니다. 워라밸 이란 것에 대한 것은 저의 세대에서는 상상도 하지 못한 개념이었죠. 그저 달리고 또 달려서 어느 정도 살만한 세대가 되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세상이 바뀐 것을 모르고 제 또래 86세대 어른들은 자녀세대인 Z세대에게 그저 열심히 공부하라면서 온통 세상을 경쟁이 난무하는 전쟁터로 만들어 버렸죠. 후배 세대인 M세대에게도 똑같은 잣대로 평가하며 꼰대 짓을 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습니다. 86세대가 안정과 경제적 번영을 이룬 것은 그들이 열심히 해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가장 큰 것은 그 당시 세계적인 경제 여건이 좋았던 때문입니다. 86세대가 이룬 것의 상당수는 실력이 아니라 그저 운이 좋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세대가 실력과 운을 구분하는 지혜를 갖추진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저 후배들과 자녀들을 경쟁과 힘들게 뛰어다니며 공부하고 일하라고 다그쳐 왔던 것이 결국 오늘날 우리가 겪는 팍팍한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정작 세상의 흐름을 一以貫之(일이관지)하며 꿰뚫어 보는 통찰을 얻기 위한 실전 경제공부를 하는 사람은 드뭅니다. 그보다 더욱 중요한 자신의 마음을 이해하기 위한 마음공부를 하는 사람은 더욱 드물지요. 저는 이 두 가지 공부가 가장 중요한 공부라고 봅니다. 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공부! 공부! 하면서 그렇게 다들 달려가는데 가장 중요한 이 두 가지 공부는 빼놓고 그저 껍데기만 훑다가 지쳐버리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마라톤을 하기 전에 준비 운동하며 몸을 풀다가 이미 지쳐버려서 정작 출발선에 서지도 못하거나 출발 신호가 울렸는데 아무 의욕이 없어 터덜거리며 걷거나 달리기는 하는데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우왕좌왕하는 MZ 세대들을 볼 때마다 미안하고 안타깝습니다. 기성세대로써 MZ세대에게 너무도 큰 마음의 빚을 느끼고 있습니다. 이 글을 통해 부족하지만 조금이나마 마음의 빚을 갚고 싶은 마음입니다.



앞으로 세 번에 걸쳐 나의 본질을 파악할 때 가장 혼동되고 있는 세 가지를 살펴보고 내 마음이 과연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확인해 보려고 합니다. 그래야만 나답게! 자유롭게!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을 테니까요.




나는 내 감정이 아니다.



특별히 한국인들은 감정에 쉽게 끌려 다닙니다.



흔히 하는 말로 기분 좋으면 모든 게 다 되고, 기분이 나쁘면 되는 게 하나도 없는 사람들이 한국인 같습니다. 물론, 세계 어딜 가나 사람들의 성향이 크게 다르지 않지만 유럽이나 미국 사람들에 비해 좀 더 그런 경향이 강한 것 같습니다.



생각이 나의 실체가 아니라 나의 소유물이듯, 감정도 나의 소유물입니다.


아이가 숙제를 하지 않고 놀기만 해서 참다가 참다가 화가 머리끝까지 난 엄마가 아이에게 미친 듯이 소리를 지릅니다. 아이의 눈에 엄마는 완전히 딴 사람이 된 것처럼 엄마는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목소리가 끝도 없이 높아져만 갑니다. 아빠가 말려 보지만 소용이 없습니다. 뚜껑이 열린 셈이죠. 누가 봐도 엄마의 화를 통제할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 같습니다. 이때, 엄마의 핸드폰이 울립니다. 핸드폰의 스크린에는 '담임선생님'은 글자가 떠오릅니다. 엄마는 두세 번 기침을 하고 심호흡을 하더니 이내 평정심을 되찾고 차분하게 "아, 네~ 선생님. 안녕하셨어요?" 하면서 다시 천사의 목소리로 선생님의 전화를 받습니다. 세상의 그 누가 와도 엄마의 화를 가라앉힐 수 없을 것 같았는데 상황이 바뀌니 엄마는 순식간에 정상으로 돌아옵니다.





감정은 내가 선택한 것!



"이 상황에서 어떻게 내가 화를 내지 않을 수 있냐고? 정말 미치겠어. 나도 화를 내고 싶지 않지만 어쩔 수가 없다고!!!" 흔히 뚜껑이 열린 사람들이 하는 말입니다. 거짓말입니다. 감정은 내가 선택하는 것입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여기에서 핑계를 대거나 물러서면 의식의 진보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물론, 자신이 의도적으로 하는 거짓말은 아니지만 자기도 모르게 속아서 하는 말입니다. 흥분한 감정이 마치 내가 산책시키는 덩치 큰 개와 같이 자신을 끌고 다닌다는 사실을 몰라서 하는 말입니다. 사실은 화를 내야겠다고 마음을 먹은 것입니다. "내가 이 구역에서는 가장 센 사람이야! 내 말을 들으라고! 당장!" 하면서 몰아붙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즉각적인 효과가 있는 것 같지만, 결국은 그런 사람의 바람대로 좋은 결과가 있지는 않죠.



부모가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더라도 아이는 부모가 감정을 추스를 때까지 기다려 주지만 회사에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아무리 회식자리에서 술잔을 들어 올리며 "우리가 남이가! 가족같이!" 소리를 질러도 회사가 가족이 아니라는 것은 CEO 본인도 알고 직원들도 다 알고 있습니다. CEO가 감정을 이해하지 못할 때 벌어지는 일들은 고스란히 직원들의 무기력과 성과 저하, 조직의 방만함으로 이어지기 마련입니다.




감정과 의식의 에너지 수준 살펴보기



의사이자 영성이 높은 명상가였던 데이비드 호킨스 박사의 "의식혁명", "놓아버림 Letting go"과 같은 책은 의식과 감정의 다양한 수준과 그에 따른 에너지 수준을 함께 보여주고 있습니다.





흔히들 4차 산업혁명 시대라며 새로운 시대가 열린다고 다들 열심히 무언가를 하고 있지만 저는 앞으로 5차, 6차 산업혁명이 일어나도 인류 전체의 행복이 상승하리라고 보지 않습니다. 2차 산업혁명 이후가 가장 극적으로 인류의 재화가 늘어나고 풍족하게 되었지만 1인당 소득이 1만 5천 불 이상이 넘어가면 (조사에 따라서는 가계 소득이 약 8,000만 원이 넘어가는 것이 경계라고도 합니다.) 경제적 풍요는 행복도에 그리 큰 영향을 주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3차, 4차 산업혁명은 오히려 사회적 자원의 불균형이 더욱 심화되는 방향으로 진행되어 결국 인류의 관점에서 행복은 더 멀어지는 것처럼 보입니다.





지금 4차 산업혁명 시대에서 잠시 멈추고 진정으로 필요한 혁명은 의식혁명이 아닌가 하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내면을 들여다 보고 의식의 진보를 통해 많은 인류가 깨어난다면 이미 가지고 있는 자원으로 더욱 평화롭고 행복한 세계를 우리 자녀들에게 물려줄 수 있지 않을까요? 핵무기와 대량살상 무기만 처분해도 전 인류의 어려움을 해결할 자원으로 쓸 수 있습니다. 이사야서에 나오는 이야기대로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드는" 그런 시대를 다음 세대에게 물려주는 방법은 없을까요? 전쟁과 경쟁의 세대는 우리 세대에서 끝낼 수 없을까요? (칼을 쳐서 농기구를 만드는 이 동상이 가장 많은 전쟁무기를 만들어 내는 미국의 심장 뉴욕의 UN 본부 앞에 있다는 것이 아이러니합니다.)



마더 테레사가 시대의 영성 지도자라면서 높이 평가한 그는 의식과 감정의 에너지 수준에 관한 지도를 만들었습니다. 특별히 감정의 수준도 세밀하게 구분해 놓아서 감정을 깊숙하게 살필 수 있어서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인간의 행복과 불행은 감정에 상당한 영향을 받는데 정작 우리는 감정이 얼마나 다양하고 아름다운지, 그 뒤에 숨은 의미는 무엇인지 도통 배우 지를 못했습니다. 부모님도, 선생님도, 우리 주변에서 내게 영향을 줄 만한 사람 중에서 아무도 몰랐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제가 감정에 대해 이해하기 시작하면서 이렇게 인간의 삶의 질을 크게 좌우하는 소중한 것에 대해 왜 아무도 가르치거나 관심을 두지 않는지 그것이 더 신기할 정도였습니다.




감정을 세세하게 구분하고 그 뒤에 숨은 욕구를 이해하지 못하면 무지갯빛 같은 다양하고 이쁜 감정을 흑백처럼 무채색으로 표현하게 됩니다. '좋다, 나쁘다.' '좋다, 싫다.' '짱 좋다, 짱 싫다.' '짱난다...' 뭐 이런 정도로 밖에 감정을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은 삶에서 발생하는 다양하고 아름다운 감정의 오케스트라 소리를 그저 소음처럼 들을지도 모릅니다. 한 마디로 총천연색 삶이 펼쳐지는데 흑백텔레비전을 보는 것처럼 단조로운 삶이 되겠죠.



놓아버림을 읽으며 크게 깨닫게 된 것은


부정적인 감정에도 에너지가 있어서


그것을 직면할 수 있는 용기만 있다면


부정적인 감정이 반드시 부정적인 상황을 만드는 것은 아니다!


라는 사실입니다.



슬픔이나 불안, 두려움과 같은 부정적인 감정은 그 자체 보다도 그런 불편한 감정을 피하려고만 하는 나의 오래된 습관이 훨씬 더 부정적인 상황을 만든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데이비드 호킨스 박사가 정리해 둔 의식 수준과 감정의 레벨에 따라 삶은 어떻게 펼쳐지는지를 한눈에 보기 쉽도록 정리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각각의 의식 수준과 삶에 따라 神에 대한 느낌이 어떤지에 대해서도 정리해 두었습니다. 이 책에서는 神이라고 표현했지만 종교적인 느낌이 불편하시거나 다른 종교를 가진 분들이라면 무한한 창조적 에너지 또는 우주의 기운, 道, 佛法, 다르마, 영성... 무엇이라고 이름을 붙여도 좋을 것입니다. 어쨌든 인간 사유의 지평 너머에 있는 어떤 에너지에 관한 이야기라고 보면 될 것입니다.




부정적 감정에서 긍정적 감정으로의 변곡점, 용기



저는 감정과 의식 수준에 따른 에너지의 도표에서 용기를 특이점 또는 변곡점으로 보고 별도로 분류했습니다.



용기는 겁이 없다는 뜻이라기보다는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있는 그대로, 피하지 않고 그대로 지켜볼 수 있는 의식 수준을 말합니다.



어떤 인과의 법칙으로 인해서 내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현실을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이라고 해서 피하려고 하거나 그것에 대해 부정하고 싶은 충동이 드는 때가 많습니다. 이럴 때 목구멍 깊숙한 곳에서 "이건 아니야...", "절대 용납할 수 없어..." 이런 마음이 들곤 하죠.



이런 마음은 제가 느끼기에는 마찰열과 같은 것입니다.



물리학에서 마찰열은 무언가 서로 운동의 방향이 달라서 부딪치면서 생기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저항하고 있다는 것이죠.


현재가 곧 진리이고, 현재가 곧 신의 선물입니다. 그것이 비록 마음에 들지는 않더라도 말이죠. 진실에 대한 저항이 고통의 시작입니다. 이러한 진실 앞에 겸허하게 자신의 저항을 내려놓고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는 마음이 바로 용기입니다.





그런데 마찰열은 폐열이라고 합니다. 자원으로 쓸 수 있는 에너지가 아니라 버려지는 에너지라는 뜻입니다.



내 마음속에서 올라오는 현재의 진실에 대해 저항하는 것은 상황을 전혀 좋게 만들 수 없을 뿐 아니라 내가 가진 에너지조차 낭비하는 셈입니다.



인생의 세 가지 자원


인생에는 세 가지 자원이 있습니다. 모두 다 함부로 낭비하면 안 되는 것이죠.


첫째가 시간, 둘째가 의식적 에너지, 셋째가 돈으로 대표되는 물질이죠.



돈은 태어날 때부터 차이가 있는 것이 사실이고 개인의 교육 수준이나 능력에 따라 차이가 많은 자원입니다.


그러나 시간과 의식적 에너지는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진 것입니다. 돈이나 시간도 낭비하면 안 되지만 의식적 에너지도 낭비하면 안 됩니다.



그런데 돌아보면 불안과 두려움, 슬픔과 외로움에 저항하면서 제 의식적 에너지를 낭비하는 시간이 많았습니다. 너무도 아까운 인생의 두 가지 자원을 낭비한 것이죠. 가격에 비해 형편없는 물건을 잘 못 사면 그렇게도 화가 나고 아까워하는데 정작 소중한 의식적 에너지와 시간을 후회와 원망, 분노로 낭비한 것에 대해서는 그렇게 아까워하지 않는다는 것은 참 아이러니합니다.




부정적 감정에는 부정적 상황과 채워지지 않은 욕구가 숨어 있어



모든 상황이 다 마음에 드는 인간은 없을 것입니다. 부처님도 예수님도 화를 내거나 현실을 바꿔 보려고 노력한 적이 있었으니까요. 화가 나는 것은 자연스럽지만 그것에 대처하는 것도 자연스러운가요?



인간의 욕구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현실적으로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하면 됩니다. 그러나 받아들이는 것 외에는 아무런 방법이 없는데도 분노하거나 원망하는 것은 의식적 에너지를 낭비하는 셈입니다.



아슬아슬하게 운전하는 사람 때문에 크게 놀랐다면 그 순간 속에서 욱하는 마음이 드는 것은 인지상정입니다. 그러나 그날 밤에 잠자기 전에 낮에 그 옆 차의 운전자 얼굴과 차량의 모습이 떠올라 이불킥을 하면서 욕을 하며 잠을 설친다면 그것은 낭비입니다.



동료가 내가 없는 자리에서 내 흉을 본 사실을 알았다면 그 당시에 불편한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물론 수행이 잘 된 분이라면 그런 상황도 그렇게 마음속에서 마찰이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저 녀석에게 어떻게 하면 되갚아 줄까"하면서 두고두고 이를 갈고 있다면 이것도 의식적 에너지와 시간을 낭비하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인생의 얼마나 많은 순간들을 낭비하면서 살았는지 모릅니다.



수명을 단 1년이라도 더 늘리기 위해 좋은 음식과 영양제를 챙겨 먹고 정기적으로 건강검진을 하면서도 이런 분노와 원망, 후회와 슬픔에 휩싸여서 인생을 낭비하면서 살펴보지 않은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이런 부정적 감정이 인생에 있어 낭비라고 생각이 든다고 해서 피하거나 몰아내려고 하면 그 부정적 감정에 더욱 에너지를 불어넣는 셈이 되어서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더 생명력을 갖고 오래 남아 있게 됩니다. 그런다고 물러갈 감정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데이비드 호킨스 박사의 권유처럼 나의 감정을 그대로 지켜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아, 내 속에서 분노가 올라오고 있구나."



"내가 슬픔을 느끼고 있구나." 하고 그런 부정적인 나의 감정도 그대로 허용하고 잠잠히 지켜보는 것입니다. 그 감정의 폭풍 아래 가라앉아 있는 나의 채워지지 않은 욕구를 마주할 때까지 고요하게 지켜보는 것입니다.




부정적 감정은 떼를 쓰는 어린아이



부정적인 감정은 떼를 쓰는 어린아이와 같아서 자기를 봐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아이가 떼를 쓴다고 아이가 하자는 대로 다 할 필요는 없는 것처럼 내 속에서 부정적인 감정이 올라올 때도 그대로 따라갈 필요는 없습니다. 나는 내 감정이 아니니까요. 나는 감정을 소유한 사람입니다. 취할 수도 있지만 그냥 흘러가도록 놓아버릴 수도 있습니다.



감정은 내가 아닙니다. 그러니 그 감정이 시키는 대로 다 할 필요는 없습니다.



분노라는 감정의 유효기간은 매우 짧습니다. 아드레날린과 같은 분노 호르몬의 반감기는 불과 몇 초 정도입니다. 그러니 몇 초만 지나도 폭발적인 분노의 감정은 절반으로 줄어듭니다. 조금만 있으면 원래 수준으로 감정이 사그라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감정에 끌려가면서 화를 내고 소리를 지르면서 분노를 표출하면 상대는 그에 따르는 자기만의 방어태세를 취하거나 아니면 내게 공격을 퍼부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다시 분노 호르몬이 폭발적으로 늘어나게 됩니다. 이렇게 분노를 표출하면 지속적으로 분노에 휩싸이게 됩니다.



반면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압하면 내 속에서 분출되지 못한 분노의 에너지가 나를 계속 불편하게 하면서 내 생각을 사로잡습니다. 마치 다람쥐 쳇바퀴처럼 내 머릿속에서 나를 화나게 한 상대방에 대해 응징하고 싶은 욕구와 힘이 올라옵니다. 한편, 상대방보다 내가 약해서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억울함이 뒤섞여서 머릿속에서 뱅뱅 돌면서 계속 마찰열을 일으킵니다.



분노 호르몬은 유효기간이 몇 초인 반면 분노에 대한 몸의 반응을 조절하는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티졸의 반감기는 한 시간이 넘습니다. 그러니 분노 호르몬이 나오고 난 뒤에도 스트레스 호르몬은 계속 몸안에 남아 있어서 사람을 지치게 만듭니다. 화를 내거나 화를 참으면 사람이 기운이 쭉 빠지는 것은 코티졸이 계속 분비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이 자주 반복된다면 만성피로나 번아웃 증후군에 쉽게 빠지고 몸에 에너지가 남아 있지 않으니 아무런 의욕이 없게 됩니다.



분노를 표출하면 상대의 감정을 다치게 하거나 내 속에 있는 더 큰 분쟁을 만들 수 있습니다.



반면 분노를 억압하면 내 속에서 악순환의 고리가 지속되면서 스트레스 호르몬의 분비가 지속적으로 일어나 사람이 지치고 의욕이 없어집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 분노를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요?




분노에 대한 제3의 반응, 놓아버림



데이비드 호킨스의 말대로 다만 그대로 지켜보고 그런 감정이 거기에 있다는 것을 알아채기만 하면 됩니다.



왜냐하면 부정적인 감정은 떼를 쓰는 어린아이와 같은 상태이니까 알아주기만 하면 됩니다.



저는 화가 나서 칭얼대는 제 감정에게 우쭈쭈 하면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랬어?


어떤 욕구가 채워지지 않아서 그랬어?


그랬구나... 그래서 그렇게 화가 났구나."



분노에는 반드시 채워지지 않은 소망이나 욕구가 있습니다. 대체로는 안전, 존중과 같은 기본적인 욕구이지요.



그러면 내 속에서 짜증을 부리던 부정적인 감정의 어린아이는 이렇게 말합니다.



"저 사람이 나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은 나를 존중하지 않는 것이라고 느꼈어.

나는 저 사람이 나를 존중하는 태도로 이렇게 상냥하게 말해 주면 좋겠어."



그런데 이 말을 상대방에게 내가 존중하는 방식으로 말을 하지는 못합니다. 그냥 나도 화를 내고 말죠. 이건 게임에서 진 겁니다.



떼를 쓰는 어린아이에게 넘어간 셈이죠.



저도 연습 중입니다.



매번 잘 되지는 않지만 있는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용기를 유지하려고 합니다. 불편하지만 사실이니까 내 속에서 올라오는 불편한 감정을 그대로 느껴보려고 합니다.




모든 감정을 존중하기



지혜와 평화와 같은 긍정적인 의식 수준으로 가기 위해서는 불편한 것을 피하지 않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대규모 감정에 관한 심리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좋은 감정만 오래 느끼는 사람이나 부정적 감정에 오래 머무는 사람보다 좋은 감정과 부정적 감정을 모두 골고루 느끼는 사람들이 더 자기 삶에 대한 만족도가 크고 상황에 대처하는 능력이 좋았다고 합니다. 어떤 감정도 불필요하지는 않습니다. 단팥에도 약간의 소금이 들어가야 단맛이 살아나듯 인생에 있어서 모든 감정은 그대로 존중받아야 합니다. 인생을 풍성하고 깊이 있게 하는데 부정적 감정도 제 역할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데이비드 호킨스 박사가 이야기하는 의식 수준에 따른 에너지는 요가에서의 차크라의 에너지와 관련이 있어 보입니다. 물라다라라는 가장 기초적인 뿌리 차크라의 에너지가 200입니다. 어쩌면 인간의 삶은 이 뿌리에서 시작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데이비드 호킨스의 용기도 에너지 수준이 200이니까 용기가 바로 우리의 생명력의 시작점이라고 생각됩니다.




용기 이하의 의식 수준은 삶을 더 생생하고 풍성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삶을 축소하고 어둡게 만드는 에너지입니다. 그렇다고 그런 부정적 에너지를 몰아내려고만 하면 오히려 그런 부정적 감정의 유효기간을 늘리는 것과 같습니다. 있는 그대로 허용하고 마치 구름이 흘러가는 것을 보는 것처럼 내 속에서 일어나는 온갖 부정적 감정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감상을 해 보는 것도 좋습니다.



감정은 정말로 구름과 같아



내가 그것을 붙잡으려고 한다고 실제로 붙잡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조각구름처럼 흘러갈 것이 나의 의식적 에너지를 통해 힘이 세져서 먹구름이 되고 때론 폭풍우가 되어 나를 집어삼킬 수도 있습니다.




부정적인 감정이든 긍정적인 감정이든 잡으려고 애쓰는 것이 집착입니다.



모든 고통이 이 집착에서 시작한다는 것은 굳이 부처님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누구나 이해하시리라 생각합니다.



나의 감정을 이해해야 다른 사람의 감정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경제 주체들이 합리적으로 의사결정을 하는 것으로 가정했던 경제학의 기본 전제가 무너진 지 꽤 오래되었습니다.



다니엘 카너먼이 정립한 행동경제학과 행복심리학은 인간이 합리성에만 의존하여 머리로 판단하고 소비나 투자를 결정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히려 감정에 의존하고 객관적으로는 비합리적인 의사결정도 스스럼없이 하는 것이죠.



경제의 거시적 흐름은 경제주체들의 심리를 이해하지 못하면 따라잡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타인의 심리를 알기 이전에 자신의 마음부터 분명히 알아야만 타인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는 기초가 됩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습니다.



매일같이 떠오르는 다양한 생각과 감정에 집착하고 사로잡히는 나의 마음을 고요한 마음으로 바라보는 관찰자가 바로 나입니다. 생각도 감정도 그대로 흘러가게 두고 필요할 때만 취하고 도움이 되지 않는 것들은 그대로 흘러가게 하는 것이 수행자의 마음입니다.




오늘은 나의 실체와 내가 오랫동안 나라고 착각하면서 함께 살아온 생각과 감정에서 떠오르는 과정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완전한 깨달음을 얻어서 세상을 초월한 사람이 된 것은 아닙니다. 여전히 일상에서의 일들은 내가 원하지 않는 일들이 벌어지고 때로는 저도 생각이나 감정에 끌려갈 때가 있습니다. 다만, 예전보다는 조금 더 자유로워졌고 마음이 좀 더 자주 고요하게 된 것은 사실입니다.



수명을 1년을 늘리려고 온갖 애를 쓰는 것이 저의 일입니다만, 때로는 번뇌와 집착을 벗어나서 고요할 수 있는 시간을 늘리는 것이 더 현명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별로 큰돈도 들지 않고 만족도도 훨씬 큰 가심비 최고의 장수비법이 아닐까 합니다.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 보고 자신의 실체를 대면하기 위해서는 앞장에서 이야기했듯이 보기 이전에 반드시 멈춰야만 합니다.



나의 관념, 습관, 자동적 사고, 부정적 언어를 모두 그친 후에야 나에게서 완전히 떠올라서 마치 조감도로 건물을 바라보듯이 떠올라서 높은 시선으로 관조하며 보아야만 실체를 알 수 있습니다.



관조해야 내가 진짜로 원하는 것을 알 수 있고, 변화무쌍한 사회적 환경 속에서 경제주체들 간의 상호관계의 실체를 편견 없이 바라볼 수 있습니다.







내일부터는 역대급 태풍이 온다고 하는데 모두들 무탈하게 지내시길 기도합니다.



이번 주는 민족의 명절이 있는 주간입니다.


모두들 한가위 달처럼 풍성한 명절이 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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